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1: 교회의 개혁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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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1: 교회의 개혁 2

새샘 2023. 12. 16. 17:59

◎교황 군주국가의 강화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D%BC%ED%8B%B0%EC%95%84%EB%88%84%EC%8A%A4_%EA%B5%90%EB%A0%B9%EC%A7%91)

 

보름스 협약 Concordat of Worms은 교황과 국왕 사이에 이루어진 하나의 타협이긴 했지만 성직 서임권을 놓고 벌어졌던 서임권敍任權 투쟁은 전반적으로 교황의 승리였다.

그 이유는 서임권 투쟁 결과 서유럽 성직자를 교황 지지 세력으로 결속시켰고, 교황이 성직자단 전체에 대한 사법적 수월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강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서임권 투쟁의 극적인 전개 과정은 유럽 대중의 신앙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한 동시대인이 말했듯, 당시에는 '길쌈하던 아낙네와 작업작의 직공마저도' 서임권 투쟁 말고는 아무것도 화젯거리로 삼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Gregorius VII(재위 1073~1085)와 그 후계자들은 유럽 평민들에게 성직 매매를 하는 주교, 그리고 결혼한 사제는 배척하라고 촉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응했고 일부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종교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엄청나게 증폭되었고 교회는 이런 관심과 열정을 종교적 정통의 울타리 안에 쓸어 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레고리우스 7세와 마찬가지로 12세기와 13세기의 교황들은 교회에 대한 교황의 군주적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에 비해 훨씬 소극적이어서 교회 정부 기구를 세우는 등의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목적을 추구했다.

로마에서 특별히 파견된 '교회 특사'는 교황의 명령을 전달·시행했다.

이 명령은 교황에게 정당한 판결을 받고자 하는 소송 당사자에게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온 몇백 건(나중에는 몇천 건)의 소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소송 건수가 늘어나자 소송 해결을 위한 교회법을 취급하는 권위 있는 기구가 발달되었다.

이런 교회법 발달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교회법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라티아누스 Gratianus(?~1158)였다.

1140년 무렵 그가 볼로냐에서 편찬한 전임 교황 및 교회 위원회의 방대한 법령집인 ≪그라티아누스 교령집 Decretum Gratiani≫은 교회법의 표준적인 '정전正典'이 되었다.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은 성직자가 연루된 사건뿐만 아니라 결혼, 상속, 유언 등 평신도와 관련된 온갖 종류의 사건에 대해서도 교회 재판권을 주장했다.

이 모든 사건이 지방의 교회법정에서 맨 먼저 심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교황은 교황만이 교회법에서 관면寬免 dispensation(가톨릭 교회에서 특별한 경우에 신자들에게 교회법의 제재를 면제해주는 행위)을 허용할 수 있으며, 교황청이 모든 교회법 소송에서 최고 법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의 권력과 교회의 위신이 올라가자 교회법정 소송과 로마 항소는 급격히 늘어났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면 교회법 전문지식의 중요성이 너무나 커져서 기존의 교황이 수도사 출신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교황 대부분이 훈련된 교회법학자들이었다.

순수한 영혼들은 이런 상황을 비난했지만, 그것은 교황 군주국가의 커진 권력과 복잡성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 치세

 

중세 전성기의 가장 유능하고 성공적인 교황으로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영어 Innocent III)(재위 1198~1216)를 꼽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37세에 교황으로 선출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역대 교황 가운데 가장 젊은 교황 중 하나였으며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학 전문가이면서 교회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주요 목표는 교황의 헤게모니 hegemony(패권覇權) 아래 전체 그리스도교 세계를 통합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한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와 달리 그는 세속적 영역에 대한 왕과 제후의 직접적 지배권에 추호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왕과 제후가 죄를 범하면 언제든지 교황이 나서서 그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 못지않게 모든 그리스도교도가 성 베드로 Saint Peter의 대리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들이 예수께 무릎을 꿇어야 하듯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리인(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토켄티우스 3세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표를 추구했다.

교황권의 독립성을 확고한 지리적 기반 위에 확보하고자 인노켄티우스 3세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 영토를 결속·확대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종종 교황령敎荒領 국가 Papa States—그 마지막 유물이 바티칸 Vatican 시국市國 이다—의 건설자로 간주되곤 한다.

