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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은 흉노의 후예인가

새샘 2023. 11. 16. 10:15

우리 고대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신라와 흉노의 관계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지만 삼국 가운데 북방과 서역의 유물,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신라와 북방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신라와 북방과의 관계는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고대의 기록에도 신라 이전인 진한 시절부터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중국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많다고 했다.

중국 북방 이주민의 흔적은 최근 고고학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신라인들은 그로부터 400~500년이 지난 뒤인 마립간 시기에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북방계 유물과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었다.

신라가 통일할 무렵에는 묘비명에 자신들이 중국 서북 지역에 살던 흉노의 후예라고 당당히 적어 북방 지역과의 관계를 과시했다.

 

신라인이 말하는 흉노는 지금 우리가 오해하는 미개한 유목민이 결코 아니었다.

당시 흉노는 유라시아를 호령하는 강력한 무기와 군사를 갖춘 유목국가였고, 유라시아의 각 나라는 흉노의 발달된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흑해 연안에서 신라까지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을 흉노의 후예라고 여겼다.

고구려, 백제, 부여와 같은 부여계의 나라에 맞서 뒤늦게 경쟁을 시작한 신라는 건국 시기부터 이어져오던 북방 초원과의 관련성을 선민選民의식(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으로 내세웠다.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했던 신라의 1000년 역사에서 흉노는 자랑이었다.

 

 

○2300년 전 신라로 도망친 유목민

 

중국 삼국시대 관리였던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책 ≪삼국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손꼽힌다(원나라 때 지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는 다르다).

≪삼국사기≫의 경우 삼국이 망하고 한참 뒤인 고려시대에 쓰인 반면 ≪삼국지≫는 한국의 역사를 다룬 「동이전」 부분은 삼국시대에서도 전기에 해당하는 3세기에 쓰였기 때문이다.

「동이전」에 기록된 내용은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위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얻어낸 정보들이다.

그렇기에 삼한에서 3세기까지 연구에 있어 이 책의 신뢰도와 중요성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삼국지「동이전」에서 유독 학자들이 쉽게 해석할 수 없는 구절이 있다.

바로 신라의 전신인, 경주를 중심으로 번성한 진한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국의 진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한 구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한의 노인들이 전하여 말하길 "秦나라의 힘든 일(장성을 쌓는 일)을 피하여 한국으로 왔다. (···)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호弧라 한다. (···) 그 언어는 진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며 연나라, 제나라의 것과는 다르다."

 

진시황이 살았던 시절은 서기전 3세기 중반이다.

진한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대로라면 지금부터 2300년 전에 중국 북방에서 만리장성을 쌓던, 진나라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경주 일대로 내려와 진한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이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뜬금없어 보인다.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지은이가 지어냈거나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수는 이 이야기가 막연하게 주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사람들이 쓰던 말까지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심지어 중국 내의 여러 방언 중에서도 연나라나 제나라가 아니라 바로 진나라의 말을 썼다는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였다.

≪삼국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역사서에 이 정도로 자세하게 나오는 내용을 무작정 부정할 수만도 없다.

그럼에도 그간 실물 자료가 없었던 탓에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위)경주 탑동에서 출토된 호랑이형 장식과 (아래)중국 진나라 변두리 유목민이 남긴 동물장식 허리띠 모습이 상당히 닮았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이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들이 최근 속속 발견되고 있다.

2010년 경주 탑동에서 발굴된 변한시대의 나무관 무덤(목관묘木棺墓)이 좋은 예다.

고고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집을 개축하다가 나온 작은 유적이라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나무관 무덤 안에서 초원 유목민들이 애용하는 동물장식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장식이 중국 북방 지역에서도 특히 진秦나라 변경에서 살다가 후에 진나라로 편입된 서융西戎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동물장식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그뿐 아니라 마한이나 변한과 달리 진한에서는 안테나식 동검 장식이나 호랑이와 말의 모양을 한 허리띠 등 유독 북방 초원계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진수의 기록이 결코 허언이 아닌 셈이다.

