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 구제발굴의 전성시대, 1990년대 본문
1990년대는 특히 고대사 부분에서 이미 알려져 있는 유적들에 대한 발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발굴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은 처음엔 사업을 위한 구제발굴로 시작했지만 점차 학술발굴로 발굴조사의 성격이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 시기보다 1990년대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 문화인식이 향상되었음을 반영한 현상일 것이다.
1. 발굴 양상
1980년대에 시작한 조선시대 궁궐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됨으로써 1990년대 내내 경희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발굴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경희궁은 복원되었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건립되었다.
그밖에 복원을 위한 조사는 아니었지만 예정 경희궁 터에 신축하는 교원복지회관(지금의 서울교원회관) 지역에 대한 발굴도 1998년에 이루어졌다.
1990년에 시작한 경복궁 발굴도 1990년대에 이르러 더욱 활발히 추진되었다.
경복궁에 대한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1994년 동궁 터, 1995년 훈국군영직소 터, 1997~1998년 태원전 터, 2000년 태원전 권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밖에 복원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경복궁 경내 수도 가압시설물을 옮기기 위한 발굴조사가 1998년에 실시되었다.
경복궁 발굴은 2010년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이전에는 조사가 없었던 창덕궁에 대한 발굴조사도 이루어진다.
아마도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파괴가 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995년 일제가 많이 파괴·변형시킨 인정전 행각 터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창덕궁도 2000년대에 다시 발굴이 이루어진다.
1990년대의 가장 중요한 발굴 중 하나는 풍납토성 발굴이었다.
1964년 이후 30여 년 만에 시작된 것이니 그동안 풍납토성은 서울의 역사에서 망각되어 있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996년 풍납토성 주변 중앙병원 복지시설 건립에 따른 발굴이 32년 만에 실시되었다.
이후 1997년 현대 연합주택 재건축부지, 남양연립 재건축조합 주택부지, 삼화연립재건축부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고, 1999년에는 풍납토성 동벽에 대한 순수한 학술발굴도 실시되었다.
이후 풍납토성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받는 경당연립 재건축부지에 대한 조사가 1999년에서 2000년까지 이루어졌고, 2000년에는 외환은행 직원합숙소 부지와 미래마을 재건축부지에 대한 발굴도 실시되었다.
이 가운데 경당연립과 미래마을 지역은 그 중요성 때문에 2000년 이후에도 계속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아파트 건설을 위한 풍납토성 지역에 대한 구제발굴은 도리어 풍납토성의 역사적 가치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점점 서울 지역의 백제사와 고대사를 이해하는 학술발굴로 그 성격이 변모되었다.
2000년 이후에도 발굴은 계속 추진되었다.
1990년대 발굴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은 아차산 일대에 분포한 고구려 보루들에 대한 발굴조사다.
이전까지 신라나 백제의 고분으로 추정하다가 1994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의 지표조사를 통해 고구려 유적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발굴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1997년과 1998년 2차에 걸쳐 아차산 제4보루, 1999년과 2000년 2차에 걸쳐 시루봉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차산 일대 보루들에 대한 조사는 2000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차산성은 그 중요성 때문에 이미 197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제대로 된 조사는 이때까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1997년 아차산성 종합복원계획에 따라 산성의 보수공사를 위한 발굴이 실시되었고, 1999년에는 성벽뿐만 아니라 산성 내부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다.
암사동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90년대에도 이어졌다.
암사동 유적은 이미 1988년 암사동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기존 전시관에 새로이 전시관을 신축하고자 1998년 발굴이 이루어졌다.
1999년에는 암사동 선사초등학교 신축부지에 대한 발굴도 실시되었다.
1998년에는 신정동 지역에 백제 초기 토성으로 알려진 신정동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사업을 위한 발굴이 아닌 유적을 확인하기 위한 순수 학술발굴이라 이채롭다.
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9년에도 있었다.
일원동에 위치한 대모산 정상에 있는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그것이다.
사실 대모산성은 거의 기록이 없어 그 실체가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1999년 한 방송매체가 대모산에 삼국시대 석성이 있다라는 보도를 함으로써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을 시작한 것이다.
1999년에는 정동에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물을 짓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서울 정동 지역은 근대 역사의 중심지이지만 한양도성이 지나가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발굴은 한양도성 관련 최초의 체계적인 발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밖에 1997년 석촌동 고분군 주변 아파트 부지와 고척동 계남근린공원 테니스장 부지,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신축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1990년대에도 유적의 복원과 사업 수행을 위한 구제발굴조사는 이어졌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발굴조사 건수도 늘어나기 시작했고, 조사 양상도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즉 복원과 사업 수행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유적의 역사적 가치가 드러난 순수한 학술발굴로 전환하는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보다 국가와 국민의 문화 수준과 인식이 향상되기 시작한 측면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1990년대는 구제발굴의 전성시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유적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풍납토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 대표 사례이다.
