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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1: 종로구 지역1-경모궁 터, 종묘광장

새샘 2022. 12. 30. 19:44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종로구 지역1: 경모궁 터 유적과 종묘광장 유적>

 

종로구 지역은 서울시 4대문 안 보존방안에 힘입어 가장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중요 유적들인 경모궁 터, 종묘, 탑골공원 원각사 터, 시전 행랑 터, 종친부 터의 발굴조사가 있었고, 구역으로는 청진지구, 공평지구, 광화문(세종로) 구역에 대한 발굴이 눈에 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지역이 발굴되었는데, 신문로, 통의동, 종로, 관훈동, 낙원동, 관철동, 인사동, 서린동, 묘동, 관수동, 익선동, 창성동, 사직동, 필운동, 누하동, 효자동, 신교동, 옥인동, 적선동, 중학동, 삼청동, 사간동, 송현동, 수송동, 안국동, 운니동, 화동, 계동, 와룡동, 권농동, 명륜동, 이화동, 동숭동, 혜화동, 충신동, 숭인동, 홍지동, 교남동 등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건수가 많기 때문에 간략하게 발굴 내용을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경모궁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현재 서울대병원 안에는 함춘원 관련 유구와 함께 함춘문이 있다.

함춘원含春園조선시대 정원으로 1484년(성종 15) 창경궁 영건營建(집이나 건물을 지음) 이후 1493년(성종 24)에 함춘원이라 불리면서 창경궁의 후원이 되었다.

이후 1764년(영조 40)에는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은혜를 온전히 한다는 사당)를 함춘원으로 옮겨지었고, 정조 원년인 1776년 이곳을 경모궁景慕宮이라 불렀다.

그리고 1900년에는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인 영희전永禧殿을 경모궁 터에 옮겨 세웠다.

그러니까 서울대병원 안에 남아 있는  함춘원 터, 경모궁 터, 영희전 터라 부르는 곳은 모두 같은 곳이며, 함춘원 터(함춘원지)란 이름은 경모궁 터(경모궁지)로 바뀌었.

일제강점기에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 동안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의 함춘원 터와 함춘문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대에서는 2004년 함춘원 터 주변 보존정비와 의생명과학관 및 간호대기숙사 신축에 앞서 잔존 유구를 확인하고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 결과, 경모궁은 함춘원이 조성된 이후 그 내부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경모궁 터에서 건물 터 2동과 기단, 주춧돌, 월대月臺(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 답도踏道(궁궐에서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계단)와 담장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된 2동의 건물 터는 경모궁 정당正堂(한 구역 내 여러 채 집의 가운데 주된 집채) 터와 옛 정당 터로 발굴단은 추정했다.

 

2005년에는 서울대 치과대학 별관 신축 부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 지역도 함춘원(경모궁) 권역에 포함된다.

조사 결과, 경모궁 관련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벽돌로 만든 건물 터 2동, 기름탱크와 배수구가 확인되었다.

 

2006년에도 함춘원(경모궁) 권역인 서울대 어린이병원 외래의료시설 증축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대상 지역은 서울대병원 본관 건물의 동쪽 응급의료센터 옆으로, 함춘원 터의 함춘문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40m 정도로 가까이 곳이다.

여기서는 배수로 1기와 돌무지(적석積石) 1기가 확인되었으며, 발굴단은 이 돌무지를 영희전 부속건물인 전사청典祀廳[제사와 증시贈諡(죽은 대신이나 장수에게 임금이 시호를 내려 주던 일)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의 기단부로, 배수로는 영희전 남쪽 담장에 인접한 시설로 추측했다.

 

2010년에도 함춘원(경모궁) 권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 조사는 경모궁 터와 함춘원 터, 영희전의 향후 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 영희전 관련 유구로는 정전正殿(어진이 봉안된 건물)과 정전 배후에 위치한 이안청移安廳(어진의 임시 보관 건물), 그리고 정전과 이안청을 연결하는 행각인 복도각複道閣이 확인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정전 출입구인 신문神門 북쪽에서는 신문 양쪽으로 조성된 행각과 담장 터,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영희전 전각과 관련된 것들로 와전瓦甎(기와와 벽돌)과 일제강점기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2011년에는 앞서 함춘원(경모궁) 터 발굴지역에 대한 추가 발굴이 이어졌다.

그 결과 수은묘나 경모궁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담장 터가 발견되었으며, 그 주변에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주춧돌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 일부가 확인되었다.

