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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아틀란티스와 태양의 후예

새샘 2023. 12. 19. 15:52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집트 Egypt의 피라미드 pyramid나 페루 Peru의 삭사이와만 Saqsaywaman(Sacsayhuaman 또는 Xacxaguaman) 같은 고대 건축물을 볼 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탁월한 기술을 가진 문명이 존재했던 게 아닐까 늘 궁금하다.

그중 땅속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미스터리 건축물이 있다.

4대 문명의 변두리였던 우랄 Ural 산맥 근처에서 발견된 러시아 Russia 아르카임 Arkaim 도시 유적이다.

 

약 4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유적은 그 넓이가 무려 2만 제곱미터나 되고, 전체 모습은 태양 또는 바퀴를 닮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복잡한 담벼락과 도로가 구축되어 있고, 마구간과 대장간이 별도로 있는 등 매우 발달된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과연 시베리아 속의 아틀란티스 Atlantis in Siberia라고 할 만하다.

아르카임은 정말로 옛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아틀란티스였을까?

 

 

○아틀란티스, 그 사실과 신화

 

고대인들이 상상했던 가장 대표적인 이상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아틀란티스(고대 그리스어로  '아틀라스 섬 island of Atlas') 대륙이다.

이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Platon(영어 Plato)이었다[※하지만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플라톤이 아닌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 피타고라스 Pythagoras이며, 서기전 547년 발간된 그의 저서 ≪황금시편 Golden Verses≫에 기록].

'아틀란티스'는 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 Timaios(Timaeus)≫ (서기전 360년경) 와 ≪크리티아스 Kritias(Critias)≫(서기전 360년)에 등장한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아테네 Athene와 전쟁을 벌였다가 패한 후 멸망한 문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전 시대의 정치 지도자였던 솔론 Solon이 이집트 신관에게서 처음 들었고, 이후 후대로 전해진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는 이집트의 신관은 그냥 가공의 인물일 뿐, 실제로는 플라톤이 만들어낸 우화의 일부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대서양 또는 지중해에 있었던 이상적인 도시인데, 과욕을 부려서 아테네를 공격하는 바람에 제우스 Zeus 신이 벌을 내려 하루아침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상 국가 아틀란티스를 잊지 않았다.

숨 막히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Renaissance 문화가 막 꽃을 피우던 시기, 유럽인들은 이상향으로 아틀란티스를 주목했고, 이상향을 꿈꾸던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작품들로 되살아났다.

1516년 간행된 토머스 모어 Thomas More의 ≪유토피아 Utopia≫는 아틀란티스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낸 소설이다.

1627년에는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New Atlantis≫가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사람들에게 아틀란티스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철학 전공자들은 공통적으로 아틀란티스가 플라톤(또는 피타고라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대문명의 신비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아틀란티스와 같은 거대한 문명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아틀란티스가 실제 바닷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일대를 부단히 조사했다.

지금도 해마다 고대 문명인 아틀란티스가 '발견'되었다며 해외토픽을 장식하지만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아틀란티스를 찾는 노력이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게, 지중해 탐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진 크레타섬의 미노아 문명 Minoan civilization on Crete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노아 문명에서 발견된, 달려오는 황소의 뿔을 잡고 제비넘기를 하는 벽화는 특히 유명하다.

크레타섬은 지중해의 섬과 대륙 곳곳의 항구를 연결하는 해양교류를 기반으로 발달했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아 문명이 화산 폭발로 갑자기 단절되었으니 이곳이야말로 아틀란티스가 아니겠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노아 문명은 플라톤이 얘기한 아틀란티스와는 사뭇 다르다.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가 활동한 주 무대는 바다가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며, 배나 항구 대신 강력한 전사와 도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아틀란티스라는 도시를 지어냈을까.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의 특징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아틀란티스에는 막강한 전사 집단, 성채, 무기, 전차 등이 있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9000년 전에 존재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과장이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보면, 서기전 1600~1500년을 전후한 시기 유라시아 일대에 널리 확산된 강력한 전차와 무기를 갖춘 도시가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의 모습과 가장 비슷해 보인다.

