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2-잉글랜드의 봉건 군주국가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2-잉글랜드의 봉건 군주국가
새샘 2023. 10. 22. 22:33
노르만 및 앙주 왕가의 주요 왕들(1066~1327년) | |
윌리엄 1세(정복왕) | 1066~1087년 |
헨리 1세 | 1100~1135년 |
스티븐 | 1135~1154년 |
헨리 2세 | 1154~1189년 |
리처드 1세(사자심왕) | 1189~1199년 |
존 | 1199~1216년 |
헨리 3세 | 1216~1272년 |
에드워드 1세 | 1272~1307년 |
에드워드 2세 | 1307~1327년 |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봉건제는 잉글랜드 England에서 처음으로 절서정연하고 계서제階序制(오늘날의 관료제도처럼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권한의 서열이 결정되는 체제)적인 토지 보유 및 군사적 봉사 체계로서 등장했다.
그것은 1066년의 노르만 Norman 정복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10세기와 11세기 잉글랜드는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했으며 가장 중앙집권적이고 정교한 행정체계를 갖춘 왕국이었다.
그러나 10세기에 프랑스 서북부에 정착한 바이킹 Viking—북방 사람 Northmen으로 알려졌고, 여기서 노르만인 Normans이란 말이 나왔다—의 후예인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 Duke of Normandy, William(1028?~1087)이 1066년 잉글랜드 왕권을 주장하면서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정복에 나섰다.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새로 즉위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 Harold II가 이제 막 북부에서 바이킹의 공격을 물리친 끝인지라 전력을 다해 저항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헤이스팅스 전투 Battle of Hastings에서 해럴드 2세와 잉글랜드 군대는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원기왕성한 노르만 군대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해가 저물 무렵 해럴드 2세는 날아온 화살에 치명상을 입구 말에서 떨어졌고, 해럴드의 군대는 도망쳤다.
노르만인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와 동시에 잉글랜드 왕국을 차지했다.
윌리엄 공은 윌리엄 1세 William I가 되었고 월리엄 정복왕 William the Conqueror(재위 1066~1087)으로 불리면서 새롭게 얻은 노획물을 운용했다.
윌리엄은 노르만인 추종자들에게 광대한 잉글랜드 토지를 하사했다.
왕국의 정복자로서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모든 땅이 궁극적으로 그에서 속하며 잉글랜드의 모든 토지는 일정한 봉사에 대한 대가로 제공되는 것임을 상당한 명분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었다.
노르만 영주들은 노르망디에서 이미 봉사를 제공하는 대가로 토지를 보유하는 관행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1066년 이후 잉글랜드의 봉건제는 노르망디에서보다 한층 더 중앙집권화되었다.
왜냐하면 윌리엄은 잉글랜드 국가의 행정권에 의지해 잉글랜드 왕이 전 국토의 봉건 영주라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왕으로서 윌리엄은 봉건제에 입각하지 않은 다양한 공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오직 왕만이 화폐를 주조할 수 있었고, 오직 왕의 화폐만이 유통될 수 있었다.
앵글로색슨 Anglo-Saxon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윌리엄과 그의 아들들 또한 국가 토지세를 거뒀고, 공공 법정에서 재판을 주관했으며, 잉글랜드 주민에 대한 군대 징집권을 행사했다.
노르만 왕들은 지방 정부의 앵글로색슨 관리—셰리프 sheriff—을 고용해 행정을 맡기고 왕권 수행을 돕도록 했다.
윌리엄은 또한 잉글랜드의 모든 토지 보유자—비록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토지가 없다 할지라도—가 궁극적으로 왕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윌리엄의 왕권은 카롤링거 식 Carolingian style의 공권력 전통에 10세기와 11세기 북부 프랑스에서 발달한 새로운 봉건적 권력 및 토지 보유 구조를 강력히 융합시킨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봉건 군주국가
윌리엄 이후 2세기 동안 잉글랜드 정치사는 왕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봉건제의 고삐를 조이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왕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국민적 군주국가를 창출했다.
그 과정을 '행정적 왕권의 흥기'라고 부른다.
이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 첫 번째 왕은 윌리엄 정복왕의 아들 헨리 1세 Henry I(재위 1100~1135)였다.
궁정의 재무 회계를 감독하기 위해 헨리 1세는 회계청 Exchequer라는 전문 행정기구를 설치했다.
세입과 지출을 계산하기 위해 체크 무늬 천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지방을 감독하기 위해 강력한 셰리프를 임명함으로써 기존의 앵글로색슨 지방 행정체계를 강화했다.
그는 또한 순회재판관 제도를 만들어 지방에서 왕의 사법권을 실행하고 셰리프를 견제하도록 했다.
