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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를 튼 고조선 사람들

새샘 2023. 10. 25. 21:04

원시시대의 모습을 묘사한 두 그림에서 고대를 보는 상반된 시선이 잘 드러난다. (위)15세기 전반 프랑스에서 출간된 'Wonder of the World'에서 실린 작자미상의 삽화와 (아래)19세기에 그려진 벤첼 페터 Wenzel Peter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사진 출처-출처자료1)

 
우리는 역사책이나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 조상이나 고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한다.
이런 모습들은 대체로 빈약한 자료에 상상을 더해 묘사한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 모습은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세계사의 첫 쪽을 펴면 원숭이와 비슷한 털복숭이 모습을 하고 손에 돌도끼를 든 유인원을 만날 것이다.
반면 자기 나라의 역사나 신화의 첫 쪽을 펴면 원시인 대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이나 산신령 또는 제우스 같은 성스러운 모습이 등장한다.
똑같은 원시시대의 조상이 이렇게 정반대로 그려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고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은 신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은 괴수나 짐승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고조선시대라면 산신령 같은 모습의 단군과 그 옆에 자리한 호랑이와 곰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조선은 이미 국가로 진입한 단계였고, 청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원시적인 모습까지 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단군이나 고조선과 관련된 이미지는 근대인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상상도일 뿐이다.
 
진짜 고조선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고고학이 전하는 우리 조상의 모습은 기대와 달리 실제로는 너무나 평범하다.

어쩌면 당연하다.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만든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상투를 튼 머리에 오랑캐의 옷을 입고

 
고조선인의 생김새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사기≫ 「조선열전」에 있다.
한나라 제후 노관盧綰(서기전 256~서기전 194)이 흉노로 투항할 무렵 그와 함께 연나라에 있었던 위만衛滿(서기전 3세기~서기전 2세기)이 고조선으로 투항할 때의 기록으로, 위만이 상투를 튼 머리에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고 사마천은 기록했다.
노관은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한고조의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난 죽마고우였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한자성어 그대로 한나라를 통일한 한고조는 가신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노관도 흉노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 있었던 위만은 '상투를 튼 머리에 오랑캐의 옷을 입고' 고조선으로 귀순해 장군이 되었다.
이후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규합한 위만은 쿠데타를 일으키켜 고조선의 왕이 된다.
바로 위만조선이다. [윤내현 교수는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부변경인 난하 하류 지역에 있던 고조선 거수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뒤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위만조선의 왕이라고 주장한다.]
 
연나라에서 활동하다가 위만조선의 왕이 된 위만의 경력 때문에 그의 국적을 두고 한동안 중국설과 고조선설이 대립했다.
물론 당시는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망하고 초와 한으로 분열하여 서로 다투던 시점이니 '중국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래서 사마천도 위만을 '본래 연나라에서 활동한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중국에서도 가장 동북쪽의 변두리에 위치한 제후국인 연나라는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살았다.
심지어 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인 사카족 Saka의 얼굴을 한 유물도 있었으니 위만이 혈연적으로 중국인이니 한국인이니 하는 전제 자체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위만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가 굳이 상투머리를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는 구절이다.

문맥상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은 고조선의 풍습을 따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므로 위만은 원래 고조선 지역 출신이거나 고조선의 문화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분명하다.

위만이 모시던 노관이 흉노에게 갔음에도 그쪽을 따라가지 않고 일부러 고조선으로 온 점, 그리고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이 오자마자 크게 환영하며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는 점도 위만이 고조선 지역 출신이라고 가정하면 쉽게 수긍이 간다.
일부 학자들은 상투머리가 중국 서남 지역인 윈난(운남雲南)의 풍습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지역 국가인 뎬국 Dian Kingdom 유적에서 상투머리를 한 사람이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연나라 장수를 역임한 위만이 고조선에 오면서 엉뚱하게 윈난 지역의 상투머리와 복장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위만의 복장과 머리를 증명할 수 있는 고조선 얼굴에 대한 실물 자료가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추측만 난무하던 차에 드디어 상투머리를 튼 고조선 얼굴이 등장했다.
 
 

○청동기를 만들던 기술자의 초상화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타완촌에서 발견된 인물이 새겨진 청동 도끼의 거푸집. 상투를 튼 이 두 인물은 고조선의 청동기 기술자의 얼굴이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1990년 고조선과 고인돌의 중심지였던 중국 랴오닝(요령辽宁/遼寧)성 랴오양(요양辽阳/遼陽)시 타완(탑만塔灣)촌에서 농민이 밭을 갈던 중에 파괴된 옛 무덤을 발견했다.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청동기와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이 나왔다.
화려한 청동기가 아니라 활석으로 만든 보잘것없는 거푸집이 무슨 큰 발견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거푸집은 청동기 몇점이 나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덤에서 거푸집이 나왔다는 것은 그 무덤의 주인이 청동제련술을 독점했던 신분이 높은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완촌말고도 고조선과 한반도의 세형동검을 사용한 삼한 지역의 옛 무덤에서도 거푸집이 자주 발견된다.
청동제련술은 당시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요소였다.
전쟁을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청동기가 필요했고, 청동기 공급은 전적으로 청동기 기술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청동기 기술자는 최고 계급 중 하나였으며 그들이 가진 기술 덕분에 강력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국가가 등장하는 시기를 '청동기시대'라고 명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타완촌에서 출토된 손바닥 남짓한 크기의 작은 도끼 거푸집에는 이제까지 발견된 거푸집과 달리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거푸집의 뒷면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상투를 튼 두 명의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

얼굴 형태를 보면 머리카락을 말아올려 상투를 틀었고 광대뼈는 튀어나왔으며 코는 낮고 눈은 작다.
표현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군 초상화처럼 뭔가 근사한 모습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거푸집에 새겨진 고조선의 인물상은 예사롭지 않다.
돌로 만든 거푸집에 도드라지게 얼굴을 새겼다.
즉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주변을 다 파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했다는 말이다.
기존의 거푸집을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두꺼운 거푸집을 새로 제작해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거푸집에 새겨진 얼굴은 그들의 조상이나 신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살아생전에 청동을 주조하던 사람들이 의식에 사용하고 그 주인공이 죽자 함께 무덤에 묻은 것이다.
 
