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5: 후기 로마 공화정의 사회 투쟁 본문
공화국 말기의 투쟁(서기전 146~27년) | |
제3차 포에니 전쟁 | 서기전 149~146년 |
시칠리아의 노예 반란 | 서기전 134~104년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 서기전 133~122년 |
마리우스의 지배 | 서기전 107~100년 |
술라 독재관 되다 | 서기전 82년 |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 | 서기전 73~71년 |
폼페이우스 단독 집정관 되다 | 서기전 52년 |
카이사르 단독 집정관 되다 | 서기전 48년 |
카이사르 독재관 되다 | 서기전 46년 |
카이사르 암살 | 서기전 44년 |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지배 | 서기전 42~31년 |
옥타비아누스 단독 집정관 되다 | 서기전 31년 |
옥타비아누스 황제 되다 | 서기전 27년 |
서기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서기전 30년 무렵까지의 후기 로마 공화정은 거대한 혼란의 시기였다.
계급투쟁, 암살, 대립하는 독재자들 사이의 필사적 투쟁, 전쟁, 반란 등은 이 시기에 매우 흔히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에 노예들도 총체적 무질서에 한몫 거들었다.
약 7만 명의 노예가 서기전 134년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을 패퇴시켰다.
이 반란은 나중에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노예들은 서기전 104년 또다시 시칠리아를 약탈했다.
그러나 가장 위협적이었던 것은 스파르타쿠스 Spartacus(서기전 111?~71)라는 노예가 주도한 노예 반란이었다.
검투사 훈련을 받았던(그것은 경기장에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일단의 도망 노예와 함께 나폴리 근교의 베수비오 산 Mount Vesuvio으로 도주해 그곳에서 막대한 수의 다른 도망 노예들을 끌어모았다.
서기전 73년에서 71년까지 도망 노예들은 그의 리더십 아래 로마 진압군을 물리치고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압도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패배했고 스파르타쿠스는 전사했다.
포로로 잡힌 약 6천 명의 노예는 경고의 의미로 카푸아 Capua에서 로마 Roma(영어 Rome)에 이르는 약 240km의 긴 도로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린 채 처형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서기전 133년 그라쿠스 형제 Gracchi brothers가 주도한 사회적·경제적 개혁 기도와 더불어 로마 지배계급 사이에 광범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정부 소유 토지를 농지가 없는 평민에게 제공해 사회적·경제적 압박을 완화하고자 제안했다.
그라쿠스 형제와 원로원 동맹 세력은 농토를 얻게 될 수많은 피보호민이 선거에서 보여줄 충성심으로 얻게 될 정치적 이익을 노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Tiberius Sempronius Gracchus에게는 로마 농민의 삶의 질 문제와 그에 따르는 군대의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충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군대에 복무하려면 일정한 재산 자격을 갖추어야 했고, 로마의 정복활동이 확대되던 시기에 시민군은 징집으로 충원되었다.
서기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으로서, 국유지 임차인이나 보유자의 토지 보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안했는데, 이렇게 해서 남는 토지는 잘게 나누어 빈민에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보수 귀족들은 길길이 뛰면서 이 법률에 반대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동료 호민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Gaius Octavius에게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종용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의 호민관직을 박탈했는데 이는 법에 어긋나는 처사였다.
그 후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호민관 재선을 기도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취한 두 가지 조치는 모두 독재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쳐졌고,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에게 역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몽둥이로 무장한 그들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미쳐 날뛰면서 급기야 티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살해했다.
9년 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Gaius Sempronius Gracchus가 개혁 투쟁을 재개했다.
궁극적으로 티베리우스의 토지법은 원로원에 의해 시행되었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개혁이 그보다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서기전 123년 호민관에 선출되고 이듬해에 재선에 성공한 가이우스는 비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법률을 제정했다.
첫째,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 Tevere 강가에 거대한 공영 곡물창고를 지어 곡물가격을 안정시켰다.
둘째, 사익을 위해 속주를 착취한다고 의심되는 총독들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기사계급에게 원로원 귀족의 행정권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사법권을 부여했다.
더 많은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가이우스는 이탈리아 내 방대한 동맹세력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는데, 이 조치는 로마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가이우스의 이런 조치들 때문에 기득권 세력들은 극심한 분노로 들끓게 되었고, 결국 자신들의 정적 가이우스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로마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범죄자로 선포하고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드에게 부여했다.
이어진 투쟁에서 가이우스는 살해되었고 약 3,000명에 달하는 추종자들 또한 보복 살해되었다.
○귀족의 반동
그라쿠스 형제의 몰락 이후 대외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두 명의 장군이 잇달아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 첫 번째 인물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Gaius Marius였다.
마리우스는 서기전 107년 평민의 지지로 처음 집정관직에 올라 그 후 여섯 차례나 재선되었지만, 정치인의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다.
추종자들이 보기에 그는 장군이 군대를 배경으로 얼마나 쉽사리 반대파를 제압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 말고는 이룬 것이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동기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인력 부족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마리우스는 군 복무에 필요한 재산 자격 조건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그 후 도시빈민 및 농토 없는 지방 거주로 충원된 로마 병사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됨으로써 로마 군대는 공화정 자체보다 사령관 개인의 이익에 더 큰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그들이 섬기는 장군의 성공이야말로 소속 부대의 가난한 병사들에게 가장 확실한 보상을 약속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기전 86년 마리우스가 죽자 보수 세력은 군대를 통한 권력 장악의 기회만을 엿보았다.