또한 정전 영역에서는 이안청의 뒤쪽인 서쪽에서 담장 터와 진단구鎭壇具(건물 등을 지을 때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땅에 묻는 물건), 정전 월대의 북동쪽 모서리에서는 배수로,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신문 남쪽에서는 수복방守僕房(능이나 사당을 관리하는 구실아치인 수복이 기거하는 건물) 가 각각 확인되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대부분 영희전 터와 관련된 것으로, 경모궁 당시에 조성된 것은 중정中庭(마당의 한가운데)에서 확인된 박석薄石(얇고 넓적한 돌) 등 일부에 불과했다.

 

2011년에도 함춘원(경모궁) 터 권역인 서울대 의대 융합의생명 교육연구관 신축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건물 터 2동, 우물 2기, 배수로 2기, 구덩이 1기, 적심 8기, 모래지정地定(무른 점토층을 파내고 그 속에 모래를 다져 넣어 지반을 튼튼하게 보강한 땅) 5기, 경성제국대학 해부학교실 등 총 21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유구들은 모두 조선~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이 가운데 우물은 내부 출토유물과 퇴적 상태로 보아 제의祭儀(제사 의식)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굴단은 추정했다.

 

 

경모궁 궁터 내부 섬 관련 석축. 섬이란 궁터 안에 있는 삼신산을 말한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경모궁 궁터 석재모형물과 안내판(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3년에서 2014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회관 식당 증축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지역은 서울대 의대 학생회관 건물 서쪽으로, 기존의 농구장을 철거하고 지상 3층 규모의 학생회관 식당을 증축하는 곳으로, 역시 경모궁(함춘원) 터 권역에 해당한다.

 

발굴 결과, 일제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 건물로 보이는 붉은벽돌 건물과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하시설물이 들어서지 않은 조사지역 남동쪽에서는 자연층을 기반으로 하는 석축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발굴단은 궁터 안 삼신산三神(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이른다)을 의미하는 섬과 관련된 석축 흔적으로 판단했다.

남아 있는 석축 형태로 미루어 원형인 것으로 보이며, 석축의 남서쪽 부분과 북쪽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복토 후 석축의 원형을 재현한 석재모형물이 있으며, 경모궁 궁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화 이전의 종묘 일대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공원화 이후 정비된 종묘 앞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종묘 광장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종묘의 서쪽 광장 일대를 공원화하려는 계획에 따라 지하의 문화재 보호와 종묘광장의 원형을 밝히고자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지역을 크게 종묘宗廟(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앞 외대문지구, 종로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도로에 위치한 종묘 앞길지구, 종로변에 있었던 시전행랑市廛行廊지구(조선 시대에, 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한 상설 시장양쪽에 줄지어 세운 상점 지구), 시전행랑지구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회동·제생동천을 따라 위치한 회동·제생동지구의 4구역으로 나누었다.

 

외대문지구에서는 외대문 계단과 도로층, 외대문 동쪽의 길도랑(측구側溝: 차도와 인도의 경계선을 따라 만든 얕은 도랑), 담장 아래 기단이 확인되었고, 종묘 앞길지구에서는 도로 유구와 폐기 구덩이, 도랑 유구, 앞길 동서쪽의 길도랑과 건물 터가 각각 확인되었다.

시전행랑지구에서는 시전행랑채 2동과 배수로가, 그리고 회동·제생동지구에서는 종묘전교宗廟前橋(종묘 앞 다리: 종묘 앞길에 흐르던 실개천 다리)의 상부 및 하부 갓기둥(교대橋臺: 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 함께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된 회동·제생동천의 석축으로 이어지는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 전 시기를 아우르고 있으며, 도자기와 기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후 2013년에는 종묘광장의 외대문에서 종묘전교에 이르는 종묘 앞길을 복원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지역은 외대문 앞에서 종묘전교까지의 도로와 도로 양쪽 즉 동서쪽 길도랑이었다.

조사 결과, 동서쪽 길도랑은 종묘 외대문에서 남쪽 종묘전교가 있는 회동·제생동천까지 이어져 있었고, 크게 조선 전기,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등 세 시기의 축조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앙의 종묘 앞길 유구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면이 점점 높아지는 모습도 확인되었다.

다만 지하에 매설된 여러 현대 시설물 설치로 훼손된 곳이 많아 그 변화 양상을 명확히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종묘광장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4년에 이어졌다.

앞서 2013년 조사 때 하지 못했던 지역과 서쪽 공원 조성 계획이 변경된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종묘 앞길인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는 길) 구역의 미조사 지역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도로면이 확인되었으며, 서쪽 공원 부지에서는 조선 전기~일제강점기의 기단과 적심 건물 터, 배수시설, 우물형 석축,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이런 발굴조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종묘 앞은 공원이 되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2. 3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