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1: 서론, 교회의 개혁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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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1: 서론, 교회의 개혁 1

새샘 2023. 12. 4. 22:52

<8장 서론>

 
중세 전성기의 종교적·지적 변화는 유럽인의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유럽 문명의 근본 성격이 이 결정적인 시기에 일어난 변화로 인해 영구히 변화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종교생활의 경우 이 시기에 교황청이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지배적인 조직으로 등장했고, 교회는 평신도에게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확대 및 강화시키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교구 교회가 전 유럽에 걸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고 새로운 수도 교단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일차적 목표는 수도원 바깥의 세상이 기여하는 것이었다.
로마 말기 이래 처음으로 설교, 고해, 순례, 기도가 유럽 그리스도교도의 종교생활에서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새로운 양상은 그리스도교도와 비그리스도교도 사이의 종교적·사회적 구분을 강조했다.
그 결과 유럽 사회 내부의 소수 집단에 대한 박해가 늘어났고, 이른바 '박해 사회'가 등장해 이단자, 유대인, 동성애자, 나환자, 무슬림 등에 대한 박해가 교회와 국가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
 
중세 전성기에는 지적·문화적 생활에 현저한 부흥이 있었다.
12세기 중반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Aristotle)(서기전 384~322) 저작 전부를 포함한 몇 백 종의 고전 문학·철학 작품이 이슬람 Islam 세계에서—그리고 일부는 비잔티움 Byzantium에서— 서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런 새로운 문헌의 자극이 있기 전에도 이미 유럽 지식인들은 신학, 철학, 법학의 근본 문제를 새롭고 엄격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적 혁명('12세기의 르네상스 Renaissance')을 가속화한 것은 대학의 등장과 급속한 성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망스 romance(낭만)가 등장했다.
몇 백 년만에 처음으로 유럽에서 독서 대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교육, 사상, 예술 등에서 중세 초기 유럽은 비잔티움과 이슬람에 비해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1300년에 이르러 유럽은 이들 세 문명 가운데 지적·예술적으로 가장 앞서게 되었다.

유럽인은 이제 학문과 예술이 이집트 Egypt, 그리스 Greece, 로마 Roma(영어 Rome)로부터 그들에게 왔으며, 비록 그들은 거인의 어깨 위해 올라탄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올라탄 고대의 지적 거인들보다 더 또렷하게 멀리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자랑했다.
이런 자랑은 정당한 것이었다.

중세 전성기의 유럽인은 고대의 바탕 위에서 지적·예술적 성취를 이룩했고 또한 그들만의 중요한 공헌을 했다.

 

<교회의 개혁>

 
카롤링거 제국  Carolingian Empire 붕괴의 다양한 영향, 바이킹 Vikings·무슬림 Muslims, 헝가리인 Hungarians의 공격, 지방 귀족 가문의 세력 증대는 9세기와 10세기 유럽의 종교생활에 커다란 재앙이었다.
몇 백 년동안 교회 개혁가들은 관구 내 지방 성직자에 대한 주교의 지배권을 강화함으로써 평신도의 종교생활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10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많은 교구 교회가 방치되거나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교회는 몇몇 지방 유력 가문의 개인 소유물처럼 간주되었고, 그들은 교회 보호 임무를 빙자해 교회를 억압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구 교회는 마치 영주 소유의 방앗간, 빵공장, 대장간—농민은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고 영주는 그로부터 수익을 얻는다—처럼 장원의 종속물이 되기 일쑤였다.
심지어 주교직마저도 귀족 가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귀족은 마치 가족 재산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친척을 주교직에 임명하는가 하면, 돈을 받고 주교직을 팔아치웠다.
수도원도 비슷한 사유화 과정을 거쳤다.
일부 수도원은 수도 서약조차 하지 않은 젊은 귀족 자제가 득시글거리는 소굴로 전락했고, 또 다른 수도원은 기사단을 강제로 떠맡기도 했으며, 평신도가 수도원장 노릇을 하는 수도원도 있었다.
성 베넥딕투스 St. Benedictus(영어 St. Benedict)의 '수도원 계율'과는 사뭇 거리가 먼 현실이었다.
 
