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단원 김홍도 "현종암" "삼불암" 본문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유명한 그림.
이것은 그가 44세 때 1788년 정조 임금의 명을 받고 금강산을 비롯한 영동嶺東 9군 9곡[지금의 관동팔경]을 김응환과 같이 다니면서 그린 것으로 당시 강세황도 동행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강세황의 ≪표암유고豹菴遺稿≫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단원이 그렸던 금강산 그림은 지금 전하는 것이 없는 대신, 세상에는 지금 단원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란 60폭짜리 화첩이 돌아 다니고 있다.
사군첩은 금강산과 더불어 인근 4군의 명승을 그린 그림으로, 이것이 혹시 그 당시 임금의 명을 받고 그린 그림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유홍준의 연구에 따르면 이 사군첩의 그림들은 당시 그림의 고본稿本[원고를 맨 책] 즉 초본抄本[원본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베낀 책이나 문서]일 뿐 원그림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술되어 있듯이 약 30미터 가까운 긴 횡권橫卷[가로로 긴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려 바쳤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원본을 지금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 나온다면 단원의 대표작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보면 그 당시 단원과 김응환이 그린 금강산 그림이 100여 장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실경을 그렇게 오랫동안 연습하는 동안에 일종의 사경산수寫景山水(실경實景산수)에 대한 아주 농숙한 맛이 비로소 나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단원 그림에는 거의 실패작이 없고 명품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 다니는 조그만 화첩그림도 아주 걸출한 것이 많다.
더욱이 50세를 전후해서 부터는 사경산수라고 할 수 있는, 간단한 경치에다 인물이 있는 독특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 이 또한 아주 능숙한 면모를 보여준다.
현종암懸鐘巖은 북한 땅인 동해 해금강 구역에 있는 바위섬이며, 영랑호 동쪽 바닷가에 있다.
옛날 인도에서 떠난 53불이 이곳에 도착하여 자신들이 왔다는 것을 알리려고 이 바위에다 종을 걸로 울렸기 때문에 '현종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위 위에는 '懸鐘巖', 앞에는 '나무아미타불'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현종암의 모양이 마치 뒤집혀진 배 같이 생겼으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53불을 태우고 배를 젓던 사공이 금강산을 타고 앉으려는 53불의 속셈을 알게 되자 격분하여 배를 뒤집어 모두 물속에 빠뜨렸는데, 그때 뒤집힌 배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위 이름을 복선암伏船巖 또는 선암船巖이라 불렀고, 지금 북한에서는 아침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바위라 하여 선조암先朝巖이라 부르고 있다.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삼불암三佛巖은 높이 8미터, 바닥 너비 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세모꼴 바위에 새겨진 대형 마애불磨崖佛이다.
가운데 여래, 좌우에 보살을 둔 보통의 마애불과는 달리 삼불 모두가 여래如來[부처의 다른 이름으로 미륵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로 추정]로 조각되어 있다.
삼불 크기는 모두 높이 3.7미터, 가슴넓이 1.3미터이고, 부처 조각은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한 수법이 독특하며, 잘 짜인 균형미에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맛이 난다.
마애불 오른쪽에 '三佛巖'이란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거대한 체구, 굵고 시원시원한 선 처리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삼불암 왼쪽 옆면에는 입상의 두 부처가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보관을 쓰고 양손에 정병을 든 관음보살과 왼손에 약함을 든 모습의 약사불로서, 앞면 삼불에 비해 선묘가 단순하면서 허술하고, 침통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삼불암 뒷면에는 작은 좌불 60개가 새겨져 있다고 설화에서는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론 60개가 채 못 되므로 53불을 염두에 두고 새긴 것인듯 하다.
삼불암 조각에 대한 설화는 나옹선사와 거만한 개성 부자 김동거사가 금강산 조사祖師[종조宗祖: 한 종파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펼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자리를 두고 벌인 불상 조각 내기다.
이 내기에서 나옹은 바위 앞면에 세 부처를, 김동은 뒷면에 60불을 새긴 결과 나옹 조각이 더 우세한 것으로 평가됨으로써 조사 자리를 놓친 김동은 비관하여 그 바위 아래 연못에 뛰어들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김동의 아들 삼형제가 달려와 슬피 울다가 아버지 뒤를 이어 못에 뛰어들었다.
이 설화 때문에 장안사를 지나 표훈사로 꺾어지는 길목에 있는 연못 이름이 '울소' 또는 '명연담鳴淵潭'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https://blog.daum.net/moongyu3502/294
3. http://www.mediabuddha.net/m/news/view.php?number=11629
2022. 1. 1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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