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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미스터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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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미스터리

새샘 2023. 12. 6. 22:08

유라시아 일대의 신라의 금관.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국가의 왕들은 공통적으로 금관을 썼다. 왼쪽 위부터 시게 방향으로 샤먼의 모습을 새긴 남부 시베리아 하카스 Khakassia의 암각화, 러시아 흑해 크라스노다르 Krasnodar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 신라의 금관, 흑해 연안 사르마티아 Sarmatia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틸리아 Tillya 테페 Tepe의 금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신라를 대표하는 유적인 경주 대릉원大陵園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경주의 자랑인 동시에 유라시아 최고의 미스터리다.

중앙아시아 일대의 기마민족이 신라보다 앞선 시기에 이와 비슷한 형태의 고분을 널리 사용했기 때문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무렵 신라가 국력을 키우는 과정에 불현듯 등장해 약 200여년 동안 만들어지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 문제를 두고 학자들은 지난 100여년 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아무리 찾아봐도 신라의 고분과 똑같은 형태는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다.

중앙아시아의 돌무지덧널무덤과 비교해도 언뜻 보면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많고, 지어진 연대로 보아도 시간의 차이가 크다.

1000년을 이어온 신라의 역사에서 갑자기 끼어든 돌무지덧널무덤 시대 200년은 한반도의 작은 틀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초원의 역동적인 기마문화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볼 수 있다.

 

 

○몇천 명이 동원된 거대한 건축 사업

 

신라 왕족들이 사용했던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로 통나무집 형태의 무덤방(덧널=목곽木廓)을 만들고 그 위를 돌로 덮은(돌무지=적석積石) 무덤(분墳)이다.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집이기 때문에 생전에 살던 집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땅을 파서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기도 하고 지상에 만든 경우도 있다.

그다음 무덤방 위에 돌과 진흙 등을 쌓아 고분을 만든다.

돌무지덧널무덤 중 가장 큰 황남대총皇南大塚은 높이 25미터, 길이 120미터에 이른다.

순수하게 손으로만 작업을 했을 당시를 생각해보면, 돌을 쌓아 산처럼 거대한 고분을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라시아의 고분과 똑같이 만든 이면에는 초원의 유목문화를 닮고자 했던 고대 신라인들의 바람이 숨어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황금보검. 계림로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당시 신라인들은 유라시아 초원과 인적·물적으로 다양하게 교류했다.

그 흔적은 계림로 황금보검과 유리그릇에 잘 남아 있다.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정성인 무덤에 넣은 물건은 하나하나 다 사연이 있고, 사후세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반영되어 있기에 중요하다.

한편 비교적 쉽게 운반할 수 있는 보물과는 달리 고분은 몇천 명이 동원되는 거대한 건축 사업이다.

초원의 고분이 멋있다고 가볍게 흉내내 만들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나무로 만든 무덤방 위에 돌을 쌓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무작정 쌓으면 금세 무너질 수밖에 없다.

신라인들은 아마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기 위해 유라시아에서 무덤 만드는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경주는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이는 무덤의 재료와 관련이 있다.

중국 중원에는 신라나 유라시아 같은 돌무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중원은 거대한 황허강의 침식지여서 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가 귀한 몽골의 초원에 살았던 2000년 전의 흉노가 숲이 남아 있는 계곡들 사이에 무덤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경주 근처에는 숲도 많고 형산강 강가에 돌들도 아주 많으니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기에는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기원 찾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그래서 돌무지덧널무덤의 기원이 어딘데?'라고 묻는다.

비단 일반인뿐 아니라 고고학 전공자들도 같은 질문을 자주 한다.

정답은 아쉽게도 '아직 모른다'이다.

김새는 답변일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유라시아에는 돌무지덧널무덤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유라시아에서도 서부 시베리아를 제외한 중앙아시아 일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지역에 따라 구조도 너무나 다양하다.

미국인의 얼굴을 보고 저 사람이 미국 어느 주에서 왔는지 맞출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설령 유라시아의 유목민이 신라에 내려와 자신의 고향을 잊지 못해 고분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리와 환경의 차이 때문에 똑같은 고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지에 맞게 재창조할 수밖에 없다.

