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7: 아시리아 제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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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7: 아시리아 제국

새샘 2022. 4. 10. 17:44

서기전 700년경 아시리아 제국 강역.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기반을 둔 아시리아인은 시리아 내륙 지역(위 지도의 아라비아)은 내버려둔 채 강 계곡과 해안에 관심을 집중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철기시대 고대 근동 제국의 발전>

페니키아인이 이집트로부터의 독립 서기전 1200년
팔레스타인인의 군사적 지배 서기전 1100~1000년
이스라엘 왕국의 통합 서기전 1000~973년
아시리아 세력의 부활 서기전 883년
페르시아의 바빌론 정복 및 병합 서기전 539년

 

아시리아인 Assyrian은 셈어 Semitic를 사용한 민족으로 원주지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였다.

1장에서 보았듯이 서기전 1900년에 이르러 아시리아인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오늘날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 Euphrates River과 티그리스강 Tigris River 유역]와 아나톨리아 Anatolia [오늘날 터키 반도]사이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 고원 전역에 도시 사회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공격적인 이웃 민족들—처음에는 함무라비 Hammurabi의 구바빌로니아 제국, 다음에는 이집트 Egypt, 미탄니인 Mitanni, 히타이트인 Hittite, 그리고 최종적으로 바다 민족 Sea Peoples—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아만 했다.

 

수백 년에 걸친 생존 투쟁은 아시리아인의 세계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서기전 9세기부터 아시리아인은 침략자로 변신했다.

그들은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잔인하게 주변 민족을 희생의 제물로 삼고서 세력을 확장했다.

두려움의 대상이긴 했지만, 아시리아인의 침략은 주변 민족의 종교적·정치적 전통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은 근동 문화를 에게해 Aegean Sea 연안에 확대시켰고 새로운 형태의 제국 조직을 만들었다.

또한 광대한 세계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철기시대 아시리아의 발전>

아시리아 영향력 재확립 시작 서기전 1362~883년
아슈르나시르팔 2세 아시리아 신왕조 수립 서기전 883~859년
사르곤 왕조 탄생 서기전 722년
아시리아 멸망 서기전 612~605년

 

 

1. 아시리아 중왕조 시대(서기전 1362~859)


서기전 14세기 미탄니 왕국 Mitannai Empire이 쇠퇴하면서 아시라아인은 거대 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얻었다.

히타이트인의 압력이 서쪽에서부터 미탄니를 약화시키자 지방의 아시리아 유력자들이 동쪽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마침내 유력자들 중 한 사람인 아슈르 Ashur의 총독이 도시 수호신의 이름을 따 스스로 아시리아의 왕임을 선포했으니, 그가 바로 아시리아 중왕조 Middle Assyrian Empire의 첫 번째 왕 아슈르-우발리트 1세 Ashur-uballit I(재위 서기전 1362~1327)이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세력을 확대했으며, 바빌로니아의 카시테 왕조 Kassite Dynasty—아시리아인은 카시테 왕들을 찬탈자로 간주했다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시리안은 그 지역의 미묘한 세력균형을 흔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기전 1244년 투굴티-니누르타 1세 Tukulti-Ninurta I가 왕위를 계승함면서 아시리아는 더 이상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투굴티-니누르타 1세는 강력한 정복자로서 히브리 성서에는 님루드 Nimrud란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그리스 전승傳承[문화, 풍속, 제도 따위를 이어받아 계승함]에는 니노스 Ninos로 기억되었다.

그는 바빌론으로 쳐들어가 카시테 왕과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마르두크) Marduk를 볼모로 잡고 스스로를 바빌론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정복 전쟁을 이어나갔다.

여기에다 바빌로니아 신들에 대한 신성모독까지 더해지자 신민은 그들 외면했고 서기전 1208년경 살해당했다.

