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흉노가 애용한 우리의 온돌 본문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진다.
온돌방은 한국이 개발하고 보급한 대표적인 난방 시스템이다.
온돌은 서기전 4세기 무렵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룬 옥저인沃沮人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불을 땐 뒤 그 열기를 방바닥으로 보내 열효율을 높이는 방식인 온돌을 개발했다.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지혜가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옥저인들의 생활의 지혜는 곧바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확산되었고, 서기전 1세기 무렵에는 남한 일대까지 전파되었다.
남해안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늑도에서 발견된 온돌이 이를 실증한다.
방바닥을 통해 열기를 전달하는 온돌과 비슷한 구조는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에도 온돌과 비슷한 하이퍼코스트 hypocaust가 있었고, 알래스카 Alaska나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인 Russia 아무르강 Amur River 수추섬 Suchu Island의 신석기시대 집 자리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난방시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온돌 시설은 옥저인의 온돌과 달리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한반도 북부에서 시작되어 유라시아까지 이어진 온돌이 감춰둔 고고학적 비밀을 알아보자.
○바이칼에서 발견된 온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바이칼호 Lake Baikal는 호수를 기준으로 서쪽의 이르쿠츠크 Irkutsk(프리바이칼 Pri-Baikal)와 동쪽의 부랴트자치공화국 Buryat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자바이칼 Javaikal) 지역으로 나뉜다.
러시아의 일부인 부랴트공화국은 한반도 1.5배 크기로 몽골 계통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부랴트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 Ulan-Ude의 근처에는 2000년 전 흉노인들이 만든 대표적인 성터인 이볼가 Ivolga 유적이 있다.
레닌그라드 대학 Leningrad University의 고고학과 교수 안토니나 다비도바 Antonina Davydova는 1949~1974년 사이에 이볼가 유적지에서 오로지 삽과 호미만을 이용해 51개의 주거지와 216개의 무덤을 발굴해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잘 감이 안 오겠지만, 50여년 전 레닌그라드(영어로 세인트 피터스버그 St. Petersburg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울란우데까지는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일주일 이상을 가야 했던 거리였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성 고고학자인 다비도바 교수는 매년 이 지역을 오가며 흉노의 성터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한쪽 벽의 길이만 340미터에, 전체 면적이 약 11만 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이 성터에서 일렬로 줄을 맞춰 지은 주거지가 발견되었고, 각 집의 내부에는 ㄱ자 모양의 '쪽구들'이 놓여 있었다.
집의 모서리에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집 벽을 타고 올라가 굴뚝으로 나가는 구조다.
옥저인이 발명하고 고조선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했던 온돌이 멀리 바이칼에서까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 놀라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발굴 당시의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이볼가 성터에서는 온돌과 함께 대량의 중국 계통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당시는 1970년대 이후 중소 국경분쟁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은 중국 유물이 중국인들이 여기에 살았다는 근거로 쓰여 자칫 영토분쟁의 빌미가 될까봐 이볼가 성터를 흉노에 잡혀온 '중국인들의 포로수용소'라는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2011년 강인욱 교수가 일본과 몽골에서 흉노 성터 연구를 발표하자 한 일본인 노학자는 그 내막을 듣고서 자신은 이제까지 이볼가 성터를 포로수용소로 알고 있었다며 허탈해했다.
국가 간 학문적 교류가 전무하던 시절의 해프닝이다.
이볼가 성터 발굴 이후 부랴트공화국과 몽골의 성터 곳곳에서 옥저 계통의 온돌을 설치한 주거지가 속속 발견되었다.
흉노가 살던 추운 북방 초원에서 옥저의 온돌은 꽤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흉노제국이 만든 '뉴타운'
흉노는 평생을 이동하며 살았던 대표적인 유목민족이다.
흉노의 왕인 선우와 귀족, 무사들은 이동의 편의성을 위해 집이 없이 천막(유르트 yurt)에서 살았다.
그런 흉노가 이볼가 성터 같은 발달된 대형 성을 쌓고 그 안에 온돌 주거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선뜻 믿기 어렵다.
초원에 성터를 건설한 것은 유목민족이었던 흉노가 초원의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혜의 발로였다.
유목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유제품과 고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목민들은 곡식, 무기, 말갖춤(마구) 등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몇 천년 전부터 초원 주변의 정착민들과 교류해왔고, 바로 그것이 실크로드(비단길) Silk Road의 기원이 되었다.
흉노가 세력을 키워나가는 동안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를 견제했다.
흉노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줄 생산기지가 필요했고, 당시 주변 정착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초원 곳곳에 각종 성터를 건설했다.
즉 중국이나 다른 세력에 의존하던 방식을 흉노 스스로 최대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으로 바꾸어나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흉노의 구성원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이볼가 유적을 발굴해보니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았던 흔적이 나왔다.
중국에서 북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대장간에서 연장과 토기를 만들고, 만주 일대에서 온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
남쪽에서 온 정착민들에게 바이칼의 혹독한 겨울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흉노는 이를 해결하고자 겨울철 난방에 최적화된 한국의 온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각 지역의 성터에 기술자들을 파견해 온돌 주거지를 건설했다.
