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조선의 영토 본문

글과 그림

고조선의 영토

새샘 2017. 1. 19. 22:45

서기전 3세기 무렵 고조선의 최대 강역(사진 출처-출처자료)

 

1. 고조선이 중국과 접하는 서부 국경은 오늘날 난하와 그 하류 동부 유역의 갈석산이다. 

 

고조선과 중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사마천의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진秦제국(BC 221~206)의 동북부 국경은 조선에 미쳤고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진시황본기는 진제국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위 기록은 2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고조선과 진제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조선과 진제국의 국경지역에 요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종래의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읽으면서 조선을 한반도로, 요동을 오늘날의 요동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보면 고조선과 진제국의 국경은 압록강 유역이거나 한반도 북부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 것은 잘못이다.

고대의 조선이나 요동의 위치와 영역이 지금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문헌의 기록을 통해 이를 고증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고대 요동의 위치를 확인하자.

고대 요동은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요동이므로 가능하는 『사기』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기』「진시황본기」내용 가운데는 요동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진제국의 2세 황제 때 신하들이 시황제의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갈석산碣石山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서는 갈석산 지역을 요동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갈석산 지역을 요동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갈석산의 위치를 알면 요동의 위치를 알게 된다.

갈석산은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존재한다.

이 갈석산이 『사기』에 나오는 갈석산임은 다음 기록에서 확인된다. 

서한 무제 때 사람인 사마천이 쓴 서한 무제시대(진제국의 뒤를 이음)의 기록인『사기』「효무본기」에는 서한[전한前漢] 무제가 오늘날 산동성 태산에서 하늘에 봉선이라는 제사를 올린 후 해상을 따라 북쪽으로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동성에서 북쪽으로 항해하면 발해를 지나 오늘날 요서 지역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이다.

따라서 서한 무제가 갔던 갈석산은 오늘날의 갈석산과 같은 산이다.

 

고대의 요동이 오늘날 난하유역이었음은 요수遼水의 위치에서도 확인된다.

서한의 유안이 편찬한 『회남자』라는 책에는 당시 중국 6대 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요수라는 강이 보인다.

이 요수에 대해 서한의 학자 고유는 "요수는 갈석산으로부터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갈석산 근처를 흐르는 큰 강은 오직 난하뿐이다.

따라서 난하가 요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요수는 오늘날 요하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동은 요수 유역을 말하므로 오늘날의 난하가 요수였다면 난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말이 된다.

갈석산은 난하 유역에 있으므로 갈석산 지역을 요동이라 불렀던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 즉 고조선의 서부국경은 오늘날 난하와 그 하류 동부 유역에 있는 갈석산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또 다른 문헌으로 서한시대에 편찬된 『염철론』「험고」편에는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국경은 갈석산과 요수(오늘날 난하)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나라는 고조선의 서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나라였다.

따라서 이 기록은 진제국보다 앞선 전국시대에도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오늘날 난하와 갈석산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럼 과거나 현재의 문헌이나 지명에 등장하는 요동은 무슨 뜻일까?

오늘날의 요동은 요하(또는 요수)의 동쪽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요동이라는 말이 애초 요하나 요수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달라졌다. 요동이라는 지명이 이동함에 따라 요수라는 강 이름도 이동했다. 요수 또는 요하는 요동 지역을 흐르는 강에 붙여진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요수를 기준으로 요동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요동을 기준으로 요수라는 명칭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요동은 요수의 동쪽만이 아니라 요수의 서부 유역도 포괄했던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오늘날 요하와 요동은 고대 요하와 요동으로부터 언제 어떤 이유로 그 명칭이 이동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고조선 말기에 서부 변경 난하 유역에 있던 고조선이 거느리던 거수국渠帥國(중국의 제후국과 같은 의미)의 하나였던 기자조선(기자가 중국에서 망명하여 세운 거수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었다.

서한 무제는 이 위만조선을 치고 그곳을 서한의 영토로 편입하여 4개의 군 즉 한사군을 만들었다.

한사군의 영역은 난하 유역부터 오늘날 요하까지였는데, 이때 중국의 영토가 오늘날 요하까지로 확대됨에 따라 요동과 요수가 오늘날 요동과 요하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것은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오한선비동이전」<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에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고구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 붕괴 후의 고구려로서 오늘날 요동 지역에 있었다.

오늘날 요동 지역에 있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의미는 다름아닌 고대의 요동이 현재의 요동으로 이동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요수라는 강 이름도 이동했음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삼국유사』「순도조려」에는 오늘날 요하에 대해 "옛날에는 압록이라 불렀는데 지금은(고려시대에는) 안민강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요하가 고구려시대와 그 이전에는 압록강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하는 원래 요수가 아니었으며 중국인들이 그것을 요수 또는 요하라고 부른 이후에도 우리 민족은 그 강을 압록강 또는 안민강이라 불렀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고조선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서 요동에 이어 두번 째로 등장하는 패수浿水라는 강에 대해 알아보자.