 

놀라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1년 현해탄 건너 일본의 오사카와 가까운 비와호(비파호琵琶湖) 근처 가미고텐(상어전上御殿) 유적에서 중국 북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검의 거푸집이 발견되었다.

만주, 한반도, 일본의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그 형태가 독특하고 손잡이와 검의 날을 따로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 중국 북방과 유라시아 초원 지역의 청동검은 날렵한 검의 날과 손잡이를 함께 만든다.

가미고텐 유적에서 발견된 거푸집에 표현된 동검은 일본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태로 2300~2400년 전 중국 만리장성 근처의 유목민들이 쓰던 초원식 동검과 가장 비슷하다.

만약 동검이 한점 발견되었다면 선물이나 교류의 증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검이 아니라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이 나왔다.

거푸집을 누구에게 선물할 리는 없으니, 중국 북방의 사람들이 건너간 증거가 분명하다.

 

이렇듯 최근 다양한 고고학 발굴을 통해 중국 만리장성 일대의 유목문화와 그 사람들이 머나먼 한반도 남쪽까지 내려온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왜 그 지역의 사람들이 남쪽에 내려왔는지는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전국시대 말기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진나라는 대대적으로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 북방의 초원 유목민족들을 압박했고, 그 결과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또 일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라시아를 뒤흔든 거대한 세력 변동의 영향이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확산된 것이다.

 

 

○민가에서 발견된 문무왕 비석

 

경주 동부동 가정집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 조각. 표면이 반질반질하지만 글자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B%AC%B8%EB%AC%B4%EC%99%95%EB%A6%89%EB%B9%84)

 

신라의 역사에서 북방 초원과의 관계가 다시 등장한 때는 마립간 시기인 4세기부터다.

이때부터 신라는 김씨가 단독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김씨 왕족들은 다른 귀족과는 달리 북방 유라시아의 무덤을 모방한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과 금관, 황금보검, 유리그릇 등 다양한 북방계 유물들을 들여왔다.

신라가 사용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가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북방 초원 지역의 무덤을 참고하고 기술을 받아들여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신라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국력을 키우면서 거대한 무덤과 금관은 사라졌다.

그 대신 묘비명에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라고 적어 대내외에 과시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흉노의 후예로 간주한 대표적인 인물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이다.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거대한 무덤을 만드느라 시간과 용력을 들이지 말고 동해의 대왕암에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삼국을 통일하는 혼란기에 자신의 무덤 때문에 국력이 소모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문무왕의 유지에 따라 거대한 무덤 대신 그의 묘비만 경주의 어딘가에 세웠다.

학자들은 대체로 문무왕의 묘비가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천왕사가 폐사되면서 문무왕의 비석도 사라졌다.

행방이 묘연하던 문무왕의 비석은 조선시대 후기인 1796년에 발견되어 탁본까지 뜰수 있었고 당시 금석학이 매우 발달한 청나라에까지 소개되었다.

하지만 문무왕 비석은 조선이 망하는 와중에 또다시 사라졌다.

1961년 다행히 비석의 일부가 경주 동부동의 민가에서 발견되었고 비석의 나머지 부분도 2009년 동부동의 다른 집 마당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비문의 글자를 읽어내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비석의 표면이 반질반질해 빨래판으로 쓰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문무왕릉비의 비문에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그의 출신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다.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를 중국 서북 지역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귀의한 흉노인인 소호금천少昊金天 씨의 후손인 김일제金日䃅라고 했다.

당시 자신을 흉노의 후예로 자처한 사람은 문무왕만이 아니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 김대문金大問(?~?)이나 당나라로 이주한 신라의 김씨 성을 가진 부인도 묘비에 자신을 흉노의 일파라고 적었다.

이런 전통은 통일신라 내내 이어졌다.

아마도 신라의 왕족 김씨들은 자신을 당연히 흉노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부 학자들은 김일제라는 이름 때문에 신라인의 다수는 흉노의 후예이며 구체적으로 몇천 명의 흉노인들이 신라로 내려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신라인들이 막연하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긴다.