 

주변 민족이 아시리아 영토를 가로지르는 주요 교역로에서 서로 보복을 일삼고 통상로 장악을 도모하자 아시리아는 한 세기 동안 쇠토의 길을 걸으며 여러 차례 거의 멸망 직전의 상황에 내몰렸다.

그러나 죽기 살기의 필사적인 전투를 거듭해서 치르는 동안 아시리아인들은 고도의 군국주의 민족으로 단련되었다.

이런 생존 투쟁은 아시리아 중왕조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무렵 잔인하지만 총명했던 지배자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재위 서기전 883~859)가 아시리아 세력을 부흥시키고 아시리아 신왕조 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무자비한 지배권 아래 아시리아인은 해마다 공격적인 군사 원정을 수행했다.

아시리아인의 표적이 된 민족은 공납을 바치거나 아시리아 군대의 전면적 침공을 받아야만 했다.

아시리아 군대는 아슈르나시르팔 통치 아래서 야만성과 사악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탁월한 근동 학자 옴세테드 Olmsstead는 아슈르나시르팔의 정책을 '계산된 공포 Calculated frightfulness'라고 묘사했는데, 그것은 군사적 공포 전략 및 약탈에 대한 보호금 징수를 일컫는 절묘한 호칭이다.

 

 

2. 아시리아 신왕조 시대(서기전 859~627)

 

미국 하버드대학교 하버드 셈족 박물관 Harvard Semitic Museum의 야슈르나시르팔 2세 상(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Statue_of_Ashurnasirpal_II)

 

아시리아 신왕조 제국 Neo-Assyrian Empire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그의 아들 샬마네세르 3세 Shalmaneser III(재위 서기전 853~827)의 정복활동은 아시리아 팽창정책에 대한 강력한 저항 운동을 불러일어켰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샬마네세르 3세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시리아 Syria-팔레스타인 Palesteine 지역의 다른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궁극적으로 이 동맹 작전은 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동맹군의 저항으로 샬마네세르 3세는 서북쪽의 아르메니아인 Armenian과 동북쪽의 메디아인 Mede을 상대로 거둔 작은 성공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아시리아 내부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란으로 그의 치세는 끝나고 말았다.

 

그 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Tiglath-Pileser III라는 이름의 찬탈자가 서기전 744년 아시리아 왕좌를 차지하면서 서부 지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치세 초기에 그는 수십 년간 세금을 바치지 않았던 서부의 왕국들에게 공납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한 왕국들은 즉각 아시리아의 맹공격에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서기전 727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죽자 정복당한 여러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찬탈 군주의 죽음과 더불어 아시리아 왕조의 불안정성이 재연되리라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아들 샬메네세르 5세는 강력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그가 전투 중 사망하자 휘하 군사령관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르곤 2세 Sargon II(재위 서기전 722~702)라는 이름을 취했다.

 

이라크 바그다드 이라크 박물관의 사르곤 2세 상(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Sargon_II)

 

아시리아인 특유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지닌 사르곤 2세는 아카드 제국 Akkadian Empire(서기전 2350~2160)의 사르곤을 '첫 번째' 사르곤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2세라고 칭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거의 1,500년 전에 존재했던 근동 제국 아카드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자임을 주장한 것이다.

사르곤 2세가 세운 왕조를 사르곤 왕조 Sargonid Dynasty(서기전 722~609)라고 하며, 이 왕조가 지배한 한 세기는 아시리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시대였다.

 

사르곤 왕조는 아시리아 제국의 국경선을 서부 이란에서 지중해 해안까지 확장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은 이집트의 일부를 정복하기도 했다.

사르곤은 북왕국 이스라엘 northern Kingdom of Israel을 멸망시키고 그 왕좌에 올랐으며, 남왕국 유다 southern Kingdom of Judah를 위협해 충성스럽고 얌전한 신민으로 머물게 했다.

이란에 있던 고대 엘람 왕국 Elamite Dynasty도 사르곤 왕조 시대에 함락되었다.

