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대 중국인을 매혹시킨 고조선의 모피 본문
인간의 동물 가죽에 대한 욕망은 고대의 역사를 이끌었다.
모피는 온대와 한대 사이의 교역을 이어주는 세계사의 커다란 축이다.
고조선은 역사 기록이 소략하여 그 실체와 영역에 대한 논쟁, 그리고 중국과의 역사분쟁의 대상으로 소비되기 일쑤다.
그렇기에 고조선에 대한 몇 줄의 기록이 모피 무역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고조선은 모피의 공급을 통제하고 조정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와 겨루었다.
고조선이 모피로 중국과 교역을 했다는 것은 고조선의 경제활동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모피는 고조선의 역사를 세계 문명사적 보편성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연결고리다.
○조선의 모피는 천금처럼 귀하니
고조선이 중국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관중의 이야기를 담은『관자管子 』이다.
『관자』「소광」「경중갑」「구도」등에는 관중이 제나라 환공과 부국강병 대책을 논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나라가 있던 오늘날의 산둥반도 지역은 지금이야 아주 번성한 중국의 일부지만, 관중이 살던 당시에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변두리 지역으로 취급되었다.
제나라의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관중은 제환공에게 다양한 지역과 교역을 하라는 계책을 내놓는다.
관중은 '조선의 모피는 천금처럼 귀하니 이것을 비싼 값에 수입하면 조선도 스스로 제나라에 머리를 조아일 것입니다'라며 고조선의 얼룩무늬 모피를 수입할 것을 건의했다.
『관자』의 곳곳에서 관중은 제환공에게 '제후들에게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하사하라'고 조언한다.
이 기록은 춘추시대에 고조선이 모피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원거리 교역을 하며 성장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모피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호랑이 가죽이 상당히 귀했기 때문에 천자나 임금이 자신의 위세를 떨치는 데 사용했다.
동아시아에서 호랑이가 서식하는 곳은 주로 인도 근처와 만주 일대이다.
표범은 알타이산맥 지대에 많이 살지만, 관중이 활동하던 시대의 중국은 아직 알타이 지역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모피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백두산 일대뿐이다.
중국의 다른 제후국들은 지리적으로 고조선과 멀어 모피를 직접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관중이 산둥반도에 위치한 제나라가 고조선과 해상무역을 해 고조선의 모피를 독점하면 다른 제후국들을 관리할 수 있다는 묘안을 내놓은 것이다.
물론 『관자』는 실제 관중이 쓴 것이 아니고, 그가 죽은 뒤 전국시대에서 한나라에 걸쳐 쓰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대한 책을 21세기에 쓴다고 해서 잠수함 같은 요즘의 무기라 등장할 리 없듯 그 내용 자체는 관중 시절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었을 것이다.
몇 줄 안되는 구절이지만, 이 이야기는 고조선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어 그 울림이 크다.
첫째로 제환공이 살던 서기전 7세기에 고조선은 중국의 제후국들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막연하게 바다 건너 어딘가에 있다는 식의 상상이 아닌, 고조선의 특산품이 무엇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둘째로 고조선의 특산품인 모피는 단순히 먼 나라에서 온 진기한 물건이 아니라 제후들을 다스릴 수 있는 고급 명품으로 기능했다.
도대체 고조선의 모피가 무엇이기에 춘추시대 제후들을 굴복시키는 도구가 된단 말인가.
그 배경에는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이어진 모피에 대한 애착이 있다.
○세계사를 뒤흔든 명품
구석기시대 이래로 동물은 인간에게 식량 또는 반려동물 그 이상의 의미였다.
동물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힘과 아름다움을 상징했다.
자신들을 자연스럽게 동물에 빗대고 동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totemism이 발달했으며, 동물을 모티브로 하는 다양한 장식은 초원을 대표하는 예술이 되었다.
샤먼 shaman은 동물의 가죽을 두름으로써 그 동물의 힘을 얻고 초월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1만 5000년 전 프랑스의 트루아 프레르 Les Trois Frères 동굴벽화에는 사람처럼 생긴 사슴 그림이 있다.
사슴의 가죽과 뿔을 뒤집어 쓴 샤먼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동물 가죽을 탐하는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피 사랑은 고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와 현대로 올수록 모피에 대한 욕망은 더 커졌고, 때로는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벌이다.
1581년 처음으로 우랄산맥 Ural Mountains을 넘어서 시베리아로 진출한 러시아인들은 68년 후인 1649년에 미국의 알래스카와 마주한 추코트카 반도 Chukotka Peninsula에 정착한다.
거의 맨손에 가까운 러시아 코사크인(카자흐인) Cossacks들이 무엇에 홀린 듯 추운 지역으로 달려간 이유는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모피에 홀리기는 신대륙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코사크인들이 시베리아로 진출할 무렵 프랑스인들은 캐나다 일대에서 모피 무역을 시작했고, 이는 오늘날의 캐나다가 만들어지는 근간이 되었다.
