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0: 구리 아차산 시루봉 보루, 암사동 선사초등학교 신축부지 유적,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립 예정부지 유적 본문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10: 구리 아차산 시루봉 보루, 암사동 선사초등학교 신축부지 유적,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립 예정부지 유적
새샘 2022. 4. 15. 13:09
구리 아차산 시루봉 보루
1997년과 1998년에 실시한 아차산 제4보루에 이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2차에 걸쳐 구리 시루봉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시루봉은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는 아찬산의 주 능선에서 북동쪽 한강으로 흘러내린 능선에 위치한 봉우리다.
봉우리가 시루(증甑: 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데 쓰는 자배기처럼 생긴 넓고 둥근 질그릇)처럼 넓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남으로는 한강, 동으로는 왕숙천을 바라보고 있어 강남 지역과 구리 토평동 일대의 평지가 한눈에 들어오며, 한강 북안과 왕숙천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유적이 위치한 시루봉은 해발 206미터의 작은 봉우리로 유적의 전체 면적은 약 3,675제곱미터이며, 남북 방향으로 길게 활 모양으로 휘어진 형태다.
조사 이전 유적은 군부대가 조성한 참호 때문에 이미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고, 만약 그대로 둔다면 유적 상황이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구리문화원의 의뢰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시루봉 보루는 외곽 성벽과 내부 주거시설로 구성되었다.
성벽은 화강암을 대충 다듬어 쌓았는데, 다른 지점의 성벽들을 엉성한데 비해 한강을 바라보는 지점에 축조된 치雉[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막기 위해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만은 매우 크고 튼튼하게 쌓아 올렸다.
성벽 높이는 3~4미터, 둘레는 205미터 정도이고, 성벽의 짧은 축 길이는 25미터, 긴 축 길이는 78미터에 달한다.
치는 2000년에 실시된 2차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치는 참호 설치로 크게 파손되었지만 아래 부분은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치의 규모는 발굴 당시 완전히 노출된 서쪽 벽과 남쪽 벽의 길이는 약 8.6미터, 동쪽 벽의 길이도 같은 8.6미터로 추정되어 평면 형태는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성벽 안쪽 시설물은 크게 주거시설과 저수시설로 구분된다.
유적 한가운데 있는 저수시설의 규모는 남북 길이 9.5미터, 동서 길이 6.3미터, 깊이는 3.2미터 정도이며, 동서 폭은 남쪽보다 북쪽이 약간 더 넓다.
주거시설은 보루의 성벽 윤곽과 대체로 일치되는 방향으로 축조되었으며, 가운데 저수시설을 둘러싼 대형 건물 터와 대형 건물 터 안팎으로 설치된 소형 건물 터로 구성된다.
소형 건물 터는 모두 9기로 대형 건물 터 안쪽에 2기, 바깥쪽에 7기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크게 토기와 철기로 나눌 수 있다.
토기는 대부분 고구려 토기로, 아차산 제4보루와 조금의 차이만 있을 뿐 전반적으로 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발굴단은 토기 제작연대는 6세기로 추정하면서도 좀더 보완이 필요하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구려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서울의 발굴 역사는 물론 서울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서울의 고대사는 주로 백제와 관련하여 이해하거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서울 고대사의 가장 큰 특징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공존하는 역사'이다.
그만큼 서울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특히 북한 지역에만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고구려의 유적들이 서울에서 발굴, 조사되었다는 것은 서울 시민들에게도 매우 흥미롭게 받아졌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차산 일대 고구려 유적들의 발굴조사는 서울의 고대사 영역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암사동 선사초등학교 신축부지 유적
선사초교는 암사동 유적에 인접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연표에 따르면 발굴기간은 1991년 9월 1일부터 10월 29일까지이고 발굴기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발굴보고서를 구하지 못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유적의 시대가 신석기라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관련 유구나 유물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자료들에서도 전혀 언급이 없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 알 수가 없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립 예정부지 유적
이 발굴은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물을 짓기 위한 구제발굴이었다.
건립 예정 지역은 중구 정동 34-16번지 일대로서 1984년 배재고등학교 자리였다.
정동 지역은 근대 역사의 중심지였기도 하지만 한양도성의 성벽이 지나가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럼 발굴이 이루어지게 된 경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서울시는 대사관 신축을 위한 건축 허가 과정에서 "건축공사 착공 전 서울성곽 유구 부분에 대해 문화재 발굴단체가 시굴하고 그 결과를 제출"하도록 조치하였다.
이것은 비록 정동 지역이 많이 파괴되기 했지만 한양도성의 흔적이라도 확인하고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을 것이다.
이에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우리 외교통상부에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줄 것을 요청했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현지조사 후 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9년 10월 7일부터 10월 26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지역은 1984년 2월 28일까지 배재고 운동장과 아펜젤러 사저 등으로 쓰였고, 발굴 당시에는 주차장이었다.
동쪽에는 정동제일교회, 남쪽으론 체이스 플라자 건물, 그리고 서쪽과 북쪽에는 이화여고와 접해 있다.
성벽으로 추정된 지역은 건축 부지 서쪽 끝에 해당하는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바로 옆 담장 지역이다.
이 지역은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이 있으며, 그 담을 기준으로 높은 지형과 담을 따라 석축이 드러나 있었다.
발굴단은 발굴을 통해 한양도성 성벽 일부의 정확한 위치와 축조기법을 확인했다.
조사지역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城가퀴(여장女牆 또는 女墻: 성을 방어하려고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등 성곽이 보존되어 있던 지역이었지만, 일제의 고의 훼손,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훼손되거나 없어져 버렸다.
성벽 상부와 바깥 부분은 모두 없어졌으며, 발굴 당시 성벽의 하부 기초 부분만 남아 있었다.
성벽 축조 방법을 살펴보면, 지반 위에 일정 높이를 흙을 다지면서 쌓아 올린 토축土築을 만들고, 그 위로 석심石心[흙벽 가운데 넣은 돌] 1렬을 놓고 석심 내외부 모두 일정 높이까지 흙으로 다져 올려 쌓았음을 발굴단은 확인했다.
당시 서울성곽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한양도성漢陽都城, Fortress Wall of Seoul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조선시대 도성의 성곽城郭/城廓[내성과 외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은 1961년 창의문 왼쪽의 성곽 보수를 시작으로 1975년부터 종합 보수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수공사가 아닌 발굴조사는 1999년까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번 시굴조사도 대사관 건물을 짓기 위한 구제발굴이었지만, 처음으로 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한양도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4. 1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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