 

전차는 서기전 20세기 무렵에 시베리아의 서쪽 우랄 Ural 산맥 근처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전차는 강력한 청동 무기와 함께 서기전 17세기 전후 사방으로 널리 퍼져서 4대 문명에 도달한다.

시베리아에 살며 전차와 무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고고학 용어로 '안드로노보 Andronovo 문화 공동체'라고 한다.

물론 플라톤이 유라시아 깊숙이 있는 전차를 몰던 집단을 구체적으로 알았다는 뜻은 아니다.

가공할 전차부대에 대한 기억이 플라톤이 살던(서기전 427~347년) 시기까지 구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더스 문명 Indus civilization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리그베다 Rig Veda≫, 고대 근동의 기록을 담고 있는 ≪성경 Bible≫, 이집트의 람세스 2세 Ramses II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 Muwatalli II of the Hittites가 시리아 Syria를 두고 벌였던 카데시 전투 Battle of Kadesh 등에 기록되어 있는 전차부대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공포는 이들의 존재가 당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플라톤의 기록과 유라시아 초원의 전사 집단과는 모순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유라시아 초원의 안드로노보 문화 공동체 유적에 마을은 가끔씩 있지만 아틀란티스와 같은 거대한 도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원지대에 사는 유목민들은 이동을 하기 때문에 도시가 발달할 수 없었을 거라고 고고학자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전차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던 거대 도시인 아르카임 Arkaim이 시베리아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학계가 들썩였다.

게다가 그 형태가 마치 태양과 같은 원형이어서 플라톤이 상상한 아틀란티스와도 닮아 보였다.

 

 

○탱크의 도시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전차

 

아르카임 유적 전경(위)과 아르카임 도시 복원도(아래). 원형으로 지어진 아파트 같은 모습으로 고도로 발달된 도시 형태를 갖췄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유럽과 시베리아를 가르는 우랄산맥 근처에 첼랴빈스크 Chelyabinsk라는 도시가 있다.

우랄산맥에 각종 광물이 풍부했던 탓에 첼랴빈스크는 소련 성립 이후 공업도시로 성장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소련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탱크를 만들면서 본 이름보다는 별명이 탄코그라드 Tankograd(탱크의 도시)로 더 유명한 적도 있었다.

1980년대에 소련은 이 도시 남쪽에 댐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수몰 예정 지역에 유적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아르카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카임 근처의 신타시타 Sintashta 유적에서는 말과 전차를 함께 묻은 전사의 무덤도 발견되었다.

무려 4000년 전에 사용된 세계 최초의 전차였다.

다행히 댐 건설 사업은 중단되었고 이후 이 지역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스탈린 Stalin(1878~1953) 시절 전차를 생산하던 도시가 알고 보니 세계 최초의 전차를 발명한 지역이었다는 역사적 우연에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아르카임 도시 유적의 형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샤먼(하문廈門)의 토루를 연상케 한다.

마치 원형으로 지어진 아파트 같은데, 전체 길이가 직경 150미터로 그 안에 2열로 모두 46개의 집을 만들었다.

도시의 중심에는 제사와 집회를 여는 광장이 있고, 집들 사이에는 도로가 나 있다.

축사와 무덤은 도시 바깥에 따로 만들었다.

아르카임은 고대 근동의 문명과 마찬가지로 관개시설과 방어 성벽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전차부대를 운영했다.

도시 주변에는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도시 주민들은 발달된 청동 기술과 다양한 생산 기술을 보유했다.

마치 현대의 신도시처럼 여러 시설을 용도에 따라 구획한 도시였다.

고고학자들은 아르카임에 약 2000명 정도의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한다.

그 주변에서도 70개 이상의 도시가 발견되었으니, 전체로 보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주변 도시들도 대부분 항공사진을 조사해 발견된 것이라 아마 실제 규모는 훨씬 더 클지도 모른다.