모피는 당시 소빙기小氷期 little ice age(빙하기까지는 아니지만 전세계적으로 매우 추운 기간이 몇백 년 동안 지속된 시기, 대체로 16~19세기에 해당함)였던 유럽에서 아주 값비싼 거래품이었다.
한국사를 돌아보아도 고려와 조선 시대에 여진과의 주요 교역품 중 하나가 모피였으니 모피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세계사를 움직여온 명품이라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난방시설이 미비했던 고대사회에서 모피와 짐승 가죽은 사람들이 선호했던 방한복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피는 단순히 방한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짐승 가죽과는 좀 다르다.
고급 모피코트가 가진 시각적인 강렬함과 특유의 감촉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하다.
모피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방한의 용도를 넘어 높은 신분과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기에 모피는 때로 목숨을 걸 정도로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주요 모피동물인 담비, 삵, 스라소니, 표범 등은 대부분 먹이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위치하는 위험한 육식동물로, 주로 인적이 아주 드문 한대의 산속에서만 산다.
그럼에도 모피를 얻기 위해 북극해나 시베리아 탐험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거는 것마저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만큼 모피를 사려는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값비싼 명품 모피를 사들이는 쪽은 주로 온대 지역에 발달한 도시와 나라들이었다.
그러므로 모피 교역은 필연적으로 문명지대와 인적이 아주 드문 지역 간의 원거리 교역일 수밖에 없다.
동물을 잡아 조심스럽게 가죽을 가공해 상품화하고, 그 상품을 교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명과 미지의 땅의 교류가 일어났고, 그 흔적이 고조선을 실증하는 주요 도구가 되었다.
모피는 세계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물건이지만, 정작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피처럼 썩기 쉬운 유기물질은 발굴에서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적 같은 자료가 나왔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알타이 Altai 우코크 Ukok 고원에서 2400년 유목민들이 남긴 모피코트 두벌이 완벽한 상태로 발굴된 것이다.
당장 입어도 될 정도로 털이 한올 한올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피코트였다.
이렇게 완벽한 모피코트가 발견될 수 있었던 건 알타이의 환경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북위 49도밖에 되지 않지만 추운 고원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어 북극권에 주로 보이는 영구동결대가 남아 있다.
당시 유목민들은 이 영구동결대의 얼음을 파서 무덤을 만들었고, 무덤방의 사람은 얼음 속에 갇혀 발굴되기 전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 덕분에 시신이 입고 있던 모피 또한 손상되지 않았다.
알타이의 모피코트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술 장식이 달려있는데 관자가 말한 고조선의 얼룩무늬 모피와 비슷하다.
○명도전 항아리와 철제 농기구
알타이 파지리크 Pazyryk 고분의 모피코트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다.
고조선 지역에서는 모피의 실물이 나온 적이 없다.
대신 유적에서 발굴된 동물의 뼈로 모피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랴오닝(요령辽宁/遼寧)에서 한반도 서북한 일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고 본다.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정문경精文鏡) 유물이 나오는 지역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평야와 낮은 산맥들로 이어져 있어 모피동물들이 살만한 곳이 별로 없다.
모피동물은 인적이 드문 춥고 험한 산악지역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지금도 백두산 일대와 만주 일대가 모피 산지다.
고조선시대에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 사람들은 중국과 모피사냥꾼들 사이에서 교역을 돕는 일종의 중간 매개자 역할을 했다는 뜻이 된다.
실제 모피는 없지만 모피와 바꾸었던 물건들을 찾는다면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고조선인들이 백두산 일대의 모피사냥꾼과 교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있다.
압록강과 청천강 유역의 산간 오지에서 명도전明刀錢이 가득 담긴 항아리와 철제 농기구가 다수 발견되었다.
명도전은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이기는 하지만 연나라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도 널리 쓰였다.
처음도 자강도 일대의 산간 오지에서 명도전 항아리가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학자들은 전쟁 같은 긴급 상황에 급하게 묻어놓고 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40여 개가 발견되었다.
항아리가 발견되는 지점들도 예사롭지 않았는데 대부분 산속으로 들어가는 고불고불한 길 근처였다.
이 유적들은 북한에 있어 직접 조사할 수는 없다.
대신 일제강점기에 평안북도 위원군渭源郡 용연동龍淵洞에서 이 명도전 항아리를 조사한 일본인 고이즈미 아키오(소천현부小泉顯夫)의 수기를 참고해보자.
고이즈미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은 산을 따라 이어진 작은 비탈길이 유일한 통로였는데, 얼마나 산세가 험한지 마차나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명도전 항아리가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에는 위원 용연동 유적의 유물과 함께 발견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밖에 다른 40여 개의 평안북도 명도전 항아리도 다 비슷하게 산간 오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넓히다가 뜬금없이 발견되었다.
이 정도면 결코 우연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명도전과 함께 발견된 철제 농기구도 주요한 단서가 된다.
험한 산골일수록 밭을 깊게 갈아야 하기 때문에 철제 농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 여진족이 가장 선호했던 필수 교역품 역시 철제 농기구였다.
