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8: 구바빌로니아 제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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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8: 구바빌로니아 제국

새샘 2022. 1. 13. 22:16

(왼쪽)태양신이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함무라비에게 건너주는 부조가 새겨진 비석과 (오른쪽)비석 아래 쐐기문자로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사진출처-http://neohan.org/archives/907)

 

1. 함무라비는 어떻게 제국을 결속시켰는가?

 

서기전 1792년 함무라비 Hammurabi(서기전 1810년경~서기전 1750년경)라고 하는 젊은 아모리족 Amorites 지배자가 바빌론 Babylon의 왕좌에 올랐다.

바빌론은 같은 이름의 수도를 기반 삼아 성립된 중부 메소포타미아의 미약한 왕국이었다.

함무라비가 권좌에 올랐을 때 바빌론은 그보다 강력한 많은 아모리족 왕국들 사이에 낀 허약하고 불안정한 왕국이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가에 자리 잡은 바빌론은 막대한 경제적·군사적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복 성향을 드러내는 강력한 적대세력 한가운데 자리 잡았던 까닭에 바빌론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함무라비는 권력이 야만적 폭력에 기반을 둘 필요가 없음을 이해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지배자였다.

그는 지능적 수법, 정치적 전략, 잔인한 술수 등을 통해 무력만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시리아 Syria의 고대 도시 마리 Mari[함무라비가 점령한 도시)에서 발굴된 다량의 쐐기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서판書板]은 함무라비의 명민함과 뛰어난 재능을 입증해주고 있다.

 

함무라비는 글을 무기로 사용했지만, 그 수법이 너무나 교묘했기 때문에 그가 겨냥했던 목표는 세월이 꽤 지난 뒤에야 밝혀졌다.

그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이웃들을 직접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서신과 사절, 속임수 외교, 기만책 등으로 강력한 적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도록 만들어 결국 그들끼리의 무력 충돌을 유도했다.

다른 아모리 왕국들이 고비용의 무의미한 전쟁에 빠져들어 힘을 소진하는 동안 함무라비는 그들의 상호 적대감을 부채질하면서 교묘하고도 은밀하게 그들 모두가 자신을 친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함무라비는 잠재적 동맹자로서의 가치가 컸기 때문에 이웃 왕국 지배자들은 그의 지원을 기대하고 물자를 제공했다.

함무라비는 때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자신의 왕국을 키웠고, 마침내 때가 오자 기진맥진 지쳐버린 이웃 왕국들을 덮쳤다.

그는 이런 정책을 통해 아모리 소왕국을 구바빌로니아 제국 Pre-Babylonia Empire(서기전 1894~서기전 1595)으로 변모시켰다.

 

함무라비 지배 아래 메소포타미아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통합을 달성했다.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만에서 아시리아 Assyria까지 이르렀다.

그 지역의 남반부—과거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던 곳—는 그 후 고대 세계에서 바빌로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토 통합을 위해 함무라비는 당시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마르두크) Marduk'을 제국의 최고신으로 끌어오리는 중대한 혁신을 가했다.

물론 왕은 수메르와 아카드의 옛 신들도 조심스럽게 숭배했지만, 만신전萬神殿[판테온 Pantheon: 모든 신을 모시는 신전]의 최고 지위에 오른 신은 마르둑이었다.

자기 도시의 옛 수호신을 계속 숭배하길 원하는 백성들은 그대로 옛 수호신을 숭배할 수는 있었지만, 그 모든 신은 마르둑에게 충성을 바쳐야만 했다.

 

 

2. 종교와 법률

 

정지적 지배권이 신의 승인에 근거한다는 개념은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수메르인의 관습과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었더 그 개념은 사르곤 Sargon, 나람신 Naram-Sin, 우르남무 Ur-Nammu, 슐기 Shulgi 등에 의해 온전하게 발전되었다.

함무라비가 시도한 혁신의 특징은 마르둑의 이름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고자, 다른 모든 신에 대한 마르둑의 우월성을 이용했다.

그는 마르둑의 도시인 바빌론을 지배하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함무라비는 자기가 섬기는 최고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침략전쟁을 벌인 최초의 근동 지배자였다.

이런 선례는 그 후 근동 정치의 특징이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2장에 나온다).

 

함무라비 지배하의 바빌론에서 정치 권력과 종교 관행은 완벽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 신년 행사에서 바빌로니아인은 마르둑이 수메르인의 혼돈의 신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재현했는데, 그것은 마르둑이 하늘과 땅의 주신主神임을 확인하는 행사였다.

한편 바빌로니아인은 마르둑의 혼돈에 대한 승리가 자연에 대한 예측과 통제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었고, 따라서 마르둑의 승리는 토지의 다산성과 직접 연관되었다.