 

 

○구대륙으로, 만주와 한반도로

 

4대 문명과 만주 지역으로 확산된 시베리아 전차. 신타시타 출토 마차 복원도(위), 아래 왼쪽부터 이집트 람세스 2세의 전차 그림, 성경 '에스겔스'에 묘사된 전차 그림, 인도의 전차 모형, 중국 베이징 근처의 전차 복원도, 중국 네이멍구 난산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전차 그림.(사진 출처-출처자료1)

 

4000년 전에 세계 최초의 전차를 발명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발굴된 사람뼈를 조사한 결과로는 그들이 뚜렷한 유럽인 계통으로 인도-이란인 또는 아리안족 Aryans의 선조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들은 특히나 태양의 기호를 좋아해 토기와 각종 유물에 태양의 빛을 상징하는 '만卍' 자 또는 이를 변형한 기호를 많이 넣었다.

아르카임 유적의 평면 형태를 보면 도시 자체를 태양을 모방해 구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태양의 상징물을 좋아한 또다른 이유를 그들이 발명한 위대한 무기인 전차의 바퀴에서 찾을 수 있다.

전차의 바퀴는 나무를 잘라서 만들던 수레바퀴를 개량해 자전거 바퀴처럼 얇은 바퀴살을 만들고 차축을 끼운 형태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사소한 것 같지만 당시 이 위대한 발명으로 느릿한 탈것에 불과했던 수레는 쏜살같은 속도로 초원을 달려가는 전차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바퀴의 모습이 태양의 형상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들은 군사를 태양을 지고 달려가는 불의 전사로 표현했고, 스스로를 태양의 후예라 여겼다.

 

아르카임 사람들은 3800년 전쯤 갑자기 자신의 도시를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후의 변화로 시베리아에서 목축을 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구대륙 일대로 퍼져나간 이들이 전한 전차문화로 세계사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기전 1274년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벌인 세계 최초의 대륙 간 전쟁인 카데시 전투 역시 전차문화가 전파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차문화의 확산은 현대 유럽 언어들의 기원과도 연관이 있다.

데이비드 앤서니 David Anthony는 ≪말, 바퀴, 언어≫(공원국 옮김, 에코리브르 2015)에서 서기전 20세기 무렵부터 동유럽에서 서쪽으로 빠르게 확산된 인도-유럽어를, 시베리아에서 기원한 전차가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그들의 언어까지 함께 확산된 결과로 보았다.

전차라는 고급 기술이 퍼지기 위해서는 전차 제작 기술은 물론 목축과 말을 조련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그러니 관련된 전문용어와 언어들도 아울러 전해졌을 것이다.

 

인도-유럽어의 또다른 일파로, 불교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언어인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Sanskrit(범어梵語) 역시 전차문화의 확산과 연관이 있다.

서기전 15세기 아리안족이라 불린 이들은 인도에 전차를 전파하고 세계 최초의 경전인 ≪리그베다 Rig Veda≫를 남겼다.

인도 초기 불교에서는 태양족의 후예인 석가모니의 상징으로 전차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전차 바퀴는 불교의 도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태양의 후예가 남긴 유산은 불교에 그치지 않고,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와 힌두교 Hinduism의 태동으로도 이어졌다.

 

 

만주 비파형동검 문화에서 사용된 전차 복원도. 약간의 고증 실수는 있지만, 고대 시베리아 전차문화가 만주까지 전해졌음을 보여줌은 분명하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고대 시베리아의 전차는 중국과 만주 일대로도 유입되었다.

중국 상나라의 무덤과 랴오둥 지역의 고조선 비파형동검 문화에서도 전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한반도까지 전차가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산이 많고 초원이 없는 한반도의 지형 때문에 시베리아의 전차문화와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일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 고고학 아닌가.