그는 독일에서 자신이 지지한 후보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를 황제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는데, 그것은 그의 후임 교황들이 후회하게 될 성공이었다.

그는 프랑스 필리프 2세 존엄왕 Philippe II Auguste의 혼인상 불미한 점을 견책했으며, 잉글랜드의 존 왕 King John을 강제해 교황이 선택한 스티븐 랭턴 Stephen Langton 을 캔터베리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잉글랜드를 교황의 봉토로 양여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또한 성공의 정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아라곤 Aragon,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 헝가리 Hungary를 상대로 봉건적 대군주에 상응하는 지위를 주장했다.

남부 프랑스가 이단인 알비주아파 Albigenses의 세력 확대로 위협을 받자 교황은 십자군을 소집해 무력으로 토벌했다.

그는 또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의 자금 조달을 위해 성직자에게서 처음으로 소득세를 징수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가 교황으로 있으면서 이룩한 최고의 업적은 1215년 로마에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 Lateran Council를 소집한 일이었다.

서유럽 교회 전체를 대표한 이 회의는 신앙의 중심 교리를 명확히 하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교황의 리더십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천명했다.

이로써 교황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국왕을 견책했고 교회를 지배했다.

 

 

○13세기의 교황들

 

인노켄티우스 3세의 치세는 분명 교황 군주국가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또한 장래에 닥칠 파멸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이기도 했다.

적어도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이라는 직분의 체통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교황령 국가를 관리하고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을 따른 후임 교황들은 그와 같은 정신적 능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탐욕스런 지배자의 모습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교황령 국가는 시칠리아 왕국 Kingdom of Sicily(이탈리아어 Regno di Sicilia)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인노켄티우스 3세의 후계자들은 곧 인접국 지배자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배자는 얄궂게도 인노켄티우스 3세의 피보호자 protege인 프리드리히 2세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자신이 왕위에 앉혀놓은 프리드리히 2세가 나중에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숙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13세기의 교황들은 계속 교황권을 강화했고 교회 정부를 중앙집권화했다.

그들은 점차 성직 후보자—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를 지명할 권리를 획득했고, 파리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과 과정 및 교리에 대한 감독권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장기간에 걸친 정치 투쟁에도 빠져들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세속 권력을 잃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투쟁은 교황들이 프리드리히 2세를 파멸시키고자한 데서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 지배권을 위협했기 때문에 교황들의 행동은 어느 정도는 자기 방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와의 투쟁에서 교황들은 교황의 정신적 권위를 남용했다.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고 폐위 선언을 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황은 그에 맞서 싸울 십자군을 소집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노골적인 정치적 의도로 소집된 최초의 대규모 십자군이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에도 누대에 걸쳐 교황들은 황제의 모든 계승자를 '독사의 무리'라고 부르면서 황제에 대한 십자군을 재천명하고 이를 계속 밀어붙임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들은 십자군을 실행하고자 기금 조달에 혈안이 되었으며, 급기야 교황의 군사 후원자로서 프랑스 왕 루이 9세 Louis IX의 동생인 앙주의 카를로 Carlo(영어 Charles) of Anjou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를로가 교황을 도운 것은 어디까지는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동기 때문이었다.

1268년 카를로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마지막 남성 상속자들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이 지역에서 무리한 세금 징수를 했고, 이에 1282년 시칠리아인은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라는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아라곤 왕에게 넘겨주었는데, 아라곤 왕은 프리드리히 2세의 손녀와 결혼한 사이였다.

이에 따라 아라곤 왕이 이탈리아 영토에 들어와 과거 프리드리히 2세가 지배했던 지역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 앙주의 카를로와 교황은 프랑스 왕 필리프 3세 Philippe III(재위 1270~1285)를 설득해 아라곤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필리프 3세는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필리프 3세의 아들인  필리프 4세 Philippe IV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친교황 정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당시의 프랑스는 이미 대단히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기에 그 결정은 교황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십자군을 오용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기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교황의 정신적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1291년 성지에 있던 십자군의 마지막 전진기지가 교황 측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함락되고 말았다.