2. 발굴된 유적으로 서울의 고대 역사를 읽다
조선 궁궐을 복원하기 위한 발굴조사는 1990년대에도 이어졌다.
창경궁 발굴조사는 1980년대에 마무리되었지만 경희궁 터와 1990년에 시작한 경복궁은 199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발굴조사가 없었던 창덕궁도 1995년에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발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은 풍납토성이다.
즉 1964년 처음으로 발굴이 실시된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풍납토성이 오랜만에 재개된 계기는 이형구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과 조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식 발굴조사는 아니었지만 이미 1996년에 이형구에 의해 풍납토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7년 이형구가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백제 토기가 출토된 사실을 문화재관리국에 신고함으로써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이다.
이후 2000년 5월, 풍납토성 발굴 현장을 굴삭기로 파헤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국민들의 관심 속에 묻혀 있던 풍납토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발굴로 인해 내 집 마련을 위한 아파트 재건축 사업이 불가능해지고, 풍납동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됨으로써 이 지역 주민들의 정당한 자산 사용 권리가 불가능해지는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금도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1963년 풍납토성의 성벽만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성 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국가의 무책임한 조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 풍납토성 발굴의 의미는 발굴 결과의 학술적 가치다.
그동안 한성백제의 도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는데, 그중 1980년대 몽촌토성의 발굴 결과로 몽촌토성이 유력한 도성 후보였다.
반면 풍납토성은 여러 이유로 도성 후보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연구자들이 무관심했던 이유는 그동안의 이런 인식이 팽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재개발 현장에서 이형구에 의해 우연치 않게 확인된 백제 토기로 풍납토성의 발굴조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 결과 출토유물로도, 유적의 가치로도 한성백제의 유적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빠르고 위상이 높은 유적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 역사 2000년의 시작을 보여주는 유적이 된 것이다.
풍납토성 발굴을 1990년대 서울 발굴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 가치와 의미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굴 유적은 아차산 일대 보루들이다.
아차산 보루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백제나 신라 관련 유적으로 이해하였다.
당시까지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1994년 구리문화원의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들을 확인하면서 고구려 유적으로 이해하고 발굴을 실시한 것이다.
사실 아차산 일대 보루는 이미 1977년에 발굴을 하였다.
앞서 살펴본 구의동 유적이 그것이다.
단지 그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20년이 지난 1997년에 이르러서야 고구려 군사 관련 유적으로 이해를 한 것이다.
이처럼 아차산 일대 보루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서울 지역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하고 발굴하여 확인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에서 서울 지역만의 가치와 특징을 드러내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즉 서울 고대사는 그동안 백제사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고구려 유적의 발굴로 고대사 영역이 확장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차산 보루들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아차산 보루들과 함께 아차산에 있는 아차산성에 대한 발굴도 서울 고대사 영역의 확장이란 면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아차산성은 이미 197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제대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9년에 이르러서야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다.
발굴 결과는 뜻밖에도 백제가 아닌 신라의 산성이었다.
특히 기와에 새겨진 글씨와 문헌 등을 통해 발굴단은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추측했다.
문헌 속의 북한산성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도 아차산성은 계속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 그 성격 등 추가적으로 확인되는 내용들도 많을 것이다.
이처럼 1990년대는 고대사 부분에서 이미 알려져 있는 유적들에 대한 발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발굴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은 처음에는 사업을 위한 구제발굴로 시작했다가 점차 학술발굴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 시기보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인식이 향상되었음을 반영한 현상일 것이다.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백제 토기 발견으로 시작된 풍납토성 발굴은 재건축 사업을 위한 발굴에서 유적의 가치와 위상을 확인한 이후에는 순수한 학술발굴로 이루어졌다.
아직 재건축 사업이 진행 중인 1999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토성의 동쪽 성벽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풍납토성 성벽에 대한 최초의 조사이자 순수한 학술발굴이었다.
2000년 이후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대규모 건축 행위는 금지되고 지속적으로 학술발굴이 추진 중이다.
그만큼 풍납토성의 가치는 2000년 이후 서울의 발굴 행위와 방법까지도 변화시킬 만큼 컸다.
아차산 보루들과 아차산성도 발굴의 시작은 복원이 목적이었지만 점차 학술적 목적이 큰 발굴로 성격이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 1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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