두 가지 견해 다 아직은 추측일 뿐 근거가 부족하다.

앞의 견해는 몇천 명의 흉노인들이 내려왔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고고학 자료나 증거가 없고, 뒤의 견해는 흉노의 후예로 자처하는 자료가 한둘이 아닌데다 매우 일관되게 발견되는 상황이니 막연히 지어냈다고만 보기 어렵다.

 

문무왕릉비에는 신라인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기원을 더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글자도 있다.

'진백秦伯이 그 터를 닦아서 세우니'라는 구절이다.

진백은 진나라 목공穆公으로 진시황의 22대 선조이자 중국 서부의 유목민들을 평정하고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진나라가 있던 중국 서북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황금문화와 쿠르간 문화 Kurgan culture가 중국 북방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지점이었다.

쿠르간 문화란 서기전 4000년 무렵 오늘날의 유럽-러시아 지역과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발흥한 선사시대 유럽의 유목민이자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의 공통조상인 쿠르간이 만든 문화를 말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기마 유목민 문화로 추정되며, 이름 자체는 이 문화 주민들이 만든 분묘를 쿠르간이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북방 초원계의 문화가 중국 서북 지역에서 만리장성 지대를 따라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서융 출신의 유목민이 주를 이룬 진나라는 중국 서북 지역에서 유라시아 유목문화의 발달된 황금과 기마술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켰다.

 

문무왕이 진목공을 선조로 보았다는 것은 흉노 집단을 뭉뚱그려 선조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조상으로 주로 언급되는 김일제는 흉노 중에서도 예전 진나라 영역이었던 중국 서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다.

막연하게 초원의 유목민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국력을 가진 진나라와 그 안에서 활동하던 흉노 계통의 사람들에서 신라의 모습을 찾았던 것이다.

 

 

○신라인이 흉노의 후손이 된 진짜 이유

 

이제 신라인들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왜 자신들을 흉노로 자처했는지에 대한 답을 할 차례다.

그 배경에는 신라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가 숨어 있다.

삼국시대 신라를 둘러싼 백제, 고구려 그리고 북방의 부여와 북부여는 왕족들이 모두 부여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갈라져나와 나라를 건국했다.

백제 역시 비류와 온조 시절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모두 부여씨였다.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신라도 국력을 강화하면서 부여계와는 다른 그들만의 선민의식이 필요했다.

이제 진한 시기부터 이어져왔던 북방과의 교류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신라가 흉노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은 흉노의 영향을 받은 유목민들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세력을 키웠다.

중국의 북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위진남북조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앞다투어 발흥하고 전쟁을 벌이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특히 랴오닝(요령辽宁/遼寧) 지역에서 발흥한 모용선비 집단은 고구려와 맞서는 과정에서 강력한 기마술과 무기로 한반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신라와 가야의 무기와 말갖춤(마구馬具)이 모용선비 계통이라는 것은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이렇듯 신라가 흉노의 후례를 자처한 것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었던 북방 지역과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들의 무기와 기술을 받아들여 다른 삼국과 맞서겠다는 속뜻이 숨어 있다.

 

신라가 북방의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흉노임을 내세운 사실을 21세기의 관점으로 비하하거나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진한 시절 만리장성 지대에서 내려온 유민이 신라인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니 극단적 전파론의 관점에서 기마민족이 남하해서 신라 정권을 탈취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반대로 한반도는 물론 북방 유라시아의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흉노 같은 초원의 유목문화는 신라와 지역적으로 너무 먼데 설마 관계가 있을까 의심하는 좁은 시야도 버려야 한다.

당시 흉노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종의 롤모델 같은 강국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흉노와의 관련을 강조하고 국력을 키운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후발 주자임에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에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빠르게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다.

몇몇 증거를 혈통의 흐름으로 해석하고 현대의 편견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신라의 입장과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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