왕권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던 상황에서 주교는 토착 지방 세력에 대해 무방비상태였다.
교황도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사실 교황이야말로 지방 세력이 성직자의 영적 자질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0세기 교황들은 대부분 무능하거나 타락한 인물로서, 그를 배후 조종해 로마 시를 장악하고자 했던 로마 유력 가문의 아들 또는 하수인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정말 놀라우리만큼 방탕했다.
그중에서도 교황 요하네스 12세 Ioannes XII (영어: 요한 12세 John XII)(재위 955~964)는 최악이라 할 수 있다.
955년 그는 18세의 나이로 가문 배경에 힘입어 교황이 되었다.
그의 가문은 반세기 동안 로마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황 요하네스 12세는 문맹에 가까웠고 지독히 음탕했다.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 순례자들은 교황이 치근거릴까 두려워 라테란 궁전 Lateran Palace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육욕을 채우던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행위를 하던 중에 또는 교황이 자기 아내와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편의 칼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교황청은 최악의 수준에 이르렀던 10세기에도 성 베드로 Saint Peter와 성 바울 Saint Paul 무덤의 수호자이자,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권의 영적 우두머리로서 존경받는 기관이었다.
하지만 성 베드로의 자리를 차지한 교황들은 서유럽 사회의 도덕적·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크게 부족했다.
 
 

◎수도원 개혁, 900~1050년

 

클뤼니 수도원(사진 출처-https://www.imaeil.com/page/view/2019030710440325996)

 

수도원에 대한 최초의 개혁 움직임은 10세기 유럽의 수도원들에서 등장했다.
부르고뉴 Bourgogne(영어 Burgundy)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 Cluny Abbey이 그 출발점이었다.
910년 한 경건한 귀족이 설립한 클뤼니 수도원은 베네딕투스 수도회 Benedictine Monastery의 한 수도원이었지만 두 가지 중요한 구조적 혁신을 단행했다.
첫째, 지방 귀족 가문이나 지방 주교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고자 클뤼니 수도원을 교황 직속의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둘째, 수많은 산하 수도원을 개혁하거나 신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종전의 모든 베네딕투스 수도원이 제각기 독립적이고 평등했던 것과 달리, 전 유럽에 클뤼니 수도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모든 수도원으로 하여금 모母수도원에 복종하게끔 만들었다.
1049년 클뤼니 소수도원 prior(산하 수도원을 이렇게 불렀다)은 67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각각의 소수도원은 정교한 성무일도聖務日禱(가톨릭교회에서 하루를 여러 번 나누어 일정 간격으로 적절한 시간에 정해진 기도를 바치는 행위를 말하며, 그리스도교에서는 법정시간경 定時間經이라 한다)와 예배—클뤼니 수도원은 이 두 가지로 유명해졌다—를 실천했다.
개개의 소수도원은 지방의 세속 권력 및 교회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경건하면서도 장수한 수도원장들이 속속 등장했고 그들의 주도 아래 클뤼니 수도원은 높은 영적 기준과 세심하고 정연한 기도생활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클뤼니 수도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성공은 종교생활에 대한 외부 간섭을 완벽하게 배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클뤼니 수도원은 수도권을 개혁하면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베네딕투스 서약을 모든 수도사에게 엄격히 적용해야 하며, 둘째, 새로운 수도원장과 부수도원장은 수도사들의 자유선거에로 선출하며, 성직 매매—≪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 했던 시몬 마구스 Simon Magus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 simony'라고 부른다—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력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했다.
두 나라에는 왕권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왕의 후원에 의한 수도원 개혁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나라와 로타링기아 Lotharingia(프랑스어 로렌 Lorraine)에서는 경건한 귀족들이 수도원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반면 독일과 잉글랜드에서는 수도원 개혁이 10세기와 11세기에 그리스도교도 왕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클뤼니 수도원을 본받아, 왕들은 수도원 안에서 청빈·정결·복종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했고 정교한 집단 성무일도의 순서를 제정했다.
그러나 클뤼니 수도원과는 달리 왕이 앞장서서 개혁 수도원들을 외부 간섭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수도원장도 왕이 임명했다(왕은 왕국 내 주교를 임명해왔다).
 