서기전 7세기에 이르러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력이 되었다.

 

 

○아시리아 정부와 행정

 

아시리아 신왕조 제국은 적국과 자국 신민 모두에게 군사적인 공포와 협박을 서슴지 않는 무장 국가였다.

아시리아 제국의 꼭대에는 왕이 있었고, 왕은 세습 군주이자 아슈르 Ashur 신의 지상 대변자였다.

왕은 군사 지도자인 동시에 제국의 으뜸가는 종교 상징이었다.

군대가 전장에 나가 있지 않을 때 왕은 위대한 신 아슈르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교한 희생과 의식을 올리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점占 divination과 신탁神託 oracle은 아시리아 종교의 핵심적 특징이었다.

아시리아 왕은 대제사장으로서 자연의 징조를 통해 아슈르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했다.

 

왕의 주변에는 총독, 고위 사제, 군사령관 등이 망라된 광범한 관료진이 포진했는데, 그들의 직책은 아시리아의 맥락에서 결코 상호 배척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 행정관은 아시리아 사회의 최고 계급을 형성하면서 왕을 대신해 지방 권력을 행사했다.

군사력을 통해 지배하는 민족이었지만 아시리아인은 교통 및 통신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범한 도로망을 구축했고, 그것은 수백 년 동안 근동을 가로지르는 교통·통신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아시리아인은 사신과 첩자를 활용해 신민과 지방 총독의 동태를 왕궁에 보고하도록 했다.

 

지방 총독은 공물 징수, 군대 모병, 아시리아의 지배권 유지, 왕령 집행 등을 맡았다.

전통에 관심 많은 민족답게 아시리아인은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에 기초해 법률을 만들었지만, 몇몇 처벌 조항은 한층 가혹했다.

아시리아인은 종족 유지를 방해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가장 엄격하게 처벌했는데, 그중 동성애와 낙태에 대한 처벌은 각별히 야만적이고 소름끼쳤다.

또한 아시리아 법률은 엄격한 가부장제를 지지했다.

오직 남편만이 이혼할 권리를 가졌고, 아내에게 구타, 신체 절단, 심지어 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벌을 가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었다.

 

 

○아시리아의 군사 및 종교 기풍

 

아시리아인의 종교·정치·군사 기풍은 아시리아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무렵에 형성되었다.

일단 아시라인이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런 기풍은 아시리아 제국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의 기반이 되었다.

아시리아의 군사 및 종교 기풍의 두 가지 근본적인 성격은 성전聖戰과 공포를 통한 공물 착취였다.

아시리아인은 그들의 신인 아슈르가 군사 정복을 통한 아슈르 종교의 확장을 요구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군대는 왕보다는 신에게 속해 있었다.

그리고 아슈르의 최고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 아슈르의 백성인 아시리아인의 적이었다.

그러므로 패배한 도시의 신들에게 가해진 굴욕적인 제의祭儀는 아시리아 정복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정복당한 신들은 아시리아 수도로 이송되어 아슈르 신전에 볼모로 잡혔다.

패배한 도시에는 아슈르의 형상(보통 태양 원반을 배경으로 궁수의 머리와 어깨가 그려졌다)이 설치되었고, 피정복민족은 아슈를 숭배해야만 했다.

아슈르 숭배 때문에 피정복민이 과거에 섬기던 신들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인의 견지에서 볼 때 아슈르가 제국의 모든 민족에게 최고의 신이어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신들은 본래의 성격을 잃고 점점 더 아슈르의 축소판 신들로 변했다.

아슈르는 점차 저 멀리 떨어진 초월적 존재, 즉 아시리아 제국의 모든 사람이 숭배해야만 하는 국가 종교의 신이 되었다.

 

아시리아인에게 공물이란 처음에는 약탈을 의미했다.

그러나 적을 일거에 패배시키고 공물 부과를 제도화하는 대신, 아시리아인은 패배한 적들에게 해마다 군사적 공격을 거듭하면서 무력으로 공물을 강탈해갔다.