몽골의 셀렝가강 Selenga River 일대에서 흉노가 운영했던 성터를 조사하면 예외 없이 온돌 주거지가 나온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흉노제국이 만든 '뉴타운 New Town'이라고 할까.
각 온돌은 마치 붕어빵 기계로 찍어낸듯 그 형식과 크기가 거의 동일하다.
몇 백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는 사방의 성터에서 발견된 온돌이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온돌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온돌은 조금이라도 잘못 시공하면 열효율이 낮거나 불연소된 연기가 집 안으로 들어와 자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50대 이상이라면 1980년대까지 도시 서민들을 괴롭혔던 연탄가스 중독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용하는 연료, 난방 습관, 고래(방의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길)의 높이와 형태를 안전한 방식으로 세심하게 시공할 수 있는 기술자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흉노가 중국과 경쟁하여 초원에서 제국을 성립하는 기반이 된 각종 신도시 건설에 한국인의 지혜가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흉노의 성터 건설에 만주와 한반도의 온돌 시스템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단순히 물질문화의 교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서 언급했듯 온돌은 대충 모방할 수 있는 성질의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흉노의 성터에서 극동 지역의 옥저인들이 사용했던 토기들도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꽤 많은 만주와 한반도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 건너갔던 것 같다.
흉노와 고조선 및 옥저 등과의 밀접한 관계는 비록 간략하지만 중국 역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 이래 흉노는 300여년 동안 중국을 위협해왔다.
≪한서漢書≫에는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라는 기록이 있다.
흉노와 경쟁하던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이 통하는 것을 걱정한 대목이다.
흉노가 가진 강력한 국력의 배경에는 고조선과의 관계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은 더욱 구체적이다.
흉노와 고구려가 협력을 하는 장면이다.
한漢나라(서한西漢)(서기전 206~서기 8)를 멸망시키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한 왕망王莽(서기전 45~서기 23)이 현도군에 있는 고구려인들에게 흉노를 없애라고 명령하자 이에 반발한 고구려인들이 흉노와 합작하여 군대를 이끌고 역으로 신나라를 공격했다고 한다.
흉노에게 온돌 기술이 필요했듯 고조선과 부여도 흉노의 군사력과 기마문화가 필요했기에 서로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 자료를 보면 초기 고구려와 부여의 무기와 말갖춤에서 흉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찾아볼 수 있다.
○실크로드를 타고 서쪽으로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호령했던 흉노는 1세기 무렵 결국 중국에 패하고 흉노의 지배 세력은 서쪽으로 도망쳐 훈족 Huns을 이루었다.
바이칼과 몽골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흉노 이후에 발흥한 선비족의 일부가 되어 그들이 삶을 이어갔다.
흉노가 패망하면서 바이칼 지역에서는 더이상 온돌이 쓰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초원이라는 환경 요인에서 기인한다.
초원 지역은 삼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온돌에 쓸 땔나무가 너무 부족하다.
오죽하면 흉노 귀족들의 무덤은 그나마 무덤에 쓸 나무가 풍부한 산골짜기 근처에 만들 정도였다.
유목 생활을 하면 이동하면서 땔감을 구하면 되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 지역에 정착해 온돌을 사용하면 결국 그 주변의 삼림자원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조선시대 후기에 양반이 기하급수로 증가하면서 온돌집이 널리 유행했고, 그 결과 19세기 후반에 도심 근처의 산들이 모두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하물며 초원에서 온돌을 유지하려면 주변 삼림자원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고, 성을 제대로 유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흉노 이후의 돌궐, 유연 같은 초원제국들은 성터 건설을 포기했고, 이와 함께 온돌을 만들던 전통도 사라져버렸다.
몽골 지역에 온돌이 다시 등장한 것은 흉노 이후 1000년 가까이 지나서였다.
온돌을 건설한 사람들은 발해의 유민들이었다.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인들이 몽골로 이주해 살면서 온돌을 만든 것이다.
몽골의 친톨고이 Chintolgoi(역사에서는 진주鎭州라고 기록) 성터에서 고래가 22번 돌아가는 형태의 온돌이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칼에서 흉노가 만든 온돌은 사라졌지만, 놀랍게도 그 전통은 카자흐스탄 Kazakhstan일대의 실크로드로 이어졌다.
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대상隊商(카라반 caravan)을 위한 숙소인 '사라이 Sarai(또는 카라반 사라이)'라는 고급 저택에 온돌이 등장한다.
아궁이 대신 탄두르 Tandoor 화덕에 불을 때 방바닥을 지나가는 고래로 열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 Ibn Battuta(1304~1368)와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 Marco Polo(1254~1324)가 거쳐간 숙소인 사라이치크 Saraichik 유적에서도 온돌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삭풍이 몰아치는 사막을 가로지르며 얼었던 몸을 온돌에서 녹였을 것이다.
추운 만주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온돌은 이렇듯 초원에 도시를 건설하고 지역 간의 교류를 잇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는 알 수 없었지만, 고고학의 도움으로 밝혀낸 성과다.
이제 온돌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관련성을 밝히는 명명백백한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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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2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