수도원 개혁 운동이 유럽 각지에서 나란히 진행된 결과, 수도원 제도는 10세기와 11세기 라틴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정신적 모델이 되었다.
수도사들의 평화롭고도 질서 있는 일상의 예배는 천국의 완벽한 조화를 반영해주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는 정의로운 신의 분노로 파멸에 이를 수도 있는 죄악에 물든 세상을 보호하는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수도사들은 '천사 같은 사람들'로 비쳐졌고, 그들의 개인적인 청빈·정결·복종은 천국의 미덕을 충실히 나타내주었다.
수도원은 수도원 바깥세상의 신앙생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몇 세기 동안 수도원은 세상을 떠난 성인들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이자 관리소였다.
유골은 그 성인의 시신을 간직한 수도원을 보호해주는 권능을 가진 것으로 믿어졌다.
10세기부터 수도원은 경건한 평신도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평신도들은 기적의 치유를 얻기 위해 성인의 유골이 안치된 수도원을 찾았다.
이런 순례 여행의 대부분은 해당 지역의 성소를 목적지로 삼았다.
에스파냐 España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와 남부 프랑스의 생트 푸아 교회 Abbey Church of Sainte-Foy 등지를 향한 정례적인 장거리 순례 여행 코스도 발달하기 시작했고, 로마 Roma(영어 Rome)와 예루살렘 Jerusalem 같은 전통적인 순례 여행지를 향해 떠나는 인구도 늘어났다.

순례 여행은 수도원에서 발달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 형태가 울타리를 넘어 평신도들에게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교황의 개혁 운동

 

교회의 개혁 운동(900~1215년)
수도원 개혁
    클뤼니 수도원
             900~1050년
             910~1050년
교황의 개혁 운동
    교황 레오 9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서임권 투쟁
    보름스 협약
              1049~1122년
              1049~1054년 
              1073~1085년
              1075~1085년
              1122년
교황 군주국 강화
    <그레티아누스 교령집 >
    인노켄티우스 3세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100~1216년
              1140년
              1198~1216년
              1215년

 
수도원에서 시작한 개혁 운동은 주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들은 개혁적 수도사들을 대대적으로 주교직에 임명했다.
독일 왕들은 비非수도원 출신 주교들을 교체하지는 않았지만, 주교와 수도원장들에게 청렴성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왕의 격려에 힘입어 주교들도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교구의 중심 교회로서 주교가 상주하면서 직접 관할하며 미사도 집전)을 재건하고 확장했는데, 이는 클뤼니 수도원을 본받아 성당이 신적인 장엄함을 좀 더 잘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클뤼니 수도사들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 전체—주교, 개혁되지 않은 수도원, 심지어 교구 사제까지 포함—의 개혁을 목표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직 매매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모든 수도사와 사제에게 청빈과 독신을 요구했다.
독신생활에 대한 요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것이었다.
4세기와 5세기 일련의 공의회에서 사제의 독신이 선언되기는 했지만, 이런 요구는 그 후 전반적으로 무시되는 분위기였다.
1000년 무렵 유럽 교구 사제는 대부분 기혼자였다.
기혼 주교의 수는 그보다는 적었지만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브르타뉴 Bretagne 지방의 돌 Dol 대주교와 그의 아내는 공개적으로 딸들의 결혼을 축하했고, 그녀들에게 주교 관구에 딸린 토지를 증여했다.
밀라노 Milano의 대주교들은 개혁자들의 독신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의 수호성인인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주교도 결혼을 했고, 그가 자기 주교 관구 내의 사제들에게 영구히 결혼을 허락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046년까지만 해도 로마 교황청은 개혁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그해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 Heinrich III(재위 1046~1056)는 로마에 와서 교황권을 주장하던 로마의 지방 귀족 세 명을 모두 폐위시키고 황제의 친척이자 독일의 개혁 수도사인 레오 9세 Leo IX(재위 1049~1054)를 교황으로 임명했다.
레오 9세와 그의 지지자들(대부분 독일인이었지만 일부는 이탈리아인)은 재빨리 교황청을 장악하고, 성직 매매와 성직자 혼인 등 교회의 온갖 비도덕적 행실을 금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을 실행하기 위해 레오 9세와 그의 측근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등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성직을 돈 주고 사거나 아내(개혁자들은 '첩'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를 포기하기를 거부한 성직자를 징계, 해임했다.
레오 9세의 개혁 노력은 계서제적階序制的(사회에서 지위, 신분, 경제 능력 따위와 같은 계급에 따라 서열을 결정하는 제도로 운영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조직 체계 안에서 사제는 주교에게, 주교는 교황에게 복종해야만 했다.
교황은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권의 정신적·교리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전체 그리스도교회의 법률적·사법적 지배자였다.
 
