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8: 페르시아 제국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8: 페르시아 제국
새샘 2022. 4. 19. 13:59
<철기시대 고대 근동 제국의 발전>
페니키아인이 이집트로부터의 독립 | 서기전 1200년 |
팔레스타인인의 군사적 지배 | 서기전 1100~1000년 |
이스라엘 왕국의 통합 | 서기전 1000~973년 |
아시리아 세력의 부활 | 서기전 883년 |
페르시아의 바빌론 정복 및 병합 | 서기전 539년 |
약탈과 공포 위에 세워진 칼데아 왕조 Chaldean Dynasty(신바빌로니아 왕조 Neo-Babylonian Dynasty)(서기전 612~539)는 매우 단명했다.
칼데아 Chaldea는 아시리아 제국 Assyrian Empire(서기전 883~612)처럼 막강한 군대도 갖지 못했고, 아시리아인 Chaldean 같은 군사적·종교적 열정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아시리아 제국이 몰락하면서 생긴 권력 공백 상황에서 칼데아인은 어떤 세력의 도전도 받지 않았다.
근동의 다른 거대 세력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칼데아의 지배권에 도전할 수 없었다.
인도-유럽어계의 리디아인 Lydian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부유한 왕국을 건설했지만 그들의 관심은 에게해와 그리스 방면에 있었다.
한편 메디아인 Mede은 이란고원의 다양하고 긴밀한 여러 민족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도모하며 사실상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 Euphrates River과 티그리스강 Tigris River 유역] 및 레반트 Levant[오늘날 이스라엘·레바논·시리아 등이 자리 잡은 동부 지중해 해안 지역]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과거 엘람 왕조 Elamite Dynasty의 지배자였던 페르시아인 Persian은 이 무렵 메디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차 칼데아인을 타도하고 고대 근동을 재통일하게 될 세력은 바로 페르시아 Persia였다.
1.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
페르시안만 동부 해안에 거주했고 인도-유럽어계의 언어를 사용했으며 메디아인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서기전 6세기 중반 이전의 페르시아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페르시아인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가 키루스 대왕 Cyrus the Great(키루스 2세 Cyrus II)(재위 서기전 559~530)라는 비범한 군주와 더불어 갑자기 역사에 등장했다.
서기전 559년 페르시아의 한 부족을 지배했던 키루스는 오래지 않아 페르시아인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서기전 549년경 그는 메디아인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페르시아만에서 소아시아 Asia Minor(지금의 터키반도인 아나톨리아 Anatolia) 할리스강 Halys River에 이르는 영토의 지배권을 주장했다.
그 결과 키루스는 리디아 왕국 Lydian Kingdom의 이웃나라가 되었다.
리디아인은 금과 은의 생산자로서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에게해 사이 육상 교역의 중개인으로서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리디아인은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부유한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했고 고대 근동에서 최초로 상품과 용역의 교환수단으로 귀금속 주화를 사용했다.
키루스가 리디아와 국경을 마주했을 당시의 리디아 왕은 크로이소스 Kroisos(영어 Croesus)였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그리스인의 문화를 지극히 찬양했고, 얼마나 부자였던지 "크로이소스처럼 부유하다 Rich as Croesus" 또는 "크로이소스보다 부자다 Richer than Croesus"란 표현들이 지금도 영어권에 남아 있을 정도이다.
새로운 이웃을 불신한 크로이소스는 리디아 왕국을 지키기 위해 서기전 546년 페르시아인에 대한 예방 전쟁에 나섰다.
헤로도토스 Herodotus(서기전 484?~425?)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즉각 공격해야 할지 여부를 그리스의 델피(델포이) Delphi에 신탁[고대 그리스 도시 델포이에 있던 아폴론 성소에서 아폴론 Apollon 신이 내리던 예언]을 요청했다.
신탁은 만일 그가 할리스강을 건너면 큰 나라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가 멸망시킨 것은 자신의 나라였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리디아를 페르시아에 병합했다.
키루스는 서기전 539년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다.
어찌나 전격적인 침공이었던 지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 바빌론 Babylon을 장악했다.
일단 그가 바빌론에 머물자 칼데아 왕조 전부가 그의 것이 되었다.
키루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가 시행했던 바빌론 포수 Babylonian Captivity 이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히브리인들을 이스라엘에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바빌론에 반독립적 속국을 세웠다.
키루스는 다른 피정복 민족에게도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 특히 종교적 자율을 허용함으로써 아시리아와 칼데아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환영했다.
키루스는 서기전 530년 아랄해 Aral Sea 근방에 원정 갔다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죽었다.