산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돈만큼이나 중요했을 테니 물물교환으로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왜 돈 항아리를 길가에 두었을까.
이것은 모피 무역의 특징이다.
중국 기록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담비 가죽을 교역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담비굴 앞에 칼을 두고 가면 담비와 같이 사는 '괴물'이 그 칼을 가져가고 대신 담비 가죽을 두고 간다고 한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교환하는 일종의 블라인드 무역이다.
길가에 항아리를 두고 가면 다른 시간대에 모피사냥꾼이 와서 모피를 두고 항아리를 가져가는 식이다.
또는 모피동물은 겨울에만 사냥하기 때문에 모피 교역도 주로 추운 겨울에 이루어진다.
추운 산간지대에서 모피 무역 시즌이 끝나면 상인들은 무거운 돈과 농기구는 이듬해 거래에 사용하기 위해 땅에 숨겨두고 황금만큼이나 귀한 모피만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명도전이 연나라의 화폐라는 이유를 들어 이 지역이 연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러가 발견된다고 모두 미국 땅이 아니듯, 명도전이 나왔다고 연나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지역이 연나라의 영토라면 명도전 이외에 연나라의 성터나 무덤 등 다른 유적이 있어야 마땅하다.
모피 교역 길에서 발견된 항아리에는 주도 명도전이 나오지만, 명도전과 그다음 시대인 한나라의 화폐가 같이 나온 경우도 드물지 않다.
고조선이 자체적으로 화폐를 만들지 않고 대신 중국 화폐를 들여와 모피 무역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모피는 제나라를 포함한 중국 전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었던 것 같다.
『관자』에는 단지 고조선의 모피를 사와야 한다고만 되어 있지 실제 사왔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실제 모피를 들여와서 널리 인기를 얻었다는 증거가 있다.
한나라 때 편찬된 일종의 사전인『이아爾雅』에는 엉뚱하게 얼룩무늬 모피의 산지가 '척산斥山'이라고 되어 있다.
척산은 산둥반도의 바다에 위치한 항구다.
바닷가에서 모피가 나올 리가 없으니, 제나라에서 고조선의 모피를 받아 집결한 항구가 산둥반도의 척산이었음을 의미한다.
모피가 척산에 집결하고 척사에서 사방으로 팔려나갔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척사을 모피의 산지로 착각한 것이다.
실제로 모피가 산둥반도에서 오랫동안 거래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지금도 산둥반도는 근대 이후 화교들이 들어오고 한국과 가장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무역이 몇 천년 동안 이어진 셈이다.
○지금도 이어지는 모피 사랑
화려한 호피로 세상을 호령하던 전통은 고조선 이후 우리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왔다.
한국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됐던 명성황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피 카펫이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시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호랑이 특유의 얼룩무늬가 박혀 있는 호화로운 카페시 주었을 위엄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
구한말 조선의 국운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다.
이 모피의 주인은 일본 낭인의 칼에 살해당했으니, 모피는 그 화려함만큼이나 당시의 꺼져가는 국운을 상징하는 듯도 하다.
명성황후의 모피 카펫을 둘러싼 우여곡절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와중에 누군가가 미군에게 판매해 이 호피(이후 표범 가죽으로 밝혀짐) 카펫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과정에서 궁중의 유물임을 알게 된 한국 뉴욕영사관 측의 항의로 1951년 곧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모피 카펫의 행방이 묘연해 한동안 수많은 추측이 쏟아졌다.
이를 찾기 위해 문화재 환수운동까지 벌인 뒤에야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6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이관받은 뒤 그대로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20세기 초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모피가 중산층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떠올랐고, 1930년대 미국에서 가장 추운 지역인 미네소타를 중심으로 모피코트가 크게 유행했다.
소설가 맥스 슐먼 Max Schulman은「사랑은 오류 Love is a fallcy」라는 단편에서 너구리코트를 두고 벌어지는 남녀 대학생의 아이러니한 사랑을 다뤘다.
당시 유행한 너구리코트는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신 코트로 가격이 비싼 것은 물론이고 상당히 무거운데다가 조금만 잘못 관리해도 악취가 심하게 나는, 결코 실용적이지 못한 옷이었다.
하지만 전신을 감싸는 가장 확실한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젊은 백인들은 주류에 끼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 너구리코트를 걸쳤다.
영화「마약왕」(2017)에서 홀로 남아 경찰에 쫓기던 이두삼(송강호 분)이 마지막에 맨살 속옷 차림에 모피코트만 입고 있던 장면은 모피의 의미를 잘 상징한다.
모피는 세계사를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또다른 황금이었다.
몇 천년 동안 사람들은 모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왔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모피가 바로 고조선의 특산품이었다는 점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우리가 간과했던 사실을 증명한다.
바로 세계 문명사의 보편성 속에서 고조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고조선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논쟁이 국가 간에, 때로는 우리 안에서 있어왔다.
이제 그런 논쟁을 멈추고 중국 대륙으로 널리 알려진 고조선의 모피를 통해 그 역사의 보편성에 주목하는 것이 어떨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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