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기자조선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본문
고조선古朝鮮(단군조선檀君朝鮮)(서기전 2333~서기전 1세기 무렵)의 뒤를 이어 건국했다고 알려진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자조선(서기전 1100 무렵~서기전 195)은 1000년 넘게 존속했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실체가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기자箕子가 상商나라(서기전 1600 무렵~서기전 1046 무렵)가 멸망할 때 충절을 지킨 3인으로 알려진 기자, 비간比干, 미자微子 중 한 명이었다는 정도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중국 고대 상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기자가 주周나라(서주西周)(서기전 1046~서기전 771)를 피해 동쪽으로 올 때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고조선의 왕으로 책봉했고, 이에 단군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해 기자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주나라 무왕이 책봉을 했지만 기자는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약간씩 다르지만 대체로 상나라에 충절을 지키던 기자가 주나라를 피해서 조선으로 왔다는 맥락은 비슷하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중화小中華(작은 중국)를 자처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최근 중국에서는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랴오닝성(요령성遼寧省/辽宁省) 랴오시(요서遼西/辽西) 지역의 다링허(대릉하大凌河)에서 발견된, 기자를 연상케 하는 '기족箕族의 제후諸侯'가 쓰던 청동기를 그 근거로 들었다.
과연 기자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라 실재했을까.
기자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 고대사학계의 해묵은 논쟁을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충절의 상징 기자는 정말 조선으로 갔을까
기자는 중국 고대의 다른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기족 출신의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기자는 상나라 왕족 출신으로 성이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고 한다.
'기箕'는 기자의 씨족이 통치한 지역의 명칭에서 나왔다.
우리로 말하면 진주 강씨, 김해 김씨처럼 성 앞에 붙은 본관을 성처럼 쓴 셈이다.
당시의 '기' 지역은 오늘날의 산시성(산서성山西省), 베이징(북경北京), 산둥(산동山東/山东)반도 등을 포함한다.
기자가 우리에게 알려진 이유는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자동래설'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역사 기록에는 기자가 활동한 당시나 또는 그 직후에 기자가 동쪽에 갔다는 서술이 없다.
기자동래설은 기자가 죽은 뒤 1000년이 지난 한漢나라(서한西漢)(서기전 206~서기 8) 때에 갑자기 등장한다.
게다가 기자가 왕이 되는 과정도 책마다 다르다.
≪삼국유사≫에는 앞서 언급했듯 단군왕검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했다고 되어 있다.
어떤 책에는 기자가 무리를 이끌고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에서 도망쳐 나라를 세웠다고도 하고, 또 다른 기록에는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했다고도 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두고 후대에 다양한 윤색이 더해진 결과다.
자세한 내용들이야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기자동래설이 한나라 때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서기전 109년 한무제漢武帝(서기전 156~서기전 87)가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있다.
고조선은 원래 중국에서 사람을 보내 세운 나라였다는 주장을 정벌의 명분으로 삼았다.
한나라에서 기자 신화가 나온 것은 그렇다고 치고, 왜 조선시대에 성리학자들이 기자의 묘를 만들어서 기자를 받들었을까?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하면서 고려의 불교를 대신하여 조선의 국가 이념을 뒷받침해줄 일종의 만들어진 고대역사의 축이 필요했다.
이에 평양을 중심으로 지역적으로 모시던 기자를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숭앙했고, 곧 한국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평양에서는 기자릉이라 이름 붙인 가짜 무덤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기자조선은 실제 역사라기보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사대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맡은 신화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역사 자료가 적은 고대로 갈수록 자기들이 바라는 여러가지 상상을 덧붙여 옛이야기를 전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역사가 구제강(고힐강顧頡剛/顾颉刚)은 이를 '몇 세대에 걸쳐 덧붙여진 역사'인 '누층적累層的 역사'라고 불렀다.
기자 역시 3000년 전 희미하게 남은 이야기를 한나라와 조선에서 각자의 바람과 상상을 결합하여 다양한 이야기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기씨 성 귀족이 남긴 청동기
실제 역사와 신화가 서로 뒤섞여 전해지던 기자조선은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면서 다시 주목을 끌었다.
상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의 중국 청동기가 바로 그것이다.
기자의 씨족인 '기箕'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가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점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1955년이었다.
중국 랴오닝성[당시 지명은 만주국 시절에 만들어진 러허성(열하성熱河省)]의 서쪽 끝인 마창거우(마창구馬廠溝) 마을에 살던 농민들은 돌산을 일구다가 난생처음 보는 청동기들을 발견했다.
유물인지 알 턱이 없었던 농민들은 용돈이나 벌까 해서 고물상에 그 청동기를 넘겼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이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가 주나라 때 것임을 발견하고 박물관에 알린 덕분에 기씨 청동기는 용광로 불구덩이 대신 박물관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중국이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그 유물은 조금씩 기억에서 멀어졌다.
