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허주 이징 "난죽6곡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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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 이징 "난죽6곡병"

새샘 2023. 12. 14. 15:41

<난을 난으로만 보지 말고, 대를 대로만 보지 말라>

 

이징, 난죽6곡병 중 1폭(오른쪽)과 2폭, 1635년, 비단에 수묵, 각 폭 116.0x41.8,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1폭 화제

 

인생본자정人生本自靜(인생은 본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니)

청정내기진淸整乃其眞(맑고 바른 것이 그 본질이라)

온육형향덕穩毓馨香德(안정되게 길러야 꽃다운 향기가 크니)

하수초여인何殊草與人(어찌 풀과 사람이 다르리)

 

 

2폭 화제

 

순생아줄엽筍生俄茁葉(죽순이 나더니 곧 잎이 자라고)

치장각성죽稚長却成竹(어린 순 자라 다시 대나무가 되네)

관물주공부觀物做工夫(사물을 보는 것을 학문 닦는 일로 삼으니)

여사기진학如斯期進學(이같이 하여 학문의 진보를 바라네)

 

 

이징, 난죽6곡병 중 3폭(오른쪽)과 4폭, 1635년, 비단에 수묵, 각 폭 116.0x41.8,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3폭 화제

 

남순표불반南巡飄不返(남쪽으로 순행하다 표연히 돌아오지 않으니)

곡제상영황哭帝喪英皇(여영과 아황은 임금을 잃고 슬피 우네)

혈염성반죽血染成班竹(피로 물들여 반점의 대나무가 되었고)

누점양벽상淚霑漾碧湘(눈물이 적셔 푸른 상강에 출렁이네)

 

 

4폭 화제

 

수간몽고우數竿蒙瞽雨(대 줄기 몇 개가 무분별하게 비 맞더니)

엽엽하수수葉葉下垂垂(잎들이 점점 아래로 늘어지네)

천의수동윤天意雖同潤(하늘의 뜻은 같이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지만)

유정공졸위幽貞恐卒萎(숨은 절개가 마침내 시들까 두렵네)

 

 

이징, 난죽6곡병 중 5폭(오른쪽)과 발문, 1635년, 비단에 수묵, 각 폭 116.0x41.8,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5폭 화제

 

유방수공상 幽芳誰共賞(그윽한 향기를 누구와 함께 감상할까)

고절중동시 高節衆同猜(높은 절개를 무리들이 함께 시기하네)

소이은군자 所以隱君子(그런 까닭에 은거하는 군자는)

고회의차개 孤懷倚此開(외로움을 품으며 이렇듯 피는 것에 의지하네)

 

 

6폭 발문

 

오호嗚呼(오호라)

도지현회이물지성쇠수지 道之顯晦而物之盛衰隨之(도가 밝고 어두워짐에 따라 사물이 성하고 쇠하는 것이니)

물지성쇠이도지현회 物之盛衰而道之顯晦(사물의 성쇠로 도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음을)

역가복의 亦可卜矣(또한 점칠 수 있다)

 

당난죽우상어선생 當蘭竹之遇賞於先生(갑자기 선생이 난죽도를 우연히 감상하고)

이제시어기상야 而題詩於其上也(그위에 시를 지었는데)

난약증이성형죽약증이청 蘭若增而馨竹若增而淸(난의 향기가 짙어지면 대나무의 맑음이 증가하니)

어시호난죽지성극의 於是乎蘭竹之盛極矣(이때 난과 대나무는 왕성함이 지극했다)

 

불행선생지도회이불명 不幸先生之道晦而不明(불행하게도 선생의 도가 숨어버려 알지 못하여)

칙수유사난숙난지호 則雖有斯蘭孰蘭之乎(곧 이 난초가 있으나 누가 난초라 하며)

수유사죽숙죽지호 雖有斯竹孰竹之乎(비록 이 대나무가 있으나 누가 대나무라 하리)

 

황선생지언지 況先生之言志(하물며 선생의 말한 뜻을)

인숙진이구송지호 人孰珍而口誦之乎(누구나 소리 내어 외우니)

향매공곡신단위무 香埋空谷神斷渭畝(향기가 빈 계곡에 숨었고 정신이 위천의 대밭에 끊어졌다가)

졸내회어병선 卒乃灰於兵燹(끝내는 전쟁 화재로 재로 변하여)

이팔절청십무종이문견지 而八絶淸什無從而聞見之(맑은 여덟 수를 듣거나 볼 수 없으니)

칙사난야사죽야쇠역심의 則斯蘭也斯竹也衰亦甚矣(이 난과 대나무 또한 심하게 쇠약해졌다)

 

행이칠일래복 幸而七日來復(다행히 칠일 이내에)

선생지도대명어세 先生之道大明於世(다시 선생의 도가 세상을 크게 밝히니)

​칙문이지지 則聞而知之(곧 명성을 듣고 알게 된)

