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5. 화가 촌평2: 석파 대원군 이하응, 고람 전기, 혜산 유숙, 형당 유재소, 향수 정학교, 석창 홍세섭 본문

글과 그림

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5. 화가 촌평2: 석파 대원군 이하응, 고람 전기, 혜산 유숙, 형당 유재소, 향수 정학교, 석창 홍세섭

새샘 2023. 11. 12. 21:46

이하응, 난초대련 부분, 종이에 수묵, 92.3x27.5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파石坡, 곧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많은 감상가들을 골탕 먹이는 분입니다.

대원군의 난초 즉 석파란石坡蘭은 그 진부眞否(진짜와 가짜)를 가리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기준작의 문제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석파는 본래 춘란春蘭(2~4월 봄에 꽃 피는 난, 보춘화報春花, 학명 Cymbidium goerngii: 중국 춘란을 으뜸으로 치며, 한국 춘란은 한반도 남부, ,다도해, 제주도, 울릉도 등에 자생)으로 유명했고, 다음에 나오는 운미芸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건란建蘭[7~9월 여름에 꽃 피는 하란夏蘭이나 9~10월 가을에 꽃 피는 추란秋蘭, 학명 Cymbidium ensifolium: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푸젠성)에 자생하여 붙은 이름]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석파는 불우할 때 난초를 많이 그렸다고 하는데 초기 것으로 확실한 것을 보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석파는 대원군이 된 후에는 사랑에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1855~1921)을 대령시켜 놓고 대필을 시키고 낙관만 자기가 넣은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낙관이 맞는다고 해서 석파란이라고 단정키 어렵습니다.

 

내 경우는 대원군 난초의 기준으로 해방 직후 전시에 몇 번 나온 소치 허련에게 준 횡파橫坡의 난초, 윤씨 집안에 시집온 운현궁 손녀가 가져온 머리병풍의 난초—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름— 그리고 고 민태식 선생이 한쪽 가지고 있었고, 또 한쪽은 이번 전시에 나온 중국 조정에 잡혀가기 1년 전의 위 그림 <난초대련蘭草對聯>입니다.

이 석파란은 보듯이 필력이 대단하고, 기상이 살아서 뻗고 있는 듯 합니다.

일찍이 추사는 석파의 난초는 압록강 동쪽에서는 제일이라고 평을 하였습니다.

아마 귀인에 대한 대우도 가미된 것 같습니다만 범수凡手(평범한 재주나 기술)가 아닌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일본 세력이 들어오면서 귀인의 것이라고 해서 무수한 일본인들이 석파의 난초를 청했는데 거절도 어려워서 그려주었겠지만 대부분은 대필물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필로 유명한 중국 명나라 동기창董其昌(1555~1636)의 서화처럼 대원군의 난초는 그 대부분이 대필이 아니면 방작倣作(원작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자기만의 독창성으로 재해석한 작품)도 많은 편이라 극히 조심해야 됩니다.

 

 

전기, 계산포무도, 1849년, 비단에 수묵, 24.5x41.5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고람古藍전기田琦(1825~1854)가 천재라는 세평世을 듣는 것은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이유도 있지만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같은 그림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이 그림은 무심無心이 담겨져 있는 고담枯淡(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의 극치라고 할까.

편봉偏鋒(측봉側鋒, 옆붓: 획의 한쪽 가장자리로 붓끝이 쏠림), 거꿀붓(역봉逆鋒: 정형화된 붓 쓰는 방향과 반대 방향), 그리고 담묵淡墨(엷은먹), 갈필渴筆(마른 붓)손이 가는대로 신운神韻(고상하고 신비스러운 운치)이 도는 대로 맡겨서 도저히 스물다섯살의 젊은이의 마음가짐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림의 구도나 평원은 잔통산수의 흔한 것입니다만 이 그림은 심의心意(마음과 뜻)를 보는 그림으로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일맥 통할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흉내내면 벌써 잡념이 들어가서 품격이 그만 떨어지고 맙니다.

나이를 초월하고, 그림 그린다는 마음을 초월한 작품이죠.

고람의 전통적인 필치로 얌전한 것으로는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가 있고, 나머지는 중국 그림을 임모臨摸(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거나 방倣한(그림, 글씨 따위의 본을 뜨다) 느낌을 줍니다.

 

 

유숙, 세검정도, 종이에 담채, 26.1x58.2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혜산蕙山 유숙劉淑(1857~1873)은 평범한 화원이죠.

큰 실수가 적은 대신 개성이 약하고, 사경寫景(풍경화) 이를테면 <세검정도洗劍亭圖> 같은 그림은 온건한 사경이지만 새 기법도 아니오 시각의 개성도 뛰어난게 없습니다.

 

 

형당蘅堂 유재소劉在韶(1829~1911)는 추사가 좋아할 만한 점잖은 문인화를 그렸는데 선비풍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길고 늘어지는 필선을 쓰지 않습니다.

 

 

정학교, 송무석수, 비단에 담채, 30.0x41.5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향수香壽(또는 몽인夢人) 정학교學敎(1832~1914)은 한말에 괴석怪石으로 유명한 분인데 설채設彩(색칠: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함)한 것은 대개 만년의 것입니다.

초기에는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온 청나라 주소백周少伯의 괴석 맛이 있었다가 늙어갈수록 변해 갔습니다.

이 분은 오원 장승업 그림에도 화제와 낙관을 대신해주고, 화가로서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우향又香 정대유丁大有(1852~1927)로서 서화미술화의 서도 선생이기도 했는데, 부친을 이어 장승업의 만년 그림에  대신 화제, 낙관을 해주 예가 많습니다.

위 그림 <송무석수松茂石壽>는 비교적 얌전히 그린 만년작으로서 '소나무처럼 무성하게 바위처럼 오래오래 사시기를'이란 제목으로 축수祝壽의 뜻을 뚜렷하게 밝혀 놓은 길상화吉祥畵(행복을 빌며 출세를 염원하고 장수를 소망하는 그림)입니다.

 

 

홍세섭, 유압도, 8곡병 중, 비단에 수묵, 119.5x47.8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창石窓 홍세섭洪世燮(1832~1884)은 지체가 있는 사람인데, 그림은 그 시각이 독특합니다.

여기 나온 <유압도遊鴨圖>라는 그림도 화기畵技(그리는 기술)보다는 부감俯瞰(높은 곳에서 내려다봄)의 시각이 눈에 띕니다.

다른 그림도 기량이 따르지는 못해도 그 시각과 처리가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죠.

하여간 북산 김수철은 말할 것도 없고, 홍세섭의 많지 않은 그림에는 어떤 시대의 변화가 느껴지는 면도 있습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일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3. 11. 1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