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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4. 19세기 후반의 일본화와 일제강점기 한국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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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4. 19세기 후반의 일본화와 일제강점기 한국화

새샘 2023. 9. 21. 20:33

출처자료1의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의 안쪽 표지(사진 출처-영풍문고http://www.ypbooks.co.kr/book.yp?bookcd=100849358)

 

일본도 메이지유신 후 서양문물이 들어올 때까지 그림의 주류는 이른바 '남화南畵'라는 전통산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본시 일본에는 서양화의 맥락이 가냘프게나마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장기長崎)에 와 있던 네델란드 교역선을 통해서 들어온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마치 중국에 들어온 낭세령郎世寧(1688~1768) 같은 사람의 서양화풍이 큰 영향을 못 주듯이 일본에서도 '남화'의 주류를 꺾을 수가 없었죠.

물론 이 밖에 사생寫生의 전통과 더불어 '우키요에(부세회浮世繪)'(에도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유행한 판화)라는 시정市井(인가가 모인 곳)의 풍속화 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주류는 '남화'라는 전통 문인화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세력이 밀리면서 졸지에 흔들립니다.

메이지시대는 한 40여 년 가량 지속되는데 처음 20년은 흔들리면서도 전통 문인화가 겨우 유지되었습니다.

일본 무로마치(실정室町) 막부시대(1336~1573)까지 올라가는 전통 그림, 특히 산수화는 그 뿌리가 견고했죠.

그때는 일본이 조선의 그림 영향을 상당히 받았습니다.

더구나 막부시대에는 조선에서 가는 통신사와 따라가 화원을 통해서 제법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러한 남화 전통이 메이지시대 전반에 흔들립니다.

그런데 일본인은 아시다시피 적응력이 뛰어나죠.

그러나 한편으론 국수적인 전통도 강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화를 한다고 종이에 유회구油繪具(유화를 그리는 데에 쓰는 캔버스, 물감, 붓, 기름 따위의 기구)를 바르기도 하고, 부지런히 서양유학도 가서 유명한 구로다 세이키(흑전청휘黑田淸輝) 같은 사람은 1890년대 초에 이미 서양에서 돌아와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이런 것이 적응에 속하는 것이죠.

하지만 서양화에 대한 국수적 반발과 활동이 일어납니다.

아시다시피 이탈리아계의 미국인 페놀로사 Fenollosa가 1878년 일본에 들어오는데 이 사람은 나라(나량奈良)의 호류지(법융사法隆寺)에 있는 백제관음의 아름다움을 처음 강조한 사람이죠.

이 사람은 감상력이 예민해서 전통적인 일본미술에 심취하게 되고, 오카쿠라 덴신(강창천심岡倉天心) 같은 사람과 손을 잡고 일본미술 운동의 앞장을 섭니다.

일본미술의 외국인 대변자가 된 셈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생긴 도쿄미술학교에 대항해서 일본미술원이 생기고 국가기관에서 여는 이른바 문전文展에 대항해서 원전院展이라는 전시회가 열립니다.

일본화 운동의 맥은 가노 호가이(수야방애狩野芳崖)(1828~1888), 하시모토 가호(교본아방橋本雅邦)(1835~1908), 히시다 슌소(능전춘초菱田春草)(1874~1911), 요코야마 다이칸(횡산대관橫山大觀)(1868~1958) 같은 사람들로 이어지며넛 퍼진 것이죠.

이들 가운데는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직접 가서 전통화와 서양화의 미감을 연구해 오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제가 조선을 강점했을 때는 이미 '일본화' 운동은 일단락이 되어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일본화'는 먼저 전통그림과 서양그림의 절충 같은 면이 있었습니다.

그림의 주제 선택에 있어 전통적 이념형을 버리고 서양화의 사실주의, 나중에는 초기인상파의 주제를 섭취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관념적 주제에서 감각적인 주제로 옮겨졌죠.

따라서 '산수'는 '풍경'이 되고, 도석인물道釋人物(동양화에 나타나는 여러 신선, 부처, 고승 따위의 인물)은 구태를 버리고 자유스런 표현으로 탈바꿈하고, '사녀도仕女圖'(중국풍 궁중 복식의 여인을 그린 그림)는 '미인도' 등으로 변합니다.

자연히 기법에도 큰 변화가 오고, 일본인의 취향에 따라 세선細線(가는 줄)과 설채設彩(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함)를 많이 하고 음영, 원근을 도드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이던 시서화詩書畵 일의 붓놀림이라는 것 중에 서(붓)가 분리됩니다.

회화 개념의 차이에 따라 기법도 달라진 것이죠.

물론 전통파도 있고 그 가운데 도미오카 뎃사이(부강철재富岡鐵齋)(1837~1924) 같은 대가도 나오게 된다.

 

그러면 일제강점기로 들어간 1905~1910년 무렵의 한국은 어땠을까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 당시 서화미술회가 탄생되었는데 후원은 이왕직李王職(일제 강점기의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다 이완용, 이기용, 민씨집안의 대감들이었습니다.

물론 정치보다 미술에 눈을 돌리라는 일제의 정책과 연관이 있죠.

그리고 그림 선생은 조선왕조 최후의 화원이던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 그리고 화원격이던 심전心田안중식安中植(1861~1919) 같은 분이죠.

그 가운데 안중식은 전시장이 보이는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영광풍경도靈光風景圖> 같은 이른바 풍경화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에게 ≪고씨화보≫를 주고 공부하라고 하신 분이니 근본을 알 수 있죠.

안중식의 풍경화라는 것도 보시다시피 사실寫實(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 냄)의 정신으로 임했으되 기법은 전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 어색하고 혼잡한 상태를 느낍니다.

그림은 무서운 것이죠.

기법이 정형화되면 주제의 성격까지 지배합니다.

이 까닭에 그곳에서 붓을 닦은 심향 深香박승무朴勝武(1893~1980),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 김은호,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1899~1978) 등 모두가 우선 전통기법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해서 박승무와 노수현은 끝내 대전환을 이루지 못하고, 김은호는 본래 어용御用화가(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얻었기에 인물을 장기로 하여 쉽게 일본화의 미인기법으로 변신했고, 이상범과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은 1950년대에 들어와 개성적인 기법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서화미술회 시대에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은 일본에 가서 서양화를 배우고 있었는데 방학 때 서울에 오면 일본의 미술환경을 늘어놓았다니까 틀림없이 안중식의 풍경도 그런 영향일지 모릅니다만 그 당시 그림의 주제와 기법과의 역사적 관계를 뚜렷이 의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여기에 수요층의 문제도 나옵니다.

당시 화가는 직업적 화가를 지망하고 그래서 그림으로 살아야 되는데 당시 큰 수요층은 친일의 고관 소위 대감들로서, 그들의 감상안은 전통에 젖어서 전통산수, 전통화조, 기명절지, 초상을 요구했습니다.

이것도 우리 사회에서 전통회화가 오래 지속되는 한 이유인데 이 점은 지금도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가옥 구조는 전통 한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도 또 하나의 이유라면 이유겠죠.

근래 우리 사회에서도 유화가 성행하고, 한국화도 색다른 시도, 심지어 '추상'까지 시도되는 것은 아파트 경기나 근대식 대건축과 연관이 있는 것은 모두 아는 일입니다.

미술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엉뚱한 미술 외적 요소에 크게 좌우됩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일전집 10'(연암서가, 2018)
2. 구글 관련 자료

2022. 9. 21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