타완촌 유적과 멀지 않은 선양(심양瀋陽)시에는 대표적인 고조선의 귀족 무덤인 정자와쯔(정가와자鄭家窪子) 유적이 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여러 청동기 유물이 타완촌 유물과 거의 똑같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이다.
이에 비추어 학자들은 타완촌 유적의 연대를 대체로 약 2500년 전으로 본다.

고조선이 세력을 키워가던 서기전 6세기 사람들의 생생한 얼굴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강인욱)는 2014년 한 학술대회에서 타완촌의 유물을 분석하고 이 거푸집을 고조선의 얼굴로 소개했다.
타완촌 유물은 중국 고고학계에서 정식으로 보고한 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1990년대에 발견되었지만 랴오양 박물관에서 보관했을 뿐 따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시절 동북 지역 은행의 저택을 개조하여 만든 랴오양 박물관은 작고 좁았다.
나는 2005년부터 몇 차례나 랴오양 박물관을 방문했지만 이 유물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유물 창고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09년 랴오양 박물관이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하면서, 20년 가까이 숨어 있던 타완촌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막을 몰랐던 나는 2010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신축한 랴오양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고조선 유물들이 진열된 전시실의 한 귀퉁이에서 고조선인의 얼굴이 새겨진 청동기 거푸집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짜릿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로 지은 랴오양 박물관의 전시실 입구에는 연나라 장수 진개의 거대한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개는 이 지역이 중국의 영역에 편입되는 계기가 된 연나라와 고조선 전쟁의 주역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소개하기 전까지 이 유물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타완촌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은 네이멍구(내몽골자치구内蒙古自治) 츠펑(적봉赤峰)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인 샤자뎬상층문화(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에서도 발견된다.
츠펑 지역은 전통적으로 초원의 청동기가 동아시아로 들어와 전해진 교차로로 꼽힌다.
고조선 역시 츠펑 지역을 통해 당시 첨단 기술이었던 유라시아의 청동제련술을 받아들였다.
고조선은 청동제련술을 받아들인 후 비파형동검과 번개무늬거울(뇌문경雷紋鏡) 등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청동 기술자들은 고조선의 기술 엘리트로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기술로 당시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했고, 자신들의 모습을 타완촌의 거푸집에 남겼다.
이들은 청동 무기를 소지한 전사 집단, 그리고 청동 거울로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과 함께 고조선의 최상위 계급이었다.

상투머리를 한 사람들은 고조선의 상위 또는 귀족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상투머리, 부여로 이어지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상투를 튼 사람의 모습은 고조선의 뒤를 이어 쑹화강(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나라를 건국한 부여인의 얼굴에서도 보인다.
홍콩중문대학의 김민구 교수는 부여의 수도였던 지린(길림吉林)성 지린시의 마오얼(모아/帽兒)산과 둥퇀(동단東團)산에서 출토된 인면상을 부여인의 얼굴이라고 밝혀낸 바 있다.
마오얼산과 둥퇀산의 인면상은 이빨을 드러낸 다소 험악한 모습이지만, 머리에 상투를 튼 형태나 얼굴의 이목구비를 보면 타완촌에서 발견된 고조선인의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험상궂고 무서운 얼굴인 것은 아마도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한 벽사辟邪의 의미인 것 같다.
 
고조선의 청동제련술은 남쪽으로 전해져 남한에서도 제사용 청동기들이 종종 발견된다.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와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예전리 등의 청동기 유적들에서는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는 동검들이 한데 묶여서 발견된 적이 있다.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묻은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상투머리를 한 고조선의 청동 기술자는 고조선은 물론 주변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주던, 당시 사회를 선도하던 테크노크라트 technocrat(과학적·전문적 지식이나 능력을 가지고 어떤 조직이나 사회의 의사 결정과 관리·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였던 셈이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아리안족의 등장을 묘사한 100년 전 그림. 아리안족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한 신화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타완촌에서 시작해 부여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특징은 바로 고조선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귀순할 때 상투를 틀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바로 그러한 고조선의 전통적인 모습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조상에 관심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멋지고 우월한 이상형의 모습으로 표현하곤 한다.
자기들의 소망을 조상에 투영하는 것이다.
외모에 대한 집착은 20세기에 절정을 이뤄 키, 외모, 머리 색깔로 인종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심지어 죄 없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조상에 대한 신화적인 이미지는 근대 이후 여러 나라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흔히 쓰던 이미지 메이킹 image making 중 하나였다.
한국도 우리의 조상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표현해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돌이켜봐야 한다.
 

고고학은 언제나 조상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명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가장 큰 관건은 외모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었다.
타완촌에서 발견된 소박해 보이는 고조선의 얼굴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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