그는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거대한 제국을 남겼기 때문에 세계에서 최초로 대왕 the Great이란 칭호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키루스 대왕이 죽은 뒤에도 페르시아의 팽창은 지속되어 서기전 525년 키루스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캄비세스 2세 Cambyses II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2. 페르시아 제국의 결속 강화
캄비세스 2세(재위 서기전 530~522)는 선왕 키루스 대왕의 군사적 위대성을 이어받은 후계자이자 탁월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에는 많은 어려움이 밀어닥쳤다.
동시대인들과 후대 역사가들은 이 젊은 왕의 정신상태가 온전했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여왔다.
여하튼 그는 젊은 나이에 아들도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후계 문제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다루기 힘든 피정복 지방들의 느슨한 집합체로 남게 되었다.
짧은 내전 기간이 지난 후 키루스 대왕과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를 섬기된 귀족 핵심 세력은 왕실의 방계 혈족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캄비세스 2세의 후계자로 등극한 다리우스 1세(다리우스 대왕) Darius I(Darius the Great)는 서기전 521년부터 486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했고, 행정 개선을 통해 선왕들이 군사적으로 획득한 영토를 결속시키자 노력했다.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을 20개의 통치구역인 사트라피령領 satrapy territory으로 나누고, 각 구역의 행정을 태수인 사트라프 satrap가 맡도록 했다.
사트라프들은 폭넓은 권력을 누리면서 상당한 정치적 재량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물을 바쳐야 했고, 형식적 자치권을 가진 히브리 왕국 등의 속국들이 그랬듯이 중앙 정부에 절대적 충성을 바쳐야만 했다.
키루스 대왕의 관용정책을 고수한 다리우스 1세는 제국 내 다양한 민족이 고유의 관습과 제도를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한편, 표준화된 화폐와 도량형 제도를 강제로 시행했다.
페르시아인은 제국 전역에서 소액의 공물 납부를 요구했다.
그들은 피정복민을 괴롭히는 가혹한 세금이나 군법 또는 종교 관행을 강요하지 않았다.
수백 년에 걸친 아시리아와 칼데아의 전제정치 이후에 등장한 페르시아의 온건한 통치는 근동 전역에서 환영을 받았다.
다리우스 1세는 위대한 건설자이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왕궁과 수도를 건설했는데, 그리스인은 그것을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페르시아의 도시)라고 불렀다.
그는 이집트 내륙 지방과의 교역 편의를 위해 나일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토록 했고, 농업 생산을 늘리기 위해 페르시아 고원과 시리아사막 가장자리에 관개시설을 설치했다.
다리우스 1세는 또한 광대한 영토에서 상업과 교통을 증진시키기 위해 아리시라의 도로 체계를 확장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왕도王道 Royal Road였다.
이 길은 동쪽의 페르시아만 부근 수사 Susa에서 서쪽의 에게해 부근 사르디스 Sardis(옛 리디아 수도)까지 2,700킬로미터에 달했다.
이 길을 오간 정부 특사들은 역사상 최초의 우편배달부였다.
그들은 한 역참에서 다른 역참까지 중계 구간을 맡아 소식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는 말을 타고 하루 달리는 거리였다.
각 역참에는 새로운 말과 기수가 대기하고 있다가 앞선 우편배달부가 가져온 것을 운반했다.
제국의 광범한 정보망은 이 우편 체계를 기반으로 가동되었고,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낱낱이 왕에게 보고되었다.
다리우스 1세가 창설한 '정보국'은 페르시아 역사의 전 시기 동안 '왕의 눈과 귀'로서 명성을 떨쳤다.
다리우스 1세는 매우 탁월한 행정가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방면으로 페르시아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군사 전략상 엄청난 실책을 범했다.
키루스 대왕의 리디아 정복으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그리스어 사용 도시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어 사용 도시들은 페르시아를 경멸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그랬듯이 자유를 동경했다.
그 결과 서기전 499년에서 494년까지 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은 독립을 위한 전쟁을 벌였고 한동안 아테네의 병력 지원을 받았다.
아테네인은 아시아의 그리스인과 연합해 페르시아의 행정 중심지 사르디스를 불태웠다.
다리우스 1세는 아시아에서의 봉기를 진압한 후, 에게해 건너편으로 군대를 보내 아테네 Athens를 응징하고 유럽의 그리스인에게 자신의 지배권을 과시하고자 했다.
서기전 490년의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에서 아테네인 Athenian은 다리우스 1세에게 평생 한 번뿐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서기전 480년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재위 서기전 486~465)가 대군을 동원해 보복을 감행했다.
그리스인을 짓밟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 Spartan의 영웅적 저항에 직면한 그는 1년 뒤 물러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페르시아인은 그들이 세력 팽창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이후 그들은 아시아 영토에만 집중했고 더 이상 그리스인이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일에만 경제외교적 역량을 쏟았다.