2016년 이들과 한국의 관계를 증명해줄 한국 최초의 청동기가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청동기는 서기전 13세기의 것으로 한반도의 청동기 사용 시기를 무려 400년 이상 앞당긴 획기적인 유물이다.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장신구는 목걸이로 보이는데, 장식 중 몇개는 마치 돌을 포일로 감싼 듯한 모습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비슷한 장식이 발견된 예는 거의 없었다.

이런 장식은 고대 시베리아 전차부대의 강력한 청동 무기를 만드는 제련술인 세이마-투르비노 Seima-Turbino 스타일에서 흔히 보인다.

아르카임 근처의 무덤에서도 돌과 청동기로 만든 목걸이는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주로 여성들과 아이들의 장신구다.

비록 시베리아의 전차가 한반도로 이어진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그들의 발달된 청동제련술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증명된 것이다.

 

청동제련술이 아닌 진짜 전차를 만드는 기술이 북한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고고학자들은 서기전 8~7세기의 유적인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 유적에서 목제 수레바퀴를 발견했다.

평안북도 연안 금곡동에서는 나무로 만든 투구와 비파형동검을 발견했다고 한다.

실제로 랴오시 지역에서는 동제 투구를 쓰고 전차를 탄 전사들이 많이 발견된다.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전차를 만드는 전통이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더 구체적인 관련성은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서기전 4세기 '세형동검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남한 전역에서 당시에 사용된 세형동검과 함께 잔무늬거울(세문경細文鏡)과 청동방울이 많이 발견된다.

청동방울은 본래 전차에 매달아 전차가 질주할 때 소리를 내는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신의 전령이 하늘에서 전차를 타고 내려온다고 믿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성경의 <에스겔서>, 인도의 ≪리그베다≫는 물론, 가깝게는 오룡거五龍車(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북부여의 해모수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방울은 전차를 상징함과 동시에 하늘의 뜻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청동방울도 바로 이 전차의 부속에서 유래했다.

한반도에서는 전차가 아니라 신의 대리인인 샤먼들이 쓰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시베리아의 전차문화가 한반도와 아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히틀러가 만든 그림자

 

히틀러가 사용했던 나치 상징 하켄크로이츠(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D%95%98%EC%BC%84%ED%81%AC%EB%A1%9C%EC%9D%B4%EC%B8%A0)

 

4000년 전 구대륙을 뒤흔든 문명의 주역인 태양의 후예는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엉뚱하게도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인이 우월한 아리안족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고 고대 전차부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태양의 상징을 나치당 Nazi Party의 심벌인 하켄크로이츠 Hakenkreuz로 사용했다.

물론 히틀러 자신은 하켄크로이츠가 사실 그가 그렇게 경멸했던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점은 몰랐다.

히틀러의 그림자 때문에 그간 서방에서는 태양의 기호가 새겨진 고대 전차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왔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시베리아의 발굴 자료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재평가되고 있다.

시베리아의 전차부대는 월등한 기술로 구대륙 곳곳의 고대 유적과 언어,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세계 각국의 문화에 비슷한 요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태양의 후예가 남긴 문화가 특정 국가만의 유산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신나치주의 Neo-Nazism와 범투란주의 Pan-Turanism(튀르크인 중심주의)에 아르카임 유적을 이용하고 있다.

고대 태양의 후예가 남긴 유산을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고대사를 확장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다시 히틀러가 만들어놓은 편견의 틀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태양의 후예가 만든 문화가 구대륙 일대로 전파될 수 있었던 비결은 초원이란 환경에 적합한 성공적인 목축, 발달된 청동제련술, 그리고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었던 태양과 불의 숭배에 있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거친 환경에 적응하면서 전차와 무기를 사용하던 안드로노보 문화인들이 누렸던 문화는 각지의 문화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인간들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였고, 히틀러의 아리안주의 Arianism는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자만과 탐욕의 반면교사다.

아틀란티스 신화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변방에서 문명의 꽃을 피워 주변으로 전달했던 고대 유라시아 문화의 숨은 주인공 즉 안드로노보 문화인들이 아니었을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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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1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