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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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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새샘 2017. 2. 1. 21:51

고조선 영토(두꺼운 실선) 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

 

 

1. 기자선은 존재했을까?

 

우리나라 역사 체계에는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근세조선의 학자들은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기자조선이 존재했던 것으로 믿었다. 지금도 기자조선의 존재 여부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기자箕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였다. 그의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자서여로서 기箕라는 지역에 자子라는 작위를 받은 제후였다. 그러므로 기자라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작위는 큰아들에게 세습되었으므로 기자 가문의 종손들은 대대로 기자였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와 연관되어 있는 기자는 그 여러 기자 가운데 기자 서여였던 것이다.

 

『사기』와 『상서대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상나라 말기에 주왕紂王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비간比干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간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미자微子라는 사람은 도망갔고 기자는 자신에게 해를 미칠까 두려워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주의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하면서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감옥에서 풀려나온 기자는 조국이 주족에 의해 망하고 자신이 주족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견딜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주 무왕은 기자의 그러한 행동을 배신 행위로 여기지 않고 그를 조선에 봉하면서 살도록 승인해주었다는 것이다. 『사기』는 기자가 주나라 무왕의 승인을 받았지만 주나라 신하는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주나라가 자신을 배신자로 여기지 않고 조선에서 사는 것을 공식으로 승인해주었으므로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주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주 무왕은 기자에게서 홍범洪範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홍범은 천지와 정치에 관한 큰 규범을 말한다. 공자는 기자를 비간, 미자와 더불어 상나라 말기의 어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로 보아 기자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 무왕은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한 무왕에게 홍범을 가르친 기자라면 유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하다. 따라서 근세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러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면 그는 마땅히 조선의 통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덕망 있는 사람이 우리 민족을 통치했다면 우리 민족도 문화민족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세조선의 유학자들은 심한 모화사상에 젖어 있었다. 유가사상의 기본은 천하사상이다. 그것은 천하의 모든 것, 즉 사람이나 자연은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지상 대리자인 중국의 천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은 당연히 중국의 천자를 자신들의 천자로, 중국을 종주국으로, 중국 사람을 상전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자가 우리 민족의 통치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명예스러운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고조선의 뒤를 이어 기자조선이 있었던 것으로 우리 역사를 체계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중국의 기록을 전면 부인했다. 그 오랜 옛적에 중국에서 조선까지 멀리 망명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주변 이민족의 역사를 중국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여 우리나라를 강점한 것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기자의 조선 망명을 내세워 우리나라의 역사는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므로 기자의 조선 망명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의 연고권을 부인하려 했던 것이다.

 

광복 후 국사 교과서를 만들면서 우리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없앴다. 불확실한 기자조선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중국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고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기자는 가공 인물이 아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의 옛 문헌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고 말했을 뿐, 그가 조선의 왕이나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자가 우리 역사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그가 망명한 조선이 어느 곳이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그의 사회적 신분을 확인해야 한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이 고조선이었다고 하더라도 고조선의 어느 곳으로 망명했는지를 확해보아야 한다. 그곳이 고조선의 도읍이었는지 아니면 고조선의 변경이었는지를 해야 할 것이다. 지난날에는 이런 기본적인 연구 없이 기자나 기자조선을 인정하거나 부인했던 것이다.

 