이런 다산성의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신년 행사 기간에 사제들은 마르둑의 승천을 표현하는 신화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고, 그동안 왕은 신전 매춘부 한 명과 함께 신전에 들어가 제사 의식으로서 성관계를 가졌다.

이집트의 파라오, 고대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의 왕은 인간을 하늘과 땅에 이어주는 연쇄 관계에 있어 핵심 고리 역할을 했다.

 

함무라비는 제국의 결속을 위해 종교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몇 백 년 동안 누적된 선례와 지배 관행을 바탕으로 그는 자기 이름을 붙인 법령집을 공포하고 이를 돌에 새겼다.

이 법령집에서 왕은 제국 전역에 정의와 자비를 베푸는 근원으로 묘사되었다.

법령이 새겨진 2.4미터에 달하는 장엄한 돌기둥(맨 위 사진)이 이란 서남부에서 발견되었는데[지금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현대적인 의미의 법전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면 살인자에 대한 처벌 등 많은 항목이 누락되어 있다.

더욱이 현재 남아 있는 구바빌로니아 제국의 함무라비 왕국 Empire of Hammurabi의 법률 소송 기록에서 이 법전이 인용되거나 언급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함무라비 법전은 정의에 대한 왕의 헌신을 널리 선전하는 동시에, 법적 판단에서 왕이 기울였던 것처럼 관리들도 같은 관심을 보여줄 것을 촉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3. 구바빌로니아 사회

 

선언적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 사회구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전반적으로 수메르 문명의 복잡한 사회제도는 좀 더 단순하고 억업적인 체제로 바뀌었다.

상층 귀족—궁정 관리, 신전 사제, 군의 고급 장교, 부유한 상인—은 넓은 토지와 막대한 재산을 점유했다.

극소수에 불과한 상층 계급 아래에는 법률상 자유로운 수많은 개인으로 구성된 계급이 있었는데, 그들은 실질적으로 궁정 또는 신전에 예속되거나 유력자의 토지를 임차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들 예속민에는 노동자와 장인, 영세 상인과 농민, 하위직 행정·종교 관리 등이 포함되었다.

 

바빌로니아 사회의 밑바닥에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 인구는 수메르 시대보다 구바빌로니아 제국에서 훨씬 많아졌고 한층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 별개 집단을 형성했고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자유민—귀족이건 예속민이건—은 긴 머리에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남자 노예는 수염을 깎고 낙인이 찍혔다.

바빌로니아의 일부 노예는 거래를 통해 취득되었으며, 이것은 수메르의 관행에서 벗어난 또 다른 사례이다.

노예 가운데는 전쟁포로도 있었고, 자유민이었다가 빚이나 범죄에 대한 징벌로 노예가 된 경우도 있었다.

노예는 재산을 모으거나 남에게 돈을 빌려 자유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흔치 않았다.

 

구바빌로니아 사회는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귀족에 대한 범죄는 예속민에 대한 범죄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신분에 따라 신부 값 bride-price과 지참금이 달라지는 등 결혼제도에서도 계급 차이가 드러났다.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 사회에서 여상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은 자기 남편이 난폭하거나 게으르거나 가난할 경우 남편과 이혼할 권리를 갖는 등 일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아내와 이혼하는 남편은 처자식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보호 장치에도 불구하고 바빌로니아 법률은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간주했다.

배우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아내는 물에 빠뜨려 죽였으며, 간통 현장이 적발되었을 경우 정부와 함께 물에 빠뜨려 죽였다.

반면 남편은 신전 매춘부는 물론이고 노예나 첩과도 마음대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법적 특권을 누렸다.

 

 

4. 함무라비의 유산

 

함무라비는 서기전 1750년 즈음에 사망했다.

구바빌로니아 제국은 그의 후계자들 치세에 이르러 위축되었지만 함무라비의업적은 존속되었다.

함무라비의 행정 개혁은 그의 혁신적 종교 제국주의와 결합해 메소포타미아에 지속가능한 국가를 창출했다.

그 뒤 북방에서 온 침략자들이 수도를 약탈하고 점령할 때까지 2세기 동안 구바빌로니아 제국은 근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바빌론은 그 후로도 1천 여년 동안 그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함무라비의 유산은 국경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함무라비의 성공과 그것을 가능케 한 그의 예리한 안목과 의연함은 고대 근동의 왕권 개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함무라비 이후, 통일된 국가 종교는 근동 지배자의 정책에서 점차 중대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함무라비는 또한 정치 도구로서 문자가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입증해주었다.

외교, 광범한 기록 보존, 국제관계, 이 모든 것은 그 뒤 근동 제국을 특징짓는 것이 되었다.

또한 왕은 그의 영토 안에서 약자의 보호자, 정의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 왕들이 만든 기존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지만, 그 뒤 근동의 왕국 또는 제국의 지배자가 입법 활동을 필수 의무로 간주하게 된 것은 함무라비의 위대성에 영향 받은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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