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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9: 이집트 문명 1-왕조 이전 시기, 초기 왕조 시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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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9: 이집트 문명 1-왕조 이전 시기, 초기 왕조 시기

새샘 2022. 1. 23. 23:51

고대 이집트와 근동-이집트의 특이한 지형과 나일강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1. 초기 이집트 문명의 특징

 

지중해 세계의 또 다른 중요한 문명은 이집트 Egypt에서 등장했다.

수메르와 거의 같은 무렵이었지만 수메르인과는 달리 이집트인은 적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고투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나일강 Nile River의 정기적인 여름 홍수로 비옥한 흑토黑土인 삼각주三角洲 river delta가 해마다 새로 생기면서 나일계곡 Niel Valley을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풍요로운 농업지역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문명의 특징은 이 근본적인 생태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Ancient Egypt는 나일강의 제1폭포—고대 도시 엘레판티네 Elephantine 근처—에서 나일강을 따라 북쪽의 지중해까지 1,100킬로미터 이상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뻗어나간 좁고도 긴 땅에 자리 잡았다.

이 좁고 긴 띠 모양의 땅—폭이 좁은 곳은 수백 미터였고, 넓은 곳이라도 23킬로미터를 넘지 않았다—의 바깥은 비가 전혀 오지 않아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이었다.

나일강 연안의 비옥한 검은 땅과 그 너머의 메마른 붉은 땅 사이의 극단적 대조는 이집트인의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이집트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고 이집트 너머의 땅을 문명화된 삶의 바깥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땅, 하나의 국가, 하나의 문명으로서 이집트는 놀라우리만큼 연속성을 유지했다.

이집트 문화의 뿌리는 늦어도 서기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집트는 서기전 30년 이후 로마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독립적 문화로서 번영을 누리며 존속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 문화의 독특한 성격은 서기전 300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의 왕이자 최고 통치자인 파라오 Pharaoh—백성은 그를 신으로 여겼다에 의해 주도된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이며 관료적인 이집트 국가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쳤다.

고대에 다른 어떤 문명도 이집트처럼 그토록 긴 세월 그토록 철저하게 통치되지는 않았다.

 

역사가들은 편의상 고대 이집트를 '왕국王國 dynasty'과 '기期 period'로 구분한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자들이 그랬듯이, 현대 역사가들은 고대 이집트를 강력하면서도 번영과 통일을 누렸던 시기를 고古왕국 Old Kingdom, 중中왕국 Middle Kingdom, 신新왕국 New Kingdom으로 표현한다.

이 세 왕국 사이에는 중앙의 권위가 붕괴된 혼란의 중간기(제1중간기 First Intermediate, 제2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제3중간기 Third Intermediate)가 끼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전통적 구분법을 따르지만, 그것이 고대 이집트 국가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편향된 시각을 반영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각별히 제1중간기는 파라오 궁정이 아닌 지방사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혼란과 비참함이 훨씬 덜한 시기였다.

 

이집트 왕조와 시대 구분
왕조 이전 시기 서기전 1만 년경~3100년
초기 왕조 시기 서기전 3100년~2686년경
고왕국 서기전 2686년경~2160년
제1중간기 서기전 2160년~2055년
중왕국 서기전 2055년~1650년경
제2중간기 서기전 1650년경~1550년
신왕국 서기전 1550년~1075년

 

 

2. 왕조 이전 시기(서기전 1만 년경~서기전 3100년)

 

이집트의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왕조 이전 시기 Predynastic Period는 파라오와 그 왕조가 등장하기 이전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관련된 정보 수집을 위해 고고학을 활용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왕조 이전 시기의 많은 주거지는 오늘날 켜켜이 쌓인 침적토 아래 파묻혀 있거나 이미 오래전에 나일강 물줄기가 소멸시켜 버렸다.

더욱이 나일 계곡의 풍요로움은 신석기시대 근동 다른 지역에서 흔히 발생했던 촌락생활로의 전환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경우, 인구 증가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서기전 8천년기에 이미 정주농업생활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에서는 서기전 5천년기까지도 수렵과 채취로 점증하는 인구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인구 증가는 자연적 증가—풍부한 식량 공급의 결과였다와 다른 지역에서의 이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었다.

서기전 1만 년경 이전에는 오늘날의 사하라사막 Sahara Desert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매우 다양한 식물과 동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빙하가 물러나면서 그 지역은 서서히 사막화되었고 사람과 동물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났다.

많은 사람은 나일계곡으로 향했다.

왕조 이전 시기가 되자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에 정착했다.

따라서 이집트 문화의 놀랄 만한 통일성은 외부에서 유입된 지극히 잡다한 뿌리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특정 민족이나 인종집단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집트 최초의 영구 거주지는 서기전 4750년경에 등장했는데, 나일 삼각주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오늘날의 메림데 베니 살라마 Merimde Beni Salama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은 인구가 1만 6천 명이나 되는 번창하던 농업 공동체였다.[땅에 묻힌 잔존물에 바탕을 두고 추정한 인구 규모로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뒤 이집트 경제는 급속히 복잡성을 띠게 되었다.