2.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어떤 관계였을까?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문제를 논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면 이들은 서로 계승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먼저 이들의 상호 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계승 관계에 있었다면 모두 동일한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서로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한사군부터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한사군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개 군을 말한다. 한사군의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한 서한의 행정구역이다. 이런 사실은 『사기』「조선열전」과 『한서』「조선전」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한사군은 위만조선의 영토에 동시에 설치되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서한 무제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낙랑, 임둔, 진번의 세 군을 설치했다. 그 후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침략하여 1년 후인 서기전 107년에 현도군을 설치했다. 따라서 낙랑, 임둔, 진번의 세 군은 위만조선 영토에 설치되었고 현도군은 위만조선 영토 밖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한사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은 설치된 지 불과 20여 년 후인 서기전 82년에 폐지되어 낙랑과 현도 두 군만 남게 되었다. 그 후 낙랑군의 남부를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자 낙랑, 대방, 현도의 세 군이 되었다. 따라서 옛 기록에는 한사군이 사군四郡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고 이군二郡이나 삼군三郡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비록 한사군 가운데 현도군이 위만조선 밖에 설치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한사군은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사군의 위치와 위만조선의 위치는 같은 지역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은 위만이 준準왕의 정권을 빼앗아 건국했다. 옛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위만은 서기전 195년에 서한에서 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청하기를 자기를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 살게 해주면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망명인들과 토착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 서한의 침략을 방어하겠다고 했다. 준왕은 이를 믿고 그에게 사방 100리의 땅을 주고 박사로 봉하여 국경 지대에 살도록 했다. 위만은 그의 세력이 커지자 준왕에게 서한이 군사를 일으켜 10개의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들어가 궁궐을 지키겠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준왕을 공격했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미처 준비할 겨를이 없어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어 준왕은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준왕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긴 준왕을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단군왕검이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전후의 내용을 연결해보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은 단군왕검의 후손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위만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뒤를 이은 나라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준왕은 단군왕검의 후손이 아니라 중국에서 조선 지역을 망명했던 기자의 후손이다. 『위략』과 『후한서』『삼국지』등의 문헌에 준왕은 기자의 40여 대 후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준왕은 고조선의 왕이 아니라 중국에서 고조선의 서부 변경으로 망명하여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 되어 있었던 기자조선의 거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뒤를 이은 나라가 아니라 기자조선의 뒤를 이은 나라였던 것이다.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고조선의 단군왕검 후손으로 둔갑하여 우리 역사에 등장함으로써 우리 역사 체계에는 커다란 잘못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건국된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지역에 설치되었던 한사군이 고조선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잘못 서술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 세력이 건국한 고조선이 어느 사이에 중국 망명객들의 정권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은 서한의 영토에 편입되어 그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되는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상의 고찰에서 분명해진 것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서로 계승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야 한다.

 

3.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어디에 있었을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계승관계에 있었다. 위만조선은 위만이 기자의 후손인 준왕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건국했고 한사군은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어야 한다. 만약 이들이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과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면 고조선은 기자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붕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가 고조선과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면 고조선의 붕괴는 이들의 건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기자조선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 근세조선의 학자들은 중국 문헌들에 보이는 (서)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기자의 조선 망명을 자세하게 전하는 『상서대전』의 기록은 앞서 '1. 기자조선은 존재했을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자를 조선의 통치자로 파견했다는 뜻이 아니라 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조선에 거주하는 것을 공인해주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자가 망명하여 거주했던 조선의 고조선의 중심부가 아니라 서쪽 변경이었다. 『한서』와 『진서』「지리지」에는 낙랑군의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옛날 기자가 망명해 와 거주했던 곳이 후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서』「지리지」에는 낙랑군의 수성현에서 진제국이 쌓은 만리장성이 시작되었고 기록되어 있다. 낙랑군의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은 진시대에 쓰인 『태강지리지』와 당시대에 편찬된 『통전』에서도 보인다.

 

앞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진제국의 만리장성은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는 갈석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낙랑군의 수성현은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현도 수성현과 함께 낙랑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기자가 망명하여 거주했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기자가 그곳에 거주한 것은 고조선의 양해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 중국 문헌에는 기자의 후손들을 '조선후 朝鮮侯'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조선의 제후라는 뜻일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제후를 거수라 하고 그 나라를 거수국이라 했다. 그러므로 기자와 그 후손들의 나라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고, 나라 이름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던 것이다.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이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었다면 위만조선의 위치도 이와 동일해야 한다. 위만조선은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건국되었고 한사군은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의 위치는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한의 해군을 거느린 양복楊僕은 위만조선을 치기 위해 지금의 산동성으로부터 발해를 항해했다. 발해는 산동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서한의 해군이 도달한 곳은 발해 북쪽 난하 동부 유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한의 육군을 거느린 순체荀彘는 요동에 출격하여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토벌했다. 그런데 고대의 요동은 오늘날 난하 유역이었다(이 블로그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고조선의 영토' 참조). 이런 내용들은 위만조선의 위치가 난하 동부 유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상과 같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난하 동부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서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을 서술된 현행 국사 체계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한사군의 낙랑군이 축출된 것은 서기 313년인데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 온 시기는 서기전 1100년 무렵이었고 위만이 망명 온 시기는 서기전 195년이었다. 그러므로 기자로부터 한사군 낙랑군 축출 시기까지 무려 1,400여 년이라는 긴 기간이다. 위만으로부터는 500여 년이라는 기간이 된다. 그러므로 종래의 국사 체계와 기자의 고조선 통치를 인정한다면 우리 민족은 1,400여 년간 중국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기자의 고조선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위만조선부터 계산하더라도 500여 년간 중국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이런 국사 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잘못된 국사 체계를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도서출판 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7. 2.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