사실 서기전 479년부터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 대왕(영어는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알렉산더 3세 Alexander III) 이 소아시아를 침공한 서기전 334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인은 내부적으로 도시들 간의 경쟁에 휘말려 있어서 페르시아에 아무런 도전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이 시기의 페르시아 제국은 궁정 음모와 지방의 반란으로 인해 정치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문화의 세계시민적 성격과 그들이 보여준 전반적인 관용정책은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아시리아나 칼데아와는 달리 페르시아는 신민臣民[군주국에서 벼슬아치와 백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들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이 있었다.
페르시아인은 지방 제도와 관행의 조화, 숙련된 관료제도를 통한 안정적이고 일관된 행정, 중앙과 지방의 신속한 의사소통 등에 기반을 둔 제국 모형을 확립했다.
마케도니아인 Macedonian과 로마인 Roman은 나중에 이 모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3. 조로아스터교
페르시아의 정치 유산보다 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것은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로 대표되는 종교 유산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불교, 유대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였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조로아스터 Zoroaster(페르시아 이름 자라투스트라 Zarathustra의 그리스어)였다.
조로아스터는 서기전 600년 즈음의 페르시아인으로 간주되지만,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일부 저작물 때문에 그보다 400년 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조로아스터는 다신교, 동물 희생, 마술 등을 근절함으로써 페르시아인의 전통 관습을 개혁하고 종교를 의식이 아닌 윤리의 관점에서 재정립하고자 했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완벽한 종교 신앙체계를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다.
조로아스터는 우주에 하나의 최고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 신을 아후라 마즈다 Ahura Mazda(아후라는 '주主', 마즈다는 '지혜'를 의미함) 즉 '지혜로운 주'라고 불렀다.
아후라 마즈다는 빛과 진리와 의로움을 구체화한 신이었다.
그에게는 분노도 악도 없으며 그의 빛은 특정 부족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 비친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만으로는 악과 고통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상반되는 신적 존재인 아리만 Ahriman을 상정했다.
아리만은 불충하고 사악한 신으로서 어둠과 악을 주관했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를 아리만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로 제시했다.
그러나 후대의 조로아스터교 사제집단인 마기 Magi(단수형은 마구스 Magus이며, 마술 magic의 어원)는 창시자의 사상에서 이원론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들은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이 대등한 경쟁관계에 있으며 최고권을 놓고 필사적 투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오직 최후의 날이 되어야 빛이 어둠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그때 아후라 마즈다는 아리만을 제압해 그를 심연으로 던져버린다.
조로아스터교는 개인적 종교로서 공식적·제의적 종교와는 달리 사적이고도 영적인 요구를 했으며, 초기의 근동 종교와 달리 신적인 왕의 권력을 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조는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에 헌신했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활동에서 조로아스터교의 비중이 커졌다.
그것은 페르시아 지배의 절충주의와 관용을 설명해준다.
피정복 민족에게 자신의 문화 관행을 강요하려 했던 아시리아·칼데아·이집트와는 달리 페르시아 왕들은 상이한 민족 집합체를 통할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피정복민의 관습과 종교 신앙에 대해 관용하는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유력자들이 스스로를 '진정한 왕'이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페르시아 지배자들은 페르시아 대왕의 우산 아래 있는 다른 왕들의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넌지시 내비치면서 '왕 중 왕' 도는 '위대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같은 정신은 페르시아 건축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 그리스의 영향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도 페르시아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창조했다.
아후라 마즈다는 특정 종족이나 국가를 지지하지 않았다.
다만 아후라 마즈다의 진리와 정의을 떠받치는 개인들을 보살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죄를 지을 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사람들에게 죄 짓지 말고 신실할 것, 온 힘을 다해 서로 사랑하고 도울 것, 관대한 친절을 베풀 것 등을 권하고 격려하면서 힘쓰게 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내세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 종교는 심판의 날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으며, 그들은 천국 또는 불구덩이에 넘겨진다고 가르쳤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아베스타 Avesta≫(몇 백 년을 거치면서 누적 편찬된 경전)에는 의로운 자들에 대한 보상이 명시되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교의는 유대교·그리스도교와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조로아스터교의 윤리 보편성은 히브리 Hebrew 예언자의 가르침과 닮았고, 천국과 지옥은 그리스도교의 내세관과 닮았다.
심판에 날에 대한 관심은 유대교·그리스도교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을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서 빌려온 것으로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대 근동의 종교적·지적 전통은 광범한 문화적 상호 영향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 신앙의 뿌리를 단일 원천에서 더듬어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그리스도교는 모두 철기시대 근동 세계의 풍요로운 문화 토양에서 등장했다.
당연히 세계 종교의 이념 그 자체도 이런 환경 속에서 출현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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