『사기』「조선열전」에는 서한이 건국된 후 고조선과의 국경을 그들의 영토 안으로 후퇴시켜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후에 위만이 서한에서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할 때 국경인 패수를 건넜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고조선 말기에 패수는 고조선과 서한의 국경이 되었고 그 후에는 위만조선과 서한의 국경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패수의 위치가 학자에 따라 다르게 고증됨으로써 패수는 고조선 연구에서 하나의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논쟁의 가장 큰 원인은 옛 문헌에 등장하는 패수라는 이름의 강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강이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패수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알아내는 데 있어서 반드시 확인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이렇게 확인이 어려운 패수 외에도 다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국경을 확인할 수 있는 요동, 갈석산, 요수 등의 위치로서 국경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국경 지역에 있었던 패수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고조선과 중국의 서부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는 다음 2가지 조건을 갖춘 강이어야 한다.

첫째, 지리적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원래 국경보다 약간 중국 쪽에 위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한이 고조선과의 국경을 원래보다 후퇴시켜 패수를 국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둘째, 시기적으로 고조선시대에 패수로 불린 강이어야 한다.

우리가 찾는 패수는 고조선의 국경이었으므로 고조선 이후에 패수로 불린 강이어서는 안 된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패수들 가운데 위 2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패수는『한서』「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이다.

요동군은 서한의 동북 국경 지대에 있었던 행정구역으로 원래 서한의 영토였다.

그 위치는 오늘날 난하 하류 유역이었다.

따라서 이 강은 고조선시대부터 패수로 불렸으며 고조선과 중국의 원래 국경이었던 갈석산 지역보다는 약간 중국 쪽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한다.

 

결론적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는 중국 고대의 요동군 내를 흐르고 있었던 오늘날 난하 하류였거나 그 서부지류 또는 난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던 강이어야 한다.

난하보다 동쪽에 있었던 강일 수는 없는 것이다.

 

 

2. 고조선의 남부 국경은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이다.

 

이전에는 고조선의 남부 국경을 청천강이나 예성강으로 보았으며, 그 가운데서도 예성강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옛 문헌에 한반도 남쪽에 한韓(삼한이라 부르기도 하나 한이 바른 명칭이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과 고조선을 각각 다른 나라로 보고 그 국경을 청천강이나 예성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뒷바침해주듯이 고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동유물인 비파형동종래에는 대체로 예성강 북부에서만 출토되었다.

그런데 발굴이 진행되면서 고고학 자료는 계속 늘어나며, 내용도 변한다.

근래에 우리나라와 만주 지역에서 발굴이 증가되면서 비파형동검의 출토 상황이 달라졌다.

한반도 남부인 전남 보성군과 경남 진주 등 남해안 지역부터 한반도 전 지역을 포함하여 만주 전 지역과 북경 너머에서까지 출토되었다.

이것은 고조선의 판도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의 남부 경계는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이었던 것이다.

 

남부 해안 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이 교역에 의해 전달되었을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 최고 무기(비파형동검)는 결코 수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는 절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핵무기나 최신 무기는 수출하지 않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남부 경계가 남부 해안선까지였음은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려사』「지리지」에는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도 불리는데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고 전해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전해지는 이 전설이 고려시대에 이미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강화도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여야 한다.

왜냐하면 단군이 자신의 영토 밖에 참성단과 삼랑성을 쌓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예성강보다 남쪽에 있을 뿐 아니라 고대에는 마한 지역이었다.

마한의 한의 일부로서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강화도가 고조선의 영토였다면 마한 지역이 고조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신라를 건국한 중심 세력은 진한 사람들인데 그들은 고조선의 남은 백성들[유민遺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한 역시 한의 일부로서 경상북도 지역에 있었다.

경북 지역에 있었던 진한 사람들은 고조선의 남은 백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오늘날 경상북도 지역도 고조선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왕운기』에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한(삼한), 부여, 비류,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예, 맥 등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고조선을 통치했던 단군의 후손들이라면 이 나라들은 고조선시대에는 고조선에 속해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위의 나라 가운데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한이 고조선에 속해 있었다면 고조선의 남부 경계는 당연히 한반도 남부 해안선까지였어야 하는 것이다.

 

 

3. 고조선의 북부와 동북부 국경은 아르군강과 흑룡강(아무르강) 유역이다.

 

『제왕운기』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원래 고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부여의 영토는 흑룡강과 아르군강까지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북부와 동북부 경계는 아르군강과 흑룡강 유역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비파형동검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에서 출토된다.

그러므로 만주 전 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옛 문헌들에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여러 나라의 언어와 풍속은 서로 유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언어와 풍속은 공동체를 이루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만 비슷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들이 고조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언어와 풍속이 비슷했을 수가 없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오늘날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 북쪽과 동북쪽은 아르군강과 흑룡강 유역, 남쪽은 한반도 남부의 해안선에 이르러,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포괄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윤내현 지음,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도서출판 만권당, 2016.

 

2017. 1. 1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