레오 9세를 비롯한 개혁 교황들은 세속 지배자들이 지지해주는 지역에서만 법령을 시행할 수 있었다.
이들 세속 지지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였다.
황제의 보호는 개혁 교황을 로마 귀족 가문으로부터 격리시켜주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귀족들은 교황을 폐위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1056년 하인리히 3세는 어린 아들을 후계자—나중의 하인리히 4세 Heinrich IV(재위 1056~1105)—를 남겨둔 채 사망했다.
보호자인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개혁자들은 이제 로마의 정치적 파당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1058년 재임 중이던 개혁 교황이 사망하자 로마 귀족들은 그 기회를 틈타 그들 자신의 종복 중 한 사람을 교황 자리에 앉혔다.
일시적으로 개혁 운동 전부가 소멸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로마 바깥에서 세력을 모아 그들 자신이 교황(니콜라스 2세 또는 니콜라오 2세  Nicholas II)을 선출했다.
그들은 중부 및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지배자와 군사 동맹을 맞고 비개혁적 교황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1059년 교황 니콜라스 2세는 교황 선출권을 추기경에게만 허용하고 '황제의 권리를 유보하는' 새로운 교황 선출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그것은 교회 내 특수 집단인 추기경단 College of Cardinals의 발전에 이정표가 되었다.
10세기 이래 로마 인근의 교회에서 선발된 일군의 주교와 성직자들은 교황의 조언자 겸 행정 보좌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교황 선출 법령은 처음으로 추기경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 후 추기경단은 점차 명확한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고, 각별히 교황직의 급박한 계승이 있을 경우 교황 정책의 연속성을 확보해주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추기경단은 오늘날에도 교황을 선출하고 있다.
 
이 법령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로마의 개혁파와 독일 황제 사이에 불화가 싹트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1059년의 역사적 상황에서 교황 선출 법령의 의도는, 개혁자들이 취한 기존 조치들을 정당화하고, 로마 귀족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미래의 교황 선거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령은 분명 클뤼니 수도원의 이상—자유선거야말로 개혁 교회의 핵심이라고 하는—에 의지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 황제로부터 교황의 보호자라고 하는 전통적 역할을 박탈할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1059년에는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황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황제 대신 로마 귀족계급이 다시 복귀하고 개력을 위한 노력 전체가 물거품이 되고 말 바에는, 차라리 잔인하고 신뢰할 수 없는 노르만인하고라도 동맹을 맺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선출 법령은 어린 하인리히 4세의 측근 조언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 법령을 황제가 지닌 신임 교황 지명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고, 개혁자들이 노르만인과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해 분노했다.