자여조수륜김의원지동 者如趙守倫金義元之徒(조수륜과 김의원 같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어)

상여추기팔절지시 相與追記八絶之詩(서로 여덟 수의 시를 추가하여 기록하였지만)

이불기자지일절 而不記者只一絶(그 중에 한 수는 기록하지 못했다)

 

선생지증손부류씨 先生之曾孫婦柳氏(선생의 증손부 류씨가)

불감미갱장지모 不堪羹墻之慕(추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사복기구물 思復其舊物(옛 물건을 복구하려는 마음을 먹고)

불무시이수자적직 不貿市而手自績織(시장에서 사지 않고 손수 옷감을 짜서 만들어)

성팔첩견소 成八帖絹素(팔첩의 흰 비단을 완성하여)

사기자송년구명화 使其子松年求名畫(그의 아들 송년에게 이름난 그림을 구하게 하여)

등난죽이잉서칠절​ 登蘭竹而仍書七絶(난초와 대나무를 그리고서 일곱 수 시를 적었다)

 

완연여강규정지병풍윤동고지서화 宛然如姜葵亭之屛風尹東皐之書畫(마치 강규정의 병풍과 윤동고의 서화와 같아서)              

이관물반기지작 而觀物反己之作(물건을 보면 자신을 돌이키는 작품으로)

혁혁약전일사 赫赫若前日事(혁혁하기가 전날의 일과 같으니)

​물지성쇠과불계어도지현회호 物之盛衰果不係於道之顯晦乎(사물의 번성과 쇠퇴가 과연 도의 밝고 어두움에 관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      

희 선생지도유현회 先生之道有顯晦(슬프다. 선생의 도는 펴지고 어두워짐이 있었고)

이난여죽역유성쇠 而蘭與竹亦有盛衰(난과 대나무 또한 성쇠가 있으니)

연칙난죽지우선생용비수호 ​然則蘭竹之遇先生庸非數乎(그런즉 난과 대나무로 선생과 만난 게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선생지도지현회 而先生之道之顯晦(선생의 도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인난죽이가견 因蘭竹而可見(난과 대나무에서 볼 수 있으니)

칙선생지제난죽 則先生之題蘭竹(선생이 난과 대나무 시를 지은 게)

​역기우연재 亦豈偶然哉(또한 어찌 우연이라 하리)

 

수연난죽유형지물야 雖然蘭竹有形之物也(그렇지만 난과 대나무는 형체가 있는 사물이고)

도무형지물야 道無形之物也(도는 형체가 없는 사물이다)

유형자유시이괴걸 有形者有時而壞缺(형체가 있는 것은 때가 되면 무너져 없어지지만)

무형자무시이괴무처이걸 無形者無時而壞無處而缺(형체가 없는 것은 무너지는 때가 없고 없어지는 곳도 없으리)

석지회야명미상망야 昔之晦也明未嘗亡也(예전의 어두웠던 것은 밝았던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금지명역미상가명언 今之明也亦未嘗加明焉(지금 밝은 것 또한 예전에 어찌 밝았으리)

 

후지관사화자 後之觀斯畫者(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불이난시난 不以蘭視蘭(난초를 난초로만 보지 말고)

이사선생형향지덕 而思先生馨香之德(선생의 향기로운 덕을 생각하고)

불사죽시죽 不以竹視竹(대나무를 대나무로만 보지말고)

이사선행청직지절 而思先生淸直之節(선생의 맑고 곧은 절개를 생각하며)

 

부도송기시 不徒誦其詩(그 시를 외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사기소이사친사군 而思其所以事親事君(부모를 섬기고 임금 섬김을 생각하면서)

수기치인지도이유득언 脩己治人之道而有得焉(자신을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얻게 됨으로써)

칙사병지유보어세교 則斯屛之有補於世敎(곧 이 병풍이 세상을 가르침에 보탬이 있으니)

불기중호 不其重乎(중요하지 않겠는가)

 

규정휘은동고휘언직 葵亭諱㶏東皐諱彥直(규정의 생전 이름은 은이며, 동고의 생전 이름 휘는 언직이니)

개일시명류야 皆一時名流也(이들은 모두 한 시대 명사들이다)

인병록지 因幷錄之(함께 기록함으로써)

。    비후인지기시말운 비俾後人知其始末云(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전말을 알린다)

 

명황숭정팔년을해십일월일 明皇崇禎八年乙亥十一月 日  명나라 황제 숭정 8년 을해년(1635년) 11월 일

 

 

 

허주虛舟 이징李澄(1581~1653 이후)의 <난죽6곡병蘭竹六曲屛>에는 길고 긴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현재 이 병풍은 그림 다섯 폭과 발문跋文(책이나 그림의 끝에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한 폭으로 꾸며져 있지만 원래는 여덟 폭이었다.

이야기는 멀리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묘사화는 잘 알려진 대로 진진 사림파 문신들이 보수적인 훈구파에 의해 집단적으로 정치적 학살을 당한 사건이다.