서기전 3500년경 메림데 베니 살라마에서 불과 5킬로미터 떨어진 주거지인 마디 Maadi의 주민은 시나이반도, 그동, 그리고 수백 킬로미터 남쪽의 나일 상류 지역과 광범위한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석기를 금속기로 교체할 수 있게 만든 구리는 특별히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그 밖에도 많은 농업 중심지가 나일 삼각주 및 인근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통일성을 보이고 있었다.

나중에 이 지역은 하下이집트(나일강 하류)로 알려지게 되었다.

삼각주 바깥 지역에서도 이와 견줄 정도의 발전이 있었다.

왕조 이전 시기가 끝날 무렵 이집트의 물질문화와 매장 풍습은 삼각주 남단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 제1폭포에 이르는 상上이집트(나일강 상류) 지역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통일성을 유지했다.

 

소읍의 수는 하이집트가 더 많았지만 이집트 최초의 진정한 도시는 상이집트에서 발달했다.

서기전 3200년에 이르러 네켄 Nekhen(히에라콘폴리스 Hierakonpolis), 나카다 Naqada, 아비도스 Abydos, 티스 This(티니스 Thinis) 같은 주요 공동체는 높은 수준의 직업적·사회적 전문화를 이룩했다.

그들은 정교한 요새로 둘러쌌고 지방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세련된 사원과 신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사원과 신전을 건축했다는 사실은 소읍이 도시로 성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 Uruk가 그랬듯이, 이 사원과 신전이 지역의 종교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여행자가 모여들었고 산업의 발달 또한 자극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상이집트에서는 여행이 비교적 편리했다.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살았고, 거대한 강은 국가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간선도로 역할을 했다.

삼각주 남쪽의 띠 모양 지역이 어마어마하게 길이가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정치적 통일성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나일강 덕분이었다.

 

나일강은 이집트인을 먹여 살리고 통합시켜주었다.

강은 사람·상품·사상을 이어주는 도관導管이었다.

중앙집권적인 지배자는 강의 상류와 하류를 효율적으로 오르내리면서 권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왕조 이전 시기가 끝날 무렵 상이집트 도시들은 티스의 주도 아래 동맹 형태로 결속되었으며, 이 동맹이 가하는 압박으로 말미암아 하이집트 소읍들도 그들 나름의 느슨한 정치조직체를 만들었다.

서기전 3100년에 이르러 두 지역 간의 경쟁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는 두 개의 초기 왕국이 등장했다.

 

 

3. 이집트의 통일: 초기 왕조 시기(서기전 3100년~서기전 2686년경)

 

두 개의 이집트 왕국을 통일하려는 의지를 가진 강력한 지배자의 등장과 더불어 이집트 역사는 초기 왕조 시기 Early Dynastic Period로 접어든다.

파라오 왕조에 숫자를 매기는 체계는 서기전 3세기의 이집트 사제 마네토 Manetho가 창안(또는 공식 문서로 기술)했다.

마네토의 작업은 현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의 정밀한 조사 결과 대체로 사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최근 연구 결과는 기전 6000년 무렵부터 3100년 무렵까지 제0왕조가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0왕조는 선先왕조 Predynastic period(서기전 6000년경~서기전 3150년경)와 원原왕조 Protodynastic period(서기전 3150년경~서기전 3100년경)로 구분하기도 한다.

최초의 이집트 통일에 기여한 초기 왕들로 이루어진 이 왕조를 마네토가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서만 알려진 이 지배자들은 어렴풋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중 하나인, 전갈왕 King Scorpion으로 알려진 상이집트의 유력자는 '지팡이 머리 부분'에 새겨진 그림에서 이집트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또 다른 인물인 나르메르 왕 King Narmer은 상·하 이집트를 모두 지배한 인물로 전설적인 왕 메네스 Menes—후대의 이집트인들은 그를 상·하 이집트를 지배한 왕으로 간주했다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이 왕들은 상이집트의 아비도스 Abydos 출신인 것으로 보이며, 사망 후 실제로 그곳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정수도는 멤피스 Memphis였다.

멤피스는 하이집트의 으뜸가는 도시로서 시나이반도 Sinai Peninsula 및 근동과의 교역 중심지였다.

 

초기 왕조 시기에 상·하 이집트의 정치적 통일에 뒤이어 파라오 지배의 기본 골격이 자리 잡았는데, 그 과정은 이후 3천 년간 지속되었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파라오 Pharaoh는 신과 동일시되었다.