노르만인이 중부 이탈리아의 황제 영토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린 왕의 섭정들과 교황청 사이에 형성된 적대감은 하인리히 4세가 성년이 되어가면서 직점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서임권 투쟁

 

개혁 운동 역사의 새롭고 중대한 단계는 107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그레고리오 7세)  Gregorius VII 의 선출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인이었고, 그의 선출은 로마 군중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는 이미 교황청에서 오랜 연륜을 쌓은 널리 알려진 개혁가였고, 로마 군중의 개입이 없었더라고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출 과정은 분명 1059년에 공포된 교황 선출 법령을 위배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처음 몇 년 동안 교황으로서 약체를 면치 못했다.

한편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로마와 화해하고 싶었다.

1073~1075년 작센 Sachsen(영어 Saxony)에서 귀족들과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는 처음에는 서로를 커다란 존경심으로 대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과 로마 사이에 문제를 일으킨 어린 시절의 조언자들을 책망했으며 이를 바로잡겠노라 약속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과 황제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두 눈이라고 말하면서, 만일 하인리히 4세가 동쪽의 이슬람을 상대로 한 군사 원정을 지위해준다면 교회를 그의 보호 아래 두겠노라고 약속했다.

표면적으로는 하인리히 4세의 선왕 치세처럼 교황청과 제국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복원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75년 말 둘의 관계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2세기 동안 서유럽은 교황청과 제국의 충돌로 인해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 충돌은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정신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의 관계를 영구히 바꾸어놓았다.

표면상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를 갈라놓은 문제는 하인리히 4세 같은 평신도가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그에게 정신적 직책의 상징물을 입혀주는 일—즉 '평신도 서임식'—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서임권 투쟁 敍任權 鬪爭(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까지 가톨릭의 주교·수도원장 따위의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로마 교황과 유럽 각국의 군주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은 그리스도교도 왕권의 본질,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의 관계, 성직자에 대한 교황과 군주의 감독권 등에 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서임권 투쟁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서임권 투쟁으로 신성한 왕권이라는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이 영구히 종식되고, 모든 세속 지배자에 맞서 교회가 독립적인 사법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헌신적인 교회 개혁자로서, 그가 추구한 목표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 혼인 금지 등 다분히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선임 개혁 교황들과는 달리 그레고리우스 7세는 클뤼니 수도원이 목표로 삼았던 모든 교회 직책에 대한 자유 선출이 완전히 실현도기 전에는 그 목표가 달성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 7세는 모든 성직자로 하여금 평신도에게서 교회 직책을 받지 못하도록 금하고, 이런 금지령이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진리'라고 선포했다.

하인리히 4세는 이 법령의 수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카롤링거 식의 왕이자 황제인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 북부 이탈리아의 주교와 수도원장은 그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밀라노에 새로운 대주교를 지명해 서임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자신이 성 베드로의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하인리히 4세가 천국의 문지기인 성 베드로에게 복종하듯 자신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밀라노 신임 대주교의 서임식에 참석했던 북부 이탈리아 주교들을 포함한 하인리히 4세의 조언자 여러 명을 파문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 선출 과정이 1059년의 선출 법령의 조항들을 위배했음을 상기시켰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 및 그를 지지한 수많은 독일과 이탈리아 주교를 파문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왕에 대한 파문은 그 자체로는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인리히 4세가 더 이상 교회의 신실한 아들이 아니며, 따라서 더 이상 독일의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파문을 폐위와 동일시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작센 귀족들에게 불과 몇 달 전에 끝난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기는 등 하인리히 4세의 신민에게 반란을 촉구했다.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Alps 이남의 이탈리아 카노사 Canossa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공개적으로 굴욕적인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를 역사가들은 '카노사의 굴욕 Humiliation of Canossa'이라 부른다.

그러나 교황이 파문을 풀자 하인리히 4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력을 재집결해 작센 반대파를 격파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에서 쫓아냈다.