신진 사림파의 리더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음력 1482~1519, 양력 1482~1520)였다.

당시 함께 변을 당했던 강은姜은 윤언직尹彦直이란 화가가 그린 <난죽8곡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광조가 병풍의 각 폭에 오언절구五言絶句(5자 4행시)를 지어줌으로써 사대부 사회에서 희대의 명물로 꼽혔다.

그것은 그림보다도 조광조의 시 때문이었다.

그중 한 수를 옮겨본다.

 

"절벽이라 난초도 거꾸로 자랐고(애현난역도崖懸蘭亦到)

돌에 막혀 대나무도 드문드문하네(석차죽종소石且竹從疎)

절개란 힘든 일이지만 평안할 때나 험난할 때나 변함이 없고(고절동이험苦節同夷險)

절벽에서 뿜는 향기는 여전히 스스로 그윽하다네(위향욱자여危香郁自如)"

 

이렇게 유명한 <난죽8곡병>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버렸다.

문인들이 아쉬워한 건 난죽 그림보다도 조광조의 시였다.

그러던 중 조수륜趙守倫과 김의원金義元이란 두 늙은 선비가 젊었을 때 병풍에서 보았던 조광조의 시를 늘그막까지 외우고 있었다.

이들은 8수 중 7수를 완벽하게 기억해냈다.

 

지금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으나 당시 문인들에게 명시에 대한 기억이란 그런 것이었다.

조광조를 흠모하는 정이 깊었던 선비들에겐 더욱 가능한 일이다.

조수륜은 평택현감을 지낸 후 정치적 사건으로 옥사한 비운의 선비로 조선 중기 화가였던 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의 아버지였고, 김의원은 벼슬이 대사간에 이른 학자였다.

 

조수륜과 김의원이 조광조의 잃어버린 시를 기억해냈다는 소문이 마침내 조광조의 후손에게 알려지자 조광조의 증손며느리인 유시柳氏는 병풍을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유씨는 시증조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손수 비단을 짜서 화폭을 만들고 아들 조송년趙松年에게 시켜 당대 최고의 화가인 허주 이징에게 난죽 그림을 받게 하였다.

 

허주 이징은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서자로 일찍부터 그림에 자질을 보여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비록 서출이지만 왕가의 자손답게 화풍이 아주 단정하고 치밀했으며, 모범적이었고 품격이 높았다.

때문에 인조의 총애를 받아 궁중에 불려가 임금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전하는 얘기로 이징은 어려서 그림에 몰두하여 다락에 올라가 사흘 동안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잃어버린 줄 알고 애타게 찾던 자식을 다락방에서 발견한 아버지는 무릎을 꿇려놓고 아들을 혼냈는데 꾸지람을 듣는 이징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눈물로 새를 그렸다고 한다.

 

그런 이징이 그린 난죽도는 여느 그림보다도 필치가 섬세하고 우아하며 화폭 전체에 고고한 기상과 높은 기품이 서려 있다.

화면은 고전적이면서도 단아한 구성을 보여주고, 난초 잎, 대나무 줄기의 표현에는 단순한 조형적인 멋을 넘어선 그 무엇이 풍겨온다.

 

이징의 난죽도가 완성되자 조수륜은 각 폭에 복원된 이광조의 시를 써넣었다.

이라하여 일곱 폭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복원하지 못한 한 폭에는 지조와 절개로 존경받던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에게 병풍의 유래를 밝힌 발문을 받았다.

조송년은 이 글을 당시 명필로 이름난 월탄月灘 이현李袨에게 부탁하여 정중하면서도 흐름이 아름다운 예서체로 받았다.

이로써 난죽 일곱 폭에 발문 한 폭의 8곡병풍이 복원된 것이다.

 

이런 내용은 <난죽6곡병>의 발문에 자세히 나와 있고 또 정온의 ≪동계집桐溪集≫에도 들어 있으며, 훗날 편찬한 조광조의 ≪정암집靜庵 부록에도 이 시들이 다시 기록되었다.

이렇게 복원된 <난죽8곡병>은 또다시 사대부 사회에서 희대의 명물로 상찬되어 청음 김상헌, 미수 허목 같은 학자들이 병풍에 대한 찬미의 글을 남겼다

 

오늘날에는 두 폭을 잃어버려 <난죽6곡병>이 되었지만 그 긴 내력은 조선시대 선비정신과 선비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동계 정온은 발문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슬프다. 선생의 도는 펴지고 어두워짐이 있었고, 난죽에도 역시 성쇠가 있었다.

· · · · · · 후세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난蘭을 난으로만 보지 말고 선생의 향기로운 덕을 생각할 것이며, 죽竹을 죽으로만 보지 말고 선생의 맑고 곧은 절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화제와 발문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alsanja&logNo=220975851374

3. 구글 관련 자료

 

2023. 12.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