이 전략은 피정복민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아시리아 군대를 상시 전투 대기 상태로 유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움도 뒤따랐다.

거듭되는 정복은 피정복민의 충성심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피정복민은 반란을 일으켜도 더 잃을 것이 없다는, 될 때로 되라는 식의 절망 상태에 내몰렸다.

해마다 반복되는 아시리아의 공격은 아시리아 군대를 강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피정복민의 군사력 또한 강화시켰다.

서기전 9세기 말에 이르면 이 지역의 많은 민족은 아시리아의 수법에 익숙해졌다.

아시리아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 이르러서야 해마다 반복되는 침략에 의한 공물 강탈정책을 포기하고 정통적인 공납 체계를 갖추었다.

 

아시리아의 전쟁 방식은 야만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고대 세계의 전쟁은 언제나 잔인했다.

포로의 신체 절단, 목 베기, 강간, 인구의 대량 강제 이주, 노예화 등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시리아인은 그런 야만성을 고대의 다른 어떤 제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즐기고 찬양했다.

그들이 남긴 예술품과 비문에는 적의 학살과 고문을 한껏 즐기던 그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미소를 머금은 아시리아 궁수들은 도망치는 적의 등을 향해 활을 쐈고, 무자비한 병사들은 함학된 유다의 성읍 주민들을 성벽 꼭대기에서 집어던져 땅에 박힌 말뚝에 찔려죽도록 했다.

 

아시리아 군대는 서기전 9세기에 이르러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했다.

많은 고대사회들이 그러했듯이 아시리아는 처음에는 농민으로 구성된 계절제 병력을 활용했다.

그러나 아슈르나시르팔 2세(서기전 859년 사망) 치세부터 아시리아는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했다.

대규모 철 제련법을 익힌 아시리아인은 서기전 9세기에 이르면 전사들을 고급 철제 무기로 무장시켜 청동기에 의존하던 적대 세력을 압도했다.

 

아시리아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기민한 전략 전술을 구사했는데, 그것은 상당 부분 군대 조직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시리아 군대의 핵심은 중무장 장갑 돌격대였는데, 그들은 다양한 공격 무기와 긴 방패로 무장했다.

아시리아 돌격대는 전장에서 적의 보병을 격파하고 적국의 도시 주민을 제압하는 주력 부대였다.

적의 보병을 괴롭히고 그들의 진형을 깨부수기 위해 아시리아인은 투석기와 창으로 전초전을 개시했다.

아시리아인은 궁수와 전차를 결합시켰는데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두 바퀴 전차는 궁수 한두 명과 방패 든 병사 두 명을 태우고 전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전차는 대단히 기동성 높은 사대射臺가 되었고 훈련된 궁수가 그 위에서 적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아시리아인은 전사 개개인이 갑옷으로 무장한 말에 올라타고 활을 쏘거나 무거운 창을 휘두르는, 진정한 의미의 기병부대를 발전시켰다.

 

어떤 적도 개활지에서 아시리아의 복합 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요새화된 성 안에 들어앉아서 방어에만 힘쓸 뿐이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전투 공병대를 투입해 성벽을 무력화시켰다.

그들은 투석기, 포위기계, 공성 망치, 공성 탑 등을 건조했다.

도시 성벽은 아시리아의 군사 공격 앞에서 결코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도시가 함락된 뒤에는 지극히 악랄한 잔학 행위가 뒤따랐다.

그들은 통상적인 신체 절단에 더해 포로들을 산 채로 태워죽이거나 가죽을 벗기기도 했다.

 

 

3. 아시리아의 종말과 그 유산

 

사르곤 2세의 후계자들은 아시리아 특유의 군사정책을 지속하면서 문화 부문에도 큰 힘을 쏟았다.