그들 중에서 승리를 거둔 자는 루키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였는데, 그 역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서기전 82년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된 술라는 가차 없는 정적 숙청 작업을 벌였다.
그는 원로원의 권력을 확대하고(내전 과정에서 원로원 구성원이 대폭 감소되었기에 그는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로 빈자리를 채웠다), 호민관의 권한을 제한했다.
3년 동안 로마를 지배한 뒤 술라는 자신의 임무을 완수했다고 판단하고 향리로 은퇴해 사치와 일락에 탐닉했다.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술라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귀족계급에게 지배권을 넘겼지만, 곧이어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 인민의 대의를 옹호했다.
그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폼페이우스 Gnaeus Pompeius Magnus(영어는 폼피 Pompey)(서기전 106~48)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영어는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서기전 100~44)였다.
한동안 이 둘은 정치 지배권 장악을 획책하며 제휴하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경쟁자로 변했다.
두 사람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엘리트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온전히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시 규범과 규칙이 그들의 개인 재능과 야심을 펼치는 데 지극히 큰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정복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갈리아 Gallia 정복 사업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카이사르의 노력으로 로마 국가에는 갈리아 영토였던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와 라인강 서쪽 독일의 영토가 추가되었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고 그에 대한 군대의 충성심 또한 투철해졌다.
그러나 카이사르 군대로 인해 갈리아인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카이사르의 원정으로 약 100만 명의 갈리아인이 사망하고 약 100만 명이 노예로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여러 차례 소요가 있는 뒤인 서기전 52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하고 그를 단독 집정관으로 추대했다.
갈리아에 머물러 있던 카이사르는 마침내 국가의 공적으로 낙인이 찍혔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와 공모해서 카이사르의 정치권력을 박탈하려 했다.
그 결과 두 사람 사이에는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서기전 49년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 Rubicon River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로 진군했다(카이사르의 이 행동은 그 후 운명적 결단을 말할 때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지배권 탈환에 필요한 군대를 규합할 목적으로 동방으로 도망쳤다.
서기전 48년 두 경쟁자가 거느린 군대는 그리스의 파르살루스 Pharsalus에서 마주쳤다.
이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했고, 그는 얼마 뒤 카이사르 지지자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그녀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임신했다)의 궁에서 이집트 정치에 개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반도)로 또다시 군사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어찌나 빨리 승리를 거두었던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I came, I saw, I conquered)"라고 전황을 보고할 정도였다.
이제 감히 그의 권력에 도전할 사람은 없었다.
거느리던 퇴역 병사들의 도움으로 그는 원로원을 위협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냈다.
서기전 46년 카이사르는 10년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했고 2년 뒤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그 밖에도 자신의 권력을 돋보이게 할 만한 칭호는 모조리 끌어다 붙였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리고 국가 세입 관리에 관한 모든 권한을 획득했다.
사실상 그는 법률보다 상위에 있었다.
항간에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런 두려움은 그에 대한 암살로 이어졌다.
서기전 44년 3월 15일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리기를 원한 브루투스 Brutus, 카시우스 Cassius 등의 지휘를 받은 공모자 집단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한때 역사가들은 카이사르를 초인적 영웅으로 떠받들었지만, 오늘날에는 대단치 않은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에서 두 극단은 피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카이사르는 로마를 구원하지도 않았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다.
그는 공화정을 경멸했고 향후 로마의 정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서 취한 다음 몇 가지 조치는 영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는 그리스 천문학자의 도움을 받아 1년을 365일로 정했다(그리고 4년마다 1일을 추가했다).
이 율리우스력—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이를 수정(그레고리우스력)—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영어의 '7월'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July'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수천 명의 에스파냐인과 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이탈리아인과 속주민 사이의 차별 철폐를 향한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또한 버려진 땅에 휘하의 퇴역 병사 상당수와 일부 도시 빈민을 정착시킴으로써 경제적 불평등 해소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장악하기 전 카이사르가 장기적 안목을 갖고 서유럽 방면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폼페이우스와 알렉산드로스가 명성과 재물을 노리고 동부 지중해로 진출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카이사르는 서북 유럽의 잠재적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로마 지도자였다.
그는 갈리아를 로마 세계에 편입시킴으로써 로마에 막대한 농업적 부를 가져다주었고, 당시만 해도 야만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서유럽에 세련된 생활과 문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후 카이사르가 정복한 지역에서 탄생한 서유럽 문명은, 만일 카이사르가 없었더라면 사뭇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2. 31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2: 종로구 지역2-신문로, 세종로, 당주동, 도렴동 (0) | 2023.01.06 |
---|---|
향수 정학교 "괴석죽도" "석란도" (0) | 2023.01.01 |
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1: 종로구 지역1-경모궁 터, 종묘광장 (0) | 2022.12.30 |
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6: 콧대 높은 완벽주의자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0) | 2022.12.30 |
석창 홍세섭 "유압도" (0) | 2022.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