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1-서론과 봉건제의 문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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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1-서론과 봉건제의 문제

새샘 2023. 10. 5. 23:56

유럽 봉건제의 권력 피라미드(사진 출처-https://studiousguy.com/crisis-of-feudalism/)

 

○서론: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 사이의 관계

 

이론적으로 유럽은 10세기와 11세기에도 군주국가들의 대륙이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왕권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프랑스의 카페 왕조 Capetien dynasty(프랑스어 Capétiens)는 프랑스 전체가 한때 한 명의 왕에게 충성했다는 기억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987년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를 단절 없이 계승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지방 지배자가 카롤링거 왕조가 내려놓은 왕권을 놓고 서로 경쟁했지만, 962년 이후에는 새로이 제위에 오른 독일 황제 오토 1세 Otto I에 의해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오토 왕조도 프랑스의 카페 왕조도 그들이 통치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영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1000년 무렵 프랑스의 실질적인 정치적·군사적 권력은 왕의 하급자들—공작, 백작, 성주, 기사 등—이 장악했는데, 그들의 권력은 늘어난 지방의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권력의 상징은 성이었다.

그런데 그 성이란 것이 기껏해야 언덕배기에 말뚝 울타리를 둘러친 나무 성채에 불과한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말을 탄 기사 병력을 배치할 경우 비록 나무 성채일지라도 위력적인 요새가 될 수 있었고, 그 일대 농민을 겁주기에는 충분했으며, 또한 경쟁관계에 있는 영주의 공격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공작, 성주, 기사들은 그들의 성에서 '영주권'을 확립했다.

자급자족적인 영지 안에서 그들은 농민을 상대로 지주로서의 재산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화폐 주조, 재판권, 군대 모집, 전쟁 수행, 세금 징수, 관세 부과와 같은 공권력까지 휘둘렀다.

1000년 무렵 프랑스는 본질적으로 백작이나 공작이 통치하는 독립적인 영방공국領邦公國으로 이루어진 많은 조각 영토들로 이루어진 왕국이 되었고, 이 공국들은 다시 성주와 기사가 지배하는 더 작은 규모의 영지로 분할되었다.

 

 

○봉건제의 문제

 

화폐 주조, 재판, 과세, 방어 등 공권력이 개별 영주에게 귀속된 고도로 지방분권화된 정치체제를 흔히 봉건제 封建制 feudalism라고 부른다.

그런데 역사 용어로서의 '봉건제'는 여러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역사가들이 그것을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Marxism 역사학자는 봉건제를 부富가 압도적으로 농업적이며 아직 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경제체제(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생산양식')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사회사학자는 '봉건 사회'를 상호간의 서약에 의해 결합되고, 장원莊園 manor(중세기 유럽에 귀족이나 사원에 딸린 넓은 토지를 말하며, 봉건제의 자급자족 경제 단위)에 고착된 농노의 노동에 의해 유지되는 귀족적 사회 질서로 특징짓는다.

법률사학자는 봉건제를 하급자가 상급자에게서 토지를 받고 그 대가로 다양한 봉사를 제공하는 토지 보유 체제라고 말한다.

반면 군사사학자는 봉건제를 왕, 공작, 백작이 하급자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그 대가로 군사적 봉사를 부담시키는 군대 모집의 한 방법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의미의 과잉을 우려한 최근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중세 유럽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관계가 지역에 따라 너무나 현저하게 다르므로, 봉건제를 '체제體制 system'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봉건제란 용어를 아예 포기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봉건제의 다양한 의미 가운데서 봉건제를 개별 영주에 의해 공권력이 행사되는 정치체제로 규정할 경우, 봉건제가 카롤링거 제국 해체 이후 10세기와 11세기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등장했다는 데 대해 전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봉건제의 용어와 관습은 프랑스에서 유럽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다양한 지역이나 국가의 특정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변화를 겪었다.

마침내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 봉건제는 계서제階序制(오늘날의 관료제도처럼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권한의 서열이 결정되는 체제)적인 법적·정치적 질서—기사는 백작에게, 백작은 왕에게 종속되는 수직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iIdeologie(관념형태)로 발전했다.

이렇듯 수정된 형태의 봉건제는 강력한 군주국가를 정당화했고, 그 결과 유럽 국민국가 등장의 기초를 놓았다.

 

봉건제란 무엇인가?

봉토封土(영어로 fee 또는 fief, 라틴어로 feudum)를 어원으로 만들어진 학술어인 봉건제는,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한 사람이 가치 있는 물질—대개는 땅이지만 때로는 통행료나 방앗간의 수입 또는 연금—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종류의 봉사를 받는 계약을 뜻했다.

그 계약은 종종 불평등했다.

특히 토지가 포함되었을 경우가 그랬는데, 땅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토지를 받을 경우, 통상 토지 수령자는 토지 제공자에게 어느 정도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부 지역에서 봉토 수혜자는 봉토 제공자의 봉신封臣 vassal—켈트어로 '소년 boy'이라는 뜻이 되었고, 제공자는 그의 주군이 되었다.

그들의 새로운 관계는 충성 맹세 의식으로 엄숙히 맺어졌고, 봉신은 봉토에 대한 대가로 주군의 '부하 the man'—프랑스어로 l'homme—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봉토가 주종主從 제도 없이도 존재했고, 주종 제도가 충성 맹세 없이도 존재했다.

봉건제니 봉토니 하는 용어 문제는, 한 개인이 봉사에 대한 대가로 다른 사람에게서 토지를 받아 보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인간관계'에 비하면 지엽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10세기 프랑스의 혼돈 속에서 등장한 봉건제의 핵심은 바로 이 인간관계였다.

 

중앙정부 권력이 붕괴된 세계에서 토지를 보유하는 대가로 봉사를 제공하는, 본질적으로 사적인 이 인간관계는 백작, 성주, 기사 사이의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조직화하는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인간관계에는 체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봉건제가 귀족 사이에 널리 퍼졌던 북부 프랑스에서조차, 많은 성주와 기사는 토지를 무상으로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토지 소유주인 백작이나 공작에게 아무런 봉사도 제공하지 않았다.

봉건적 관계는 반드시 계서제적인 것도 아니었다.

백작이 기사에게서 땅을 받아 보유하는 경우도 있었고,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땅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했다.

여러 명의 다른 주군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토지 보유자도 많았다.

10세기와 11세기의 봉건제는 봉건적 피라미드—기사는 백작에게서, 백작은 왕에게서 봉토를 하사받는, 체계적이고 계서제적인 토지 보유 및 충성 체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봉건적 피라미드 구조를 가진 봉건제는 12세기와 13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그 시기에 들어 강력한 왕들은 봉건제가 왕을 정치적·사회적 피라미드의 정점에 두고 질서정연하게 조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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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