1970년대 부터 마창거우 유적에서 멀지 않은 베이징과 만주 사이의 길목인 다링허 지역에서 기자조선을 연상케 하는 기씨 청동기 유적들이 속속 다시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73년 랴오닝성의 카쭤(객좌喀左)현 베이둥(북동北東)촌의 뒷산이었다.
이번에도 현지 농민들이 돌산을 갈다가 소중하게 차곡차곡 청동기를 쌓아놓은 구덩이를 발견했다.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 고고학자들은 다링허 일대를 더욱 자세히 조사했고, 그 이후 몇 년 사이에 베이둥촌 이외에도 비슷한 중국 청동기가 포함된 유적을 10개 가까이 더 발견했다.
그런데 이 중국 청동기 유적이 있는 다링허 일대는 놀랍게도 이 글 맨 위에 있는 기자조선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나라에서 동쪽으로 도망쳐온 기자가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조선 전체 강역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주나라와 경계 서쪽 변방인 롼허(난하灤河)와 다링허(대릉하) 지역을 고조선이 기자에게 거수국으로 하사하면서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던 것이 아닐까.
제사용 청동그릇에는 중국 고대국가를 이어온 유구한 전통이 숨어 있다.
하夏-상商-주周로 이어지는 고대 중국 왕조에서 제사를 지내는 청동 그릇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는 상징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제사를 국가의 가장 중요한 근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각 지역의 제후들이 공을 세우면 왕이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글귀가 적힌 제사 그릇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충성심을 자극하고 경쟁시켰다.
그리고 각 제후들은 왕이 내린 제사 그릇을 대를 이어 전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했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도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종갓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가문의 핵심으로 보았다.
전란이라도 나면 목숨을 걸고 위패와 제기를 사수하려 했던 종갓집 이야기를 지금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중국 주나라 시절 귀한 제사 그릇을 한데 모아 묻은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사람들은 전란, 전염병 창궐 등의 이유로 피난을 가야 할 경우 자신들이 살던 저택이나 궁궐의 담벼락에 제사 그릇을 묻었다.
또는 어떤 사정으로 제사 그릇을 더이상 사용할 수 없을 경우에도 그냥 버리지 않고 마치 무덤을 쓰듯 예를 올리고 묻었다.
랴오닝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은 고대 상나라와 주나라에서 보면 동북쪽 아주 머나먼 지역이다.
이 황량한 지역의 돌산에서 귀족들이 쓰던 소중한 제사 그릇들이 발견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우선 청동기가 만들어진 시기를 살펴보니 대체로 상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에 해당했다.
청동기의 겉에 쓰인 글자(명문銘文)들을 보니 이 청동기들은 중국 북방의 여러 제후국에서 쓰던 것임을 증명하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었다.
그 많은 이름 가운데는 기자조선을 연상시키는 '기족의 제후'라는 뜻의 '기후箕侯'라는 글자와, 주나라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살며 고사리를 먹은 고사로 유명한 백이와 숙제의 나라인 '고죽孤竹'이라는 글자도 나왔다.
이쯤 되면 기자동래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링허 일대의 청동기를 기자와 곧바로 연결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기씨라고 해서 무조건 상나라 왕족 출신인 기자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링허에서 멀지 않은 산둥과 베이징 일대에는 성이 강姜씨인 또 다른 기족의 제후가 있었다.
경주에 경주 최씨, 경주 김씨가 있듯 같은 '기'라는 이름을 한 다른 씨족들이다.
게다가 이 청동기들을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묻었다는 증거도, 기자조선임을 증명할 성터, 고분, 궁궐 같은 다른 유적도 전혀 없다.
다시 말해, '기'라는 글자만으로 이것이 기자조선의 증거라는 '스모킹 건 smoking gun(결정적이고 확실한 증거)'으로 볼 근거가 없는 셈이다.
○전차를 타고 내려온 유목민들
다링허 기족 청동기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견된 공간과 시간의 특징을 봐야 한다.
먼저 공간적으로 다링허 지역은 북쪽으로는 몽골 초원, 서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만주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문명의 교차지대다.
시간적으로는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흥하던 시점인 서기전 12세기 정도다.
이때 유라시아 초원 지역은 전반적으로 기후가 추워지고 건조해졌다.
초원 지역이 남쪽으로 널리 확대되었고, 이를 따라 유목문화도 중국의 북방으로 내려왔다.
몽골 초원에서 전차를 타고 다니던 유라시아의 유목민들이 중국의 만리장성 일대로 남하한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중국인과 유목민은 서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동쪽 다링허 유역에서 서쪽 간쑤(감숙甘肅/甘肃) 회랑까지 아우른 유목민들은 중국 청동기를 받아들였고, 상나라와 주나라는 반대로 유목민의 발달된 무기와 전차를 받아들였다.