헨리의 위압적인 통치방식은 인기가 없었고, 그 때문에 그가 사망한 후 내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헨리1세의 통치방식은 잉글랜드에서 여러 해 동안 대내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헨리 2세 치세
스티븐 왕 King Stephen(재위 1135~1154)의 치세를 특징지었던 내전이 끝난 뒤, 잉글랜드 인민은 헨리 1세의 좋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왕을 고대했다.
그들은 헨리 1세의 손자인 헨리 2세 Henry II(재위 1154~1189)가 그런 왕이라고 생각했다.
잉글랜드 왕위에 오를 무렵 헨리 2세는 이미 프랑스의 노르망디 Normandy, 앙주 Anjou, 멘 Maine, 아키텐 Aquitaine의 지배자였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급속히 서부 프랑스의 정치적·문화적 세계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헨리 2세의 가장 풍요로운 영토이자 유일한 왕국이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헨리 2세는 스티븐 왕 치세에 잉글랜드가 입은 손상을 복구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헨리 2세는 조부의 행정체계를 놀라운 속도로 회복시켰다.
즉위 1년 안 되어 회계청이 설립, 가동되었고, 뒤이어 순회재판관의 지방 여행이 재개되었다.
순회재판관의 업무를 원활히 하기 위해 헨리 2세는 지방 배심원에게, 순회재판관의 마지막 방문 이후 발생한 살인, 방화, 강도 등 주요 범죄를 모두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 배심원의 역할을 확대해 민사사건의 사실관계 판단을 맡겼다.
이런 혁신은 오늘날의 대배심 및 심리배심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원고가 민사소송을 국왕 법정에 쉽게 가져올 수 있도록, 헨리 2세는 '영장' 제도를 발전시켜 재판을 원하는 평민에게 저렴한 공식 절차를 제공했다.
평민이 항상 이 제도의 혜택을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혜택을 누릴 가능성은 열린 셈이었다.
이러한 법률적 혁신은 인기가 대단히 높았다.
혁신의 결과 많은 사람이 국왕 법정으로 왔고(원고로서 그리고 배심원으로서) 그 때문에 정부에 대한 인민의 애정도 커졌다.
사법제도 개선을 위해 헨리 2세는 교회 법정의 관행도 개혁했다.
그러나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토머스 베켓 Thomas Becket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헨리 1세 시대에는 성직자가 연루된 형사사건은 주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은 셰리프와 교회 당국자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그러나 헨리 2세 시대에 이르러 새롭고 독립적인 교회 법정 제도가 잉글랜드와 유럽 다른 곳에서 발달하여, 범죄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를 재판하고 판결하는 배타적 권리를 주장했다.
교회 법정의 처벌을 국왕 법정보다 훨씬 관대했다.
특히 교회 법정은 상급자를 상해한 성직자에게조차도 사형 판결을 내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헨리 2세는 이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클래런던 헌장 Constitutions of Clarendon」(1164)에서 헨리 2세는, 고대 관습에 따라 중범죄로 교회 법정에서 유죄가 선고된 성직자는 먼저 성직자의 지위를 상실하며, 그런 다음 국왕 법정에 넘겨져 평신도로서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잉글랜드 주교들에게 요구했다.
토머스 베켓은 그 절차에 반대하면서, 그것이 '이중 처벌', 즉 같은 범죄에 대한 두 번의 처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베켓과 헨리 2세는 한때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나 헨리 2세의 진정한 목적이 교회의 권리를 손상시키는 데 있다고 베켓이 고집스럽게 주장하면서 둘 사이의 우정은 깨지고 말았다.
베켓은 교황에게 도망쳤는데, 당시 교황은 헨리 2세의 적인 프랑스 왕 루이 7세 Louis VII의 보호 아래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다.
1170년 베켓은 마침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귀국 직후 베켓은 4명의 기사들에 의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헨리가 휘하의 기사들에게 역정을 내면서 '참견 좋아하는 사제'를 없애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꾸짖은 직후의 일이었다.
베켓은 즉각 순교자이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헨리 2세는 맨발에 셔츠만 입은 채 베켓의 무덤 앞에 서서 살인을 촉발하는 거친 말을 내뱉은 죄에 대한 성인의 용서를 빌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 극적인 사건은 헨리 2세와 교황—또는 잉글랜드 교회—의 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않았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주장—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를 국왕 법정에서 재판할 권리, 잉글랜드에서 교황 법정으로의 상고를 제한할 권리 등—을 상당 부분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 고위직에 성직자를 추천할 권리, 왕이 임석하에 선거를 치르게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왕이 추천한 후보는 거의 언제나 그가 지명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헨리 2세의 성공을 입증하는 가장 구체적 증거는 그의 사후에도 잉글랜드 정부는 훌륭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헨리 2세의 아들로서 허세가 심한 편이었던 리처드 1세 사자심왕 the Lionheart King Richard I(1157~1199)는 1189년에서 1199년까지 10년 동안 잉글랜드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 10년 동안 그가 잉글랜드에 머문 기간은 6개월뿐이었다.