교황들은 여전히 아라곤에 대해 실패한 십자군을 재시도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Bonifacius VIII (영어 Boniface VIII)가 주관한 1300년의 교황 대사면은 로마에 순례하는 모든 십자군에게 완전 면벌부를 제공했는데, 그것은 앞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로마가 그리스도교도 순례의 주요 목적지가 될 것임을 은연중에 시인한 것이었다.

 

 

◎교황 군주국가의 쇠퇴

 

교황 군주국가의 세속권은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1294~1303) 치세에 마침내 붕괴되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겪은 모든 어려움은 그 자신이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주친 가장 큰 장애물은 국민적 군주국가가 교황 이상으로 신민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왕권은 착실하게 성장한 반면 교황의 위신은 점점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운하게도 보니파키우스 8세는, 무능하지만 지극히 경건한 그리고 재위 1년도 못 되어 사임한 교황의 뒤를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경건이나 겸손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던 까닭에 전임자와 극명한 대조를 보였고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단호하게 지배했고, 1300년 로마에서 최초의 교황 대사면을 주관했다.

그럴싸한 행사였지만, 그것은 그 후의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교황권의 공허한 과시에 불과했다.

 

잉글랜드 및 프랑스 왕들과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으로 인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첫 번째는,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직자 납세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을 지원하고자 직접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13세기를 지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들은 앞으로의 성지 십자군 또는 호엔슈타우펜 왕가 Hohenstaufen Dynasty에 대한 교황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징수했다.

그러더니 13세기 말에 이르러 왕들은 아무런 구실도 대지 않은 채 자신들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고자 노골적으로 성직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그런 시도를 제지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교황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성직자의 지지를 더 이상 얻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황은 왕들의 저항 앞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의 두 번째 논쟁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를 상대로 벌어졌다.

필리프 4세는 성직자에 대한 교회법의 보호 장치를 침범하면서 프랑스 주교 한 명을 반역죄로 재판하려 했다.

교황에 대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과거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투쟁이 그랬듯이 격렬한 선전전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교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필리프 4세가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단 혐의를 걸었고, 사람을 시켜 교황을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1303년 70대의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 거주지인 이탈리아 아나니 Anagni에서 필리프 4세의 군대에 체포되어 모진 학대를 당했다.

교황은 지방 시민들에 의해 결국 풀려났지만, 이 사건의 충격은 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황은 한 달 뒤 죽고 말았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계속 압박을 가했다.

그는 새 교황 클레멘스 5세 Clemens V를 밀어붙여 자신의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공격의 정당성을 승인토록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열렬한 가톨릭 신앙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도록 만들었다.

그 후 프랑스 군주국가의 국익이 걸린 문제에서 교황의 독립성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70년 동안 교황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 국경 인근의 아비뇽 Avignon에 거주하면서 사실상 프랑스의 외교적 이익을 위한 인질로 간주되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굴욕적 패배는, 1300년에 이르러 교황의 수사修辭(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보다 아름답고 정연하게 하는 일)와 현실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실증해주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왕은 오로지 교회의 '의지와 허용' 아래에서 지배한다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교 문명권에 대한 교황의 보편적인 정신적·세속적 권력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교황 군주국가가 왕의 의지와 혀용 아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의 성장은 국왕의 정교한 재판, 과세, 선전술 등과 결합해 유럽의 세력균형을 결정적으로 교회에서 국가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유럽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13세기 말부터 경건한 그리스도교도들은 교황보다 국가에 더욱 충성을 바치면서 자국 안에서 도덕적·정신적 쇄신 운동에 앞장섰다.

150년 동안이나 왕권의 종교적 속성이 부단히 침식되다가 마침내 13세기 말의 왕들은 그들의 성스러운 광휘를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경향은 중세 말기의 모든 시기를 통해 이어졌다.

그 추세는 궁극적으로 17세기, 즉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개신교改新敎) 종교개혁이 초래한 종교전쟁의 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꺾이게 되었다.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임권 투쟁에 의해 확립된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유럽인 삶의 근본 원리로서 완전히 그리고 확고하게 수립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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