사르곤의 계승자 센나케리브 Sennacherib(재위 서기전 704~681)는 고대 아시리아 도시 니네베 Nineveh를 재건하고 둘레에 15킬로미터나 되는 이중 성벽을 쌓아 요새화했다.

그는 그곳에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고 대리석, 상아, 외국산 목재 등으로 대규모 단壇을 세웠으며, 5킬로미터 밖에서 맑은 물을 끌어오는 수로 등 어마어마한 관개체계 건설을 명했다.

그의 아들 에사르하돈 Esarhaddon(재위 서기전 681~669)은 정복된 도시 바빌론을 재건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후견인으로 유명했다.

 

아슈르바니팔 상(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A%88%EB%A5%B4%EB%B0%94%EB%8B%88%ED%8C%94)

 

에사르하돈의 아들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재위 서기전 669~627)은 아시리아 지배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제국 전역에 막강한 군사력을 떨쳤고 한동안 이집트 삼각주 지역 전부를 지배했다

이집트에서 실행된 아시리아의 모헙이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난 뒤 그는 국내 개혁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전통적 수단—군사적 공포와 종교적 제국주의—이 아닌 방식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선왕과 마찬가지로 아슈르바니팔은 계몽된 아시리아 군주였다.

그는 아시리아를 신민과 주변국들을 대상으로 한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함몰된 무장 국가가 아닌, 지속 가능한 제국으로 변화시키기를 희망했다.

 

고대 근동 연구자들은 아슈르바니팔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른 아시리아 왕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 전통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 지역에 대한 아시리아 지배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역사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슈르바니팔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아시리아의 위대한 수도 니네베에 대형 도서관을 건립하도록 명했는데, 이 도서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위대학 문학작품이 아시리아 쐐기문자로 필사돼 비치되었다.

이 도서관은 왕의 의사소통과 공식 활동을 위한 문서보관소의 역할도 했다.

이 값진 역사적 문헌들이 19세기까지 살아남아 재발견되고 보존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현존하는 ≪길가메시 서사시≫ 판본들은 모두 니네베에서 발견된 아시리아 판에 의거한 것이다.

 

서기전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했을 때 아시리아 제국 세력은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국경선은 안정되었고 이웃 나라들과는 평화를 유지했다.

왕들은 수도를 장엄한 예술품과 공중정원으로 꾸몄다.

아시리아의 종말은 그 돌발성 때문에 더욱 극적이었다.

막강한 아슈르바니팔 치세가 끝난 지 15년도 못 되어 니네베는 폐허로 변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아시리아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이 건설될 때 그랬던 것처럼, 신속하고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라져버렸다.

 

에사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의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인에 대한 증오심은 광범하게 남아 있었다.

아시리아가 저지른 수백 년간의 만행은 결코 잊히지 않았다.

야슈르바니팔이 죽은 후 인도-유럽어계 이란의 메디아인 Mede과 한때 바빌로니아 남부를 지배했던 셈어계의 칼데아인 Chaldean 사이의 제휴로 동맹군이 성립되었다.

서기전 626년 동맹군은 남부 바빌로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서기전 612년 동맹군은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키고 불태웠다.

서기전 605년 칼데아인(신바빌로니아인 Neo-Babylonian으로도 알려졌다)은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에 남아 있던 아시리아의 마지막 남은 세력을 파멸시켰다.

메디아인은 이란고원으로 철수해 그들의 종주권을 확대했다.

칼데아인은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에서 압도적인 제국 세력으로서 아시리아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칼데아인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아시리아인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정복당한 적을 고국에서 대량 추방하는 등 악명 높던 아시리아인과 다를 바 없는 잔학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피정복 신민들의 증오심을 촉발시켰다.

이런 정책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서기전 587~586년 무자비한 칼데아 왕(신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의 예수살렘 함락이다.

그는 성전을 파괴하고 수만 명의 히브리인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추방 사건은 유대 역사에서 바빌론 포수捕囚 Babylonian Captivity로 알려져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4.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