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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삼세불"

새샘 2022. 1. 27. 17:26

김홍도, 삼세불, 비단에 채색, 320x270cm, 화성 용주사 대웅전(사진 출처-출처자료 1)

 

단원이 화성 용주사龍珠寺 대웅전에 있는 불상을 그렸다는 사실이 '용주사 사적기'에 나오는데,  현재 대웅전 불상 뒤 후불탱화인 <삼세불三世佛>의 그림으로 보아 바로 단원이 그렸다는 불상 그림이 거의 틀림없을 것으로 이용희를 비롯한 일부 전문가들은 생각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로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지정된 문화재인 이 그림은, 불상 의궤儀軌[불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는 경전에 기록된 방법과 규칙]는 아마도 화승畵僧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전체 감독이나 또 손댄 것은 단원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2020년 1월의 동아일보 기사(출처자료2)는 강관식 한성대 예술학부 교수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이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그림이 정조 때 김홍도가 그린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강관식 교수는 "이 그림은 1790년 김홍도, 이명기, 김득신 등 궁중화원 및 왕실과 가까운 화승들이 함께 정조 대에 발달했던 서양화법을 전면적으로 구사해 불화 사상 유례 없는 새 양식을 창조한 것"이라고 했다.

 

용주사는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화성으로 옮긴 뒤 명복을 빌고자 세운 절이다.

<삼세여래체탱三世如來體幀>으로도 불리는 이 탱화는 화가 등을 기록한 화기畵記가 없는 탓에 제작 시기를 두고 논쟁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강 교수는 그림 한가운데 있는 축원문에 주목하였다.

그 내용은 "주상전하(정조) 수만세壽萬歲, 자궁慈宮 저하(혜경궁 홍씨) 수만세, 왕비전하(효의왕후) 수만세, 세자저하(순조) 수만세"이며, 위계상 아래인 자궁을 왕비보다 앞에 쓴 건 정조가 생전에 지시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밝혔다.

 

강 교수는 이 후불탱화를 적외선 촬영한 결과 원래 '주상, 왕비, 세자' 세 사람의 장수를 기원했다가 이를 덮은 뒤 고쳐 쓴 것으로드러났다.

준공 다음 해인 1791년 용주사에 들른 정조가 축원 문구롤 보고 자신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자궁을 넣으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후불탱화는 입체적인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성화聖畵처럼 보이기도 하여 서양화 기법이 활용된 20세가 초 작품이라는 해석에 대해, 강 교수는 그보다 150년 이상이나 앞선 1790년 도화서 화원들이 주도해 서양화 명암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궁중회화의 걸작이라 분석한 것이다.

그러면서 1789년 동지사冬至使[조선 시대에,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로 연경에 갔던 김홍도와 이명기가 천주당의 성화를 보고 돌아와 명암법과 투시법을 우리의 전통 화법과 융합해서 그렸던 것이며, 이들이 귀국도 하기 전 용주사 감동監董[조선 시대에, 국가의 토목 공사나 서적 간행, 불화불상 제작 따위의 특별한 사업을 감독ㆍ관리하기 위하여 임명하던 임시직 벼슬]으로 임명된 점에서도 정조가 당대의 새로운 문화를 담아 사찰을 조성하고자 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또한 1800년까지는 순조가 세자 책봉 전인 원자元子[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신분이었기에 제작 시기가 그 이후라는 반론에 대해서도 강 교수는 전 40책의 ≪한국의 불화≫에서 수록된 조선 불화의 축원문을 모두 조사한 결과 18세기에는 세자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 왕비, 세자를 축원문에 넣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김홍도의 그림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문화재청에서는 화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림 양식을 보아도 김홍도의 화풍과는 차이가 있어 그의 작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기록하고 있다(출처자료3).

 

이 후불탱화는 화면을 위아래 2단으로 나누어 그렸다.

상단은 중앙에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왼쪽에 과거불인 약사불, 오른쪽에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그려 놓았다.

하단에는 10대 보살 및 가섭과 아난, 그리고 나한과 사천왕 등을 배치하였는데, 그림 안의 여러 상들이 모두 상단에 있는 삼세불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 원형 구도를 이룬다.

 

삼세불의 법의와 석가의 광배는 홍색을 칠하고, 대좌에는 청색 연꽃을 표현하여 청과 홍의 대비를 보인다.

인물들의 얼굴과 드러난 신체 부위는 갈색 빛이 감도는 살색으로 처리하였다.

필선은 다소 딱딱한 편이나 모든 인물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이 구사되어 있는데, 이런 독특한 음영법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 시기 경기지역에서 활동한 경기파들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 수법이기도 한다.

또한 영주사 대웅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린 칠성탱화가 안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 탱화는 김홍도가 그렸던 원래의 그림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다른 화승이 김홍도의 그림을 본 떠 새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114/99210660/1

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100160000&pageNo=1_1_2_0

 

2022. 1. 2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