나머지 기간에 그는 십자군 운동에 참가하거나 대륙에 있는 자신의 소유를 지키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행정관 및 관리 덕분에 리처드 1세의 잉글랜드 정부는 착실하게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법률 제도는 계속 발달했고 잉글랜드 정부는 세금을 거둬 두 번이나 리처드 1세에게 거액을 조달해주었다.
한 번은 그의 성지 십자군 원정 비용이었고, 다른 한 번은 그가 적에게 사로잡혀을 대 몸값으로 지불되었다.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 Philipe II Auguste(영어 Phiilp Augustus) of France(재위 1180~1223)에 맞서 프랑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때도 잉글랜드 정부의 확고한 지원을 받았다.
○존 왕과 마그나 카르타
리처드 1세가 그때 살아남았더라면 유럽 지도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 그가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를 물리쳤더라면(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프랑스 국경선은 현재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1199년 남프랑스의 작은 성을 포위 공격하던 중 십자궁수가 쏜 화살에 맞고 사망했다.
그의 계승자이자 동생인 존 왕 King John(재위 1199~1216)은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이 훨씬 뒤떨어져서 프랑스에 있던 영토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1204년 말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는 노르망디, 앙주, 브루타뉴 Bretagne, 멘에서 존 왕을 쫓아냈으며, 아키텐(헨리 2세의 왕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Aliénor of Aquitaine 가 유산으로 남긴 땅)만이 잉글랜드 영토로 남았다.
존 왕은 치세의 남은 기간을 잃어버린 프랑스 영토 회복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바쳤다.
이를 위해 그는 귀족에게 무거운 벌금을 물리고, 전 인구에 중세를 부과하는 등 자신의 봉건적 특권을 극한까지 휘둘렀다.
1214년 프랑스 원정에 나선 존 왕은 부빈 전투 Battle of Bubin에서 존엄왕 필리프에게 또다시 참패를 당했다.
분노한 잉글랜드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1215년 그들은 존 왕을 밀어붙여 후세에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로 알려진 자유 대헌장에서 강탈적인 재무 관행을 포기하도록 했다.
존 왕이 봉건적 권리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까닭에, 마그나 카르타의 조항들은 대부분 왕이 향후 봉신의 전통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는 몇몇 중요한 일반 원칙을 확립하기도 했다.
즉, 왕은 왕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한 세금을 걷을 수 없으며, 어떤 자유민도 동등한 신분의 배심원에 의한 판결과 잉글랜드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왕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유 대헌장은 왕이 법률의 규제를 받는다고 하는 원칙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미국 중세사가 스트레이어 J. R. Strayer가 말했듯이, 마그나 카르타는 전횡적인 정부의 등장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대헌장이 발표된 후에도 정부의 중앙집권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 Henry III(재위 1216~1272) 치세에 귀족들은 국왕과 맞서면서 정부 지배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긴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중앙집권화된 정부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헨리 3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행정관들은 중앙 및 지방의 재판 제도,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재산 정도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과세 체계 등 더욱 효율적인 사법·행정제도를 완성시켰다.
중세 잉글랜드의 정부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널리 알려진 것은 의회였다.
이것은 1300년 전후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1세 Edward I(재위 1272~1307)의 요청에 따라 점차 독립적인 기구로 자리 잡았다.
의회는 나중에 무제한의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최초의 의회는 단연 왕의 고안물이었다.
즉 한 자리에서 귀족, 기사, 도시민의 자문을 구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판단 아래 왕이 직접 소집했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Wales, 스코틀랜드 Scotland, 프랑스 등과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빈번히 의회를 소집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해당 지역의 일반적 동의가 없을 경우 어떤 세금도 부과해선 안된다고 요구했다.
의회는 그와 같은 동의를 얻어내고 참석자(주로 귀족계급이었지만 주 및 주요 도시에서 온 기사 대표도 빈번히 포함되었다)에게 그런 과세가 왜 필요한지 설득하는 효과적인 경로를 제공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현안 문제에 대한 조언을 듣고, 유력자가 연루된 사건의 재판을 청취하기 위해 의회를 활용했다.
그는 또한 지방행정을 점검했고, 지방의 불만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에 대처하는 새로운 법률을 공표했다.
그러므로 의회는 재정적·사법적 기구인 동시에 정치적 기구였다.
의회는 14세기 이후 잉글랜드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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