 

무덤의 생김새만으로 기원을 찾으려 하는 것도, 신라인이 우연히 똑같은 고분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것도 둘 다 의미 없다.

신라인들이 유라시아의 돌무지덧널무덤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경주에서 재창조했다고 보는 게 맞다.

1500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단단히 지키고 있는 거대한 돌무더기는 유라시아의 기술을 신라의 것으로 바꾼, 신라인들의 지혜가 집약된 산물이다.

 

 

○신라인에게 돌무지덧널무덤이란

 

경주의 봉황대 고분. 단독으로 만들어진 것 중 가장 규모가 크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잠깐 1500년 전 서라벌을 상상해보자.

황남대총 같은 대형 고분을 지으려면 몇십 년 동안 몇백 명의 사람이 동원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 경주의 신라인들은 매일같이 나무를 자르고 돌을 나르는 떠들썩한 공사 현장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또한 명절이 되면 그곳에서 거대한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벌이는 경쾌한 삶의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라는 4세기 무렵부터 가야 세력을 압박하고 고구려, 백제 등과 각축을 벌이면서 신흥 강자로 등장했다.

물론 신라는 표면적으로 고구려의 신민이었으며,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돕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외교는 외교일 뿐이었다.

신라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고 초원 지역의 기마술과 철제 무기들을 도입했다.

 

국력을 키워가던 신라인들에게 고분은 단순한 조상의 무덤 그 이상이었다.

산처럼 높은 고분은 신라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이자 자랑거리였다.

그들은 무덤을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특이하게도 신라의 고분은 왕의 궁궐 바로 근처에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에서 고분까지는 직선거리로 4킬로미터나 된다.

백제의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성에서 능산리 고분까지도 2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반면 경주 월성에서 대릉원까지 직선거리는 500미터도 되지 않는다.

지금도 경주 대릉원의 고분은 어디에서도 눈에 잘 띈다.

과거 신라인들 역시 늘상 그 커다란 고분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 끝자락 작은 나라에 살던 신라인들은 고분을 보며 세상으로 뻗어가기 위한 마음을 다졌다.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신라는 흉노의 후손임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이쯤 되면 몇천 명의 흉노 출신 기마부대가 한반도로 내려와서 기존의 신라 왕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위 기마민족설에 귀가 솔짓할지 모르겠다.

기마민족설은 일본 학자들이 처음 제기했다.

'위대한 야마토(대화大和)'의 후손인 일본인은 섬나라 원주민이 아니라 대륙에서 말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온 기마민족이라는 설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북방지역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기마민족의 종착지를 일본이 아닌 가야나 신라로 지목했다.

 

하지만 기마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신라 정벌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다.

몇천 명의 기마인이라면 그 수의 몇배가 되는 말을 데리고 이동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기마민족에게는 비옥한 농토가 아니라 거대한 목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형산강 유역의 좁은 분지인 경주는 기마부대가 오래 살 수 없는 불편한 땅이다.

굳이 기마부대가 한반도로 내려왔다면 경주보다는 대관령고원과 같은 목초 지대가 더 낫지 않았을까?

 

목초지가 덜 발달한 한국의 삼국은 국가 차원에서 마구간과 목초지를 경영하면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기마부대를 운영했다.

주몽 설화에서 주몽이 마구간에서 말을 키우는 사람으로 나오는 것도 같은 이치다.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대형 기마부대가 신라로 내려오긴 어려웠을 것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닭이 동시에 안에서 빨고 밖에서 쪼아야 한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좁은 경주 일대를 벗어나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인이 자신의 틀을 깨는 과정을 상징한다.

내부적으로 부여 계통의 부여-고구려-백제의 사람들과 차별화하며 정체성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북방 유라시아의 다양한 문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다.

막연하게 신라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이제는 접을 때가 되었다.

대신에 신라는 어떻게 지리적인 고립을 뚫고 북방계 문화를 받아들여 한반도를 통일하고 유라시아와 손잡았는가에 주목할 때다.

1500년 전 극적으로 부여계의 여러 국가들을 누르고 삼국을 통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는 21세기 한국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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