1085년 늙은 교황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Salerno에서 망명 생활—사실상 노르만인 동맹자들의 포로였다—을 하던 중 사망했다.

그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증오했다. 그것이 내가 유배된 채 죽는 이유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타고난 급진주의자로, 자신의 올바름에 대한 확신은 끝이 없었다.

그는 지난날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총대주교에게 교황의 수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1054년 비잔티음 교회와의 분열을 촉발시켰던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교황이 되자 그레고리우스 7세는 자신이 성 베드로의 대리인이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사상이 새로운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께서는 '나는 관습이다'라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정책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자 그는 성서를 인용해 이렇게 대답했다.

"칼로 피 흘리기를 주저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그가 상궤를 일탈한 왕과 죄를 범한 주교에 맞서 독일 신민의 봉기를 요청한 것은 지극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그를 찬양한 사람들마저도 교만으로 인해 몰락한 반역 천사를 상기하면서 그를 '거룩한 사탄'이라 불렀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의 급진적 본능 때문에 그리스도교 문명권에 대한 그의 심원한 전통적 비전이 가려져서는 안된다.

서임권 투쟁의 궁극적 해결방안은 정신적 직책의 상징은 성직자가 갖고 평신도에게는 세속적 지배의 상징을 허용함으로써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는 것이었지만,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러한 구분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양쪽의 투쟁이 그토록 다루기 힘들었던 것은, 하인리히 4세도 그레고리우스 7세도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완전히 통일된 종교적·정치적 사회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신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세속 지배자의 책임이라고 하는 카롤링거 왕조의 표준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통일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최고권자가 황제인가 교황인가에 대해서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을 뿐이다.

양쪽은 주교의 영적 직분이 주교가 관리하는 토지 및 군사력과 분리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양쪽은 전혀 별개의 두 법률 체계가 있어서 교황은 종교 문제를 관장하고 왕은 세속 문제를 관리하는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서는 서임권 투쟁의 해결이 불가능했다.

교황과 황제, 그 어느 쪽도 상대를 완패시킬 만큼 막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 유럽은 정신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이 모두 필요하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서임권 투쟁의 결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국왕 하인리히 4세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보름스 협약 Concordat of Worms은 세속 서임권이라고 하는 당면 문제에 대한 타협이었다.

독일 황제는 고위 성직자에게 그의 직분을 나타내는 종교적 상징물로 서임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세속 지배자로서의 권리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서임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황제는 그들의 세속적 대군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 황제는 서유럽의 다른 왕들처럼 외견상으로는 자유 선출을 허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에 상당한 정도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서임권 투쟁은 궁극적으로 서유럽에서 종교와 정치 사이의 영속적인 구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그리고 교회를 종교 권위와 동일시하고 국가를 정치권력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두 이념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가 주도했던 콘스탄티누스 혁명 Constantine Revolution(동로마 제국을 세우고 기독교를 공인한 일) 이래 서유럽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임권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하인리히 4세의 주요 지지 세력은 그의 주교들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지지 세력은 대부분 작센 귀족계급을 비롯한 불만을 품은 독일 제후들이었다.

그러므로 서임권 투쟁은 결코 '교회 대 국가'의 투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지만 1122년 그것은 현실로 굳어졌다.

보름스 협약은 왕의 세속 권력과 성직자의 정신적 권위를 구분함으로써 교황과 황제의 대립을 해소했다.

보름스 협약은 주교를 교황이 주도하는 계서제적 성직자단의 한 부분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세속 권력과 정신적 권위 사이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것은 중세 유럽에서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되었다.

세속적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에 대한 재판은 왕이 해야 하는가, 성직자가 해야 하는가?

재산 상속권이 문제가 될 경우 결혼의 합법성은 누가 판결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갈등은 어디까지나 사법적인 대립—종교와 정치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이었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 사이의 구분이 존재한다는 근본 전제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서유럽이 교회법과 세속법 체계를 정교하게 만드는데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서임권 투쟁은 유럽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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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