다링허에서 발견된 청동기에는 유목민들의 제사 풍습 흔적이 남아 있다.
상나라 시대 제사용 청동기는 술 주전자, 대야, 국자, 솥 등 종류가 다양하다.
반면 다링허에서 발견되는 제사 그릇은 주로 단순한 형태의 세발솥(삼족정三足鼎)이다.
세발솥은 유목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요리 및 제사 도구였을 것이다.
고기를 삶는 등 요리를 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걸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기원한 세발솥 모양의 토기는 다링허뿐 아니라 멀리 바이칼 Baikal 유역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하나의 흔적은 화얼러우(화이루花爾樓) 유적에서 발견된, 정작 중국에는 없는 청동기 쟁반(또는 도마)이다.
쟁반은 유목민들의 쿠르간 kurgan(무덤)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마지막 식사의 의미로 쟁반(도마)에 고기를 얹어 죽은 사람에게 바쳤다.
다링허에서 발견된 청동 그릇 가운데는 현지의 청동 기술자가 중국 것을 흉내내서 만든 뒤 자기들이 좋아하는 무늬를 덧붙인 것도 있었다.
다링허 유역은 유목문화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다.
청동 그릇을 사용하던 시기가 끝날 무렵인 서기전 8세기 무렵부터 이 지역에는 비파형동검 문화가 발달하는데, 이는 초기 고조선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다링허는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며 발전한 지역이다.
단편적인 자료 몇 개를 가지고 기자조선인가 아닌가라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유라시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던 이 지역의 역동성을 무시하는 처사다.
어쩌면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 시대가 되면서 이 지역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의 이야기가 와전, 윤색되어서 기자동래설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나라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기자조선, 현대 중국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기자조선처럼 실제 역사와 사람들의 상상이 뒤섞여 만들어진 나라는 세계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완전히 허구에 기초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가지를 치면서 과장되고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면서 확대된다.
기자조선과 비슷한 경우가 중세 유럽에도 있었으니, 바로 '요한 사제의 왕국'이다.
사람들은 동방 어딘가에 사제 요한(프레스터 존 Prester John)이 만든나라가 있고, 그들이 십자군을 도와 이슬람인들을 몰아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 이야기는 12세기 무렵 유럽에서 갑자기 등장해 십자군의 원정을 합리화하고 용기를 북돋는 역할을 하며 전 유럽으로 펴져나갔다.
그들이 찰떡같이 믿었던 사제 요한의 왕국은 대항해시대가 본격화된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상의 산물이었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중세 유럽인들이 상상한 왕국이 5세기 무렵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라시아로 퍼져나간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인 Nestorian들의 이야기가 와전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어디 그뿐인가.
이웃 나라인 일본도 고대역사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만들어낸 경우가 허다하다.
메이지유신 이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의 기치를 내세우며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던 일본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일본인들이 이 유대인설을 얼마나 믿고 싶어 했던지 도호쿠(동북東北) 지방에는 예수의 무덤이 버젓이 있을 정도다.
가짜인 줄 알면서 기자의 무덤을 만들어 받들던 조선시대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각국의 여러 상상의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을 법한 기자조선이 다시 등장하게 된 데에는 중국 학계의 역할이 컸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기자조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 핵심 증거로 다링허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들었다.
중국이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중화사관이 있다.
기자조선을 인정하면 한국사가 중국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논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기자에 이어 등장한 위만조선衛滿朝鮮(서기전 195~서기전 108)도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사람이 세운 나라이며 이후 한사군漢四郡(서기전 108~서기 313)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또한 한사군을 몰아낸 고구려에서 태양신, 가한可汗(칸)신과 함께 기자신을 섬겼으니 고구려도 기자조선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간주한다.
여기에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까지 이으면 기자조선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의 3000년의 한국 역사 대부분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극단적인 논리도 가능하다.
물로 이런 중화사관에 동의할 한국인은 없겠지만, 중국 안에서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확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고고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자조선을 증명할 궁궐, 무덤 등 객관적인 고고학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기자조선을 학문적으로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
중국과 조선의 사대주의가 만들어놓은 상상의 나라 기자조선에 대한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이해 없이 '기족의 제후'라는 글자만으로 한국사에 대한 확증 편향을 잇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저해할 뿐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새샘 블로그 2017. 2. 1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https://micropsjj.tistory.com/17039201)
3. 한겨레 신문 인터넷판 2020. 4. 19, '상상의 나라' 기자조선 둘러싼 한-중의 동상이몽(https://www.hani.co.kr/arti/PRINT/941052.htmlㄱ
4. 윤내현 지음,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도서출판 만권당,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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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