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충암 김정 "숙조도" 본문

글과 그림

충암 김정 "숙조도"

새샘 2023. 12. 24. 21:28

<이 한 조각 종이의 보배로운 가치를 아느냐>

 

김정, 숙조도, 16세기 전반, 종이에 담채, 32.1x21.7cm, 국립제주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충암沖庵 김정金淨(1486~1521)은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오늘날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제주도 오현단五賢壇(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부임하여 그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옛터) 모셔진 다섯 분 중 첫 번째 명현이라면 대략 그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충암은 22세 되는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관로에 진출했으며 정암 조광조와 함께 신진 사림파를 대표하는 문신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올곧은 말로 상소를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한때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되기 도 했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30대의 나이에 부제학,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본래 시문에 능했던 충암은 유배 생활 중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그것이 ≪충암집≫에 전한다.
또한 해녀를 비롯하여 제주의 독특한 풍속을 <제주풍토록>에 생생히 기록하였는데 이 글은 사실상 최초의 제주학 저서이자 기행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귀양살이 2년 만에 다시 정변이 일어나면서 그 화가 충암에게 미쳐 끝내는 사약을 받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과 36세의 나이였다.
 
사후에 그는 사림에서 크게 존숭되어 훗날 1646년(인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제주와 인연이 있는 명현을 기리는 오현단에 모셔지고 귤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충암은 그림으로도 유명했다.
당시 선비 사회에서는 그림을 잡기의 하나로 보던 생각이 점점 바뀌면서 회화도 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정을 발하는 고상한 취미라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었다.
이에 문인들은 여기로서 그림을 즐기며 회화의 세계에 동참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때 문인들은 대개 한 분야에서만 장기를 발하면서 일인일기一人一技의 일과예一科藝라는 기풍이 일어났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은 산수,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은 강아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은 대나무, 그리고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초충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충암은 새 그림을 잘 그린 일과예의 선비화가였다.
그의 유작은 아주 드문 편인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상복金相福이 소장했던 작품 등 서너 점이 전한다.
그중 가시나무 가지에 매달린 새를 그린 그림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어둔 녘 잠자리에 드는 두 마리 새를 그린 <숙조도宿鳥圖>로서, 잠든 새는 평화롭고 안온한 서정을 일으키기 충분하여 일찍부터 화가들이 즐겨 그려온 소재였다.
이 그림은 그동안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 또는 '산초백두도山椒白頭圖'라는 이름으로 책에 소개되어왔다.
 
산초나무 또는 왕초피나무로 생각되는 가시나무 가지에서 한 마리는 가슴에 부리를 묻고 이미 잠에 들었고, 다른 한 마리는 거꾸로 매달린 채 잠든 새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당신 벌써 잠들었어?"라는 표정이다.
새의 몸동작, 예쁘게 생긴 새의 날개, 부리, 가슴 등의 묘사도 정확하다.
 
화면상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청색 담채는 그윽한 밤기운을 느끼게 한다.
어떤 특별한 장식도 가하지 않았기에 조용한 정취가 감돈다.

참으로 담백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사랑스런 작품이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은 시대가 올라갈수록 짙게 나타나는데 이를 고격古格이라는 말로 평하곤 한다.
 
이 작품에는 충암의 도서낙관이 없다.
당시에는 아직 그림에 낙관을 하거나 도장을 찍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시기 그림들은 대부분 전칭 작품일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에는 정조 때 유명한 감식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찬문讚文이 적혀 있어서 충암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충암김선생지도학문장병약일성인견지지 忠庵金先生之道學文章炳若日星人皆見之至
(충암 김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해와 별같이 빛나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기서화수위공여사연 其書畵雖爲公餘事然
(서화란 비록 선생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유칭삼절이 當時猶称三絶而
(당시에 이미 삼절이라 일컬었는데)
 
단속속무무불심모석 但束俗貿貿不甚慕惜
(다만 풍속이 그림에 밝지 못하여 그다지 숭모하고 아낄 줄 몰랐다)
 
시이부다전우세 是以不多傳于世
(이 때문에 세상에 전하는 게 많지 않은데)
 
유차일저득보어창 惟此一彽淂保於滄
(오직 이 한 조각 종이가 머뭇거리다가 큰 바다에서 얻어 보존되니)
 
조염겁지여유전 喿厌刼之餘流傳
(울면서 마음을 빼앗기며 훼손된 나머지를 세상에 전하면서)
 
지금기위보완점고 至今其爲寶翫奌膏
(지금 이 보배로운 물건을 기름지게 고치니)
 
연성묵락이지재 連城墨樂而止哉
(이어진 성과 같은 묵의 즐거움이 그쳐지겠는가)
 
후지현시화자작단취기품격 後之賢是畵者咋但取其品格
(훗날 현인이 이 그림을 보면서 잠시 그 품격만을 취하는 게 아니라)
 
역가인지이상선생지의형칙우 亦可因之而想先生之儀形則尤
(이것으로 또한 선생의 태도와 모습을 더욱 생각하게 될 것이니)
 
당위산앙지일조야 當爲山仰之一助也
(더욱 어진 이를 우러러보는데 일조할 것이다)
 
경자남지일경주김광국근지 庚子南至日慶州金光國謹識
(1780년 경자년 동짓날 경주에서 김광국이 삼가 적는다)"
 
오늘날에 와서 이런 석농의 증언마저 의심한다면 조선 전기의 회화사는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석농의 글씨는 그림과 아주 잘 어울려서 함께 있어야 그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많은 도록에서 이 찬문을 빼고 그림만 게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의 역사성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며 아름다움도 절반만 보여주는 셈이 된다.
 
나 순례자는 덧붙여 말한다.
석농 김광국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무낙관 그림에서 한 시대의 도덕까지 읽게 되었으니 문화유산 보존에 석농이 끼친 공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김광국 찬문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alsanja&logNo=220522276029
3. 구글 관련 자료
 
●이 그림에 대한 또 다른 해설은 새샘 블로그 2018. 11. 7에 올린 글 "충암 김정 '산초백두도'"(https://micropsjj.tistory.com/17039413)에 실려 있다.
 
2023. 12. 2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