제1왕조 First Dynasty(서기전 3100년~서기전 2890년경)와 제2왕조 Second Dynast(서기전 2890년경~서기전 2686년경)에 이르러 파라오는 지상에 현현顯現한[명백하게 모습으로 나타난] 매의 신, 즉 호루스 Horus[천공신天空神이자 태양신으로 머리는 매이면서 몸은 사람]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이집트 지배자들은, 단지 신의 은혜를 입은 '죽을 운명의 인간'에 불과했던 수메르의 루갈 Lugal과는 달리, 파라오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르메르 팔레트 앞뒷면(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B%A5%B4%EB%A9%94%EB%A5%B4_%ED%8C%94%EB%A0%88%ED%8A%B8)

초기 파라오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신성성에 대한 주장을 관철시켰는지는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이집트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일은 분명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지방의 시민적·종교적 충성심은 아직 강력했으며, 몇 백 년 동안 하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상이집트 주민과 별개의 존재로 간주했다.

하지만 나르메르 팔레트 Narmer Palette[상이집트 왕 나르메르가 하이집트를 정복해 최초의 이집트 통일국가를 이룩한 역사적 사건을 새긴 서기전 3000년경 만든 높이 64센티미터의 점판암 돋을새김(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된 이집트의 정체성을 창출하려는 노력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이집트 왕권의 신성화 작업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것은 놀라우리만큼 성공적이었다.

제2왕조가 끝날 무렵 파라오는 단지 이집트의 지배자에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파라오는 곧 이집트였다.

파라오는 이집트 땅과 이집트인의 화신이었으며, 이집트 땅과 이집트인을 신에게 연결시켜주는 존재였다.

 

 

4. 언어와 문자

 

여러 이집트 문화 가운데 후대 사람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당황케 하는 것은 이집트이 상형象形문자[신성神聖문자 hieroglyph: 사물의 모양을 본뜬 그림으로 이루어진 문자] 체계다.
그리스어로 히에로글리프 hieroglyph—'신의 말씀'을 뜻하는 이집트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단어—라고 부르는 이 기이하고 정교한 상징은 전혀 판독이 불가능했고, 19세기에 프랑스 학자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1790~1832)이 로제타 돌(로제타석, 로제타 스톤 Rosetta Stone[서기전 196년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멤피스에 세워진 화강섬록암 석비]을 통해 해독할 때까지 신비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로제타 돌에는 같은 내용의 글이 세 가지 언어, 즉 그리스어, 민중民衆문자 Demotic[이집트 문자의 후기 변형],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로 새겨진 내용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도 모두 해독할 수 있었다.

샹폴리옹의 업적을 출발점으로 삼아 여러 세대에 걸쳐 학자들이 고대 이집트 사회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끌어 올려주었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발전은 서기전 3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형문자의 그림문자적 성격은 초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자와 이집트 문자는 서로 매우 달라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에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이집트의 정치와 행정에서 중요한 도구였다.

그러나 수메르의 쐐기문자와는 달리 이집트 상형문자는 표음문자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집트인은 신관神문자 hieratic라고 하는, 상형문자를 대신할 단순하고 빠른 초서체를 발전시켜 이것을 행정과 상업의 일상 업무에 사용했다.

또한 그들은 서기들이 빠르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관문자의 속기체도 개발했다.

 

초기 신관문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글씨를 쓰는 매체인 파피루스 papyrus가 내구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가에 자라는 파피루스란 이름의 갈대를 두드리고 건조시키는 가공 과정을 거쳐 만든 파피루스는 수메르인이 사용한 점토판보다 가볍고 기록하기 쉬었으며 운반하기도 편리했다.

두루미리로 꿰매어 붙이면 파피루스는 작은 공간에 많은 양의 정보를 기록해 보존할 수 있었다.

다양한 용도를 지닌 이 필기도구의 생산은 고대 전 기간에 걸쳐 이집트의 중요한 산업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파피루스는 이집트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이집트이 기후 조건에서 쉽게 부스러지거나 부식되었다.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보존성이 형편없이 떨어졌고, 당연히 고고학자들은 이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 결과 방대한 분량의 파피루스 문서가 사라져버림으로써 고왕국 시기 이집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고대 이집트인의 언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초기 이집트인은 근동의 셈어와 다양한 아프리카 어군에 다 같이 연관되어 있었다.

두 언어 모두 '아프리카-아시아 어족'으로 알려진 상위 분류에 속해 있다.

일부 역사언어학자의 가설에 따르면, 초기 이집트어는 뿌리 언어—거기에서 아프리카-아시아 어족이 전개되었다가 살아남은 경우이다.

선사시대에 나일계곡을 드나든 사람들이 이동경로를 고려할 때 이 가설은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기원이 무엇이든 이집트어는 장구한 역사를 거쳤다.

고왕국 언어는 살아남아 수천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 고전 고대에 이르러 콥트어 Coptic[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후손인 후기 이집트어]가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콥트 그리스도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사용되고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 2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