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3-프랑스의 봉건 군주국가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3-프랑스의 봉건 군주국가
새샘 2023. 11. 15. 21:07
카페 왕가의 주요 왕들(987~1328년) | |
위그 카페 | 987~996년 |
루이 6세 | 1108~1137년 |
루이 7세 | 1137~1180년 |
필리프 2세(필리프 아우구스투스) | 1179~1223년 |
루이 8세 | 1223~1226년 |
루이 9세 | 1226~1270년 |
필리프 4세 | 1285~1314년 |
○프랑스의 봉건 군주국가
프랑스의 왕권은 잉글랜드보다 훨씬 늦게 발달했지만, 1300년대에 이르면 두 나라는 서로 견줄만한 수준에 도달했다.
10세기를 지나면서 프랑스 지방 정부의 카롤링거 Carolingus(또는 Karolinger) 제도는 대부분 붕괴되었다.
그 결과 새로 등장한 카페 왕조 Capetian dynasty(987~1328)의 프랑스 왕들은 그러한 제도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거의 200년 동안 카페 왕조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프랑스 왕이라곤 하지만 초기 카페 왕조는 '일 드 프랑스 Île-de-France'라고 알려진 파리 주변의 작은 지역—대략 미국의 버몬트 주 State of Vermont와 비슷한 크기—만을 직접 지배했고, 프랑스 다른 지역을 지배하는 독립적인 백작과 공작들에 대해 봉건적 대군주임을 주장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프랑스라고 하는 관념은 카롤링거 시대 Carolingian era 이래 살아남아 있었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국면에서 카페 왕조는 왕국을 처음부터 새롭게 건설해야만 했다.
여러 면에서 카페 왕조는 운이 좋았다.
생물학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왕조는 300년 동안 중단 없이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놀라우리만큼 장수했다.
카페 왕조의 왕들은 평균 30년 동안 통치했다.
그 결과 그들은 왕위 계승 분쟁과 파멸적인 소수파 정부를 모두 피해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대단히 비옥한 영토를 지배했고 그 땅은 꾸준히 늘어나는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또한 독일 황제로부터 도망친 교황의 보호자로서, 그리고 12·13세기에는 유럽의 학문 중심지였던 파리 대학의 후원자로서 크나큰 위신을 얻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카페 왕조는 교활하고도 약삭빠른 왕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힘을 아까면서 강한 적들이 제 꾀에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왕권의 성장
프랑스 왕권의 착실한 성장은 루이 6세 Louis VI 비만왕(뚱보왕 Le Gros, 영어 the Fat)(재위 1108~1137) 치세에 시작되었다.
루이 6세는 난폭한 강도떼 귀족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일 드 프랑스에 대한 왕의 지배권을 강화했다.
일단 왕권이 강화되자 농업과 상업이 번영할 수 있었고 파리의 지적 생활이 활기를 띠었다.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 Louis VII(재위 1137~1180)는 경쟁자인 잉글랜드의 헨리 2세 Henry II(재위 1154~1189)에 압도되어 완전히 빛을 잃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군주국가의 재원과 위신을 증대시켰다(루이 7세는 한때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Thomas Becket과 교황 알렉산드로 3세 Pope Alexander III를 동시에 보호한 적도 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로 하여금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김으로써 잉글랜드의 앙주 왕가 Anjou royal family를 끊임없는 내분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앙주 왕가에 대한 열세를 반전시켜 프랑스에서 진정한 의미의 왕권을 확립한 인물은 루이 7세의 아들 필리프 2세 Philippe II(재위 1179~1223년)였다.
부왕이 그랬던 것처럼, 필리프 2세도 잉글랜드의 헨리 2세 및 사자심왕 리처드 1세 Richard I(재위 1189~1199)와 직접적인 군사 대결을 해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존 왕 King John(재위 1199~1216)—비방자들은 존 왕을 '물렁한 칼 soft sword'이라 불렀다—은 경우가 달랐다.형의 왕위를 손쉽게 물러받기 위해 존 왕은 필리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필리프 2세는 존 왕의 봉건적 대군주라는 지위를 이용해 존 왕의 프랑스 내 영지에 대한 지배권을 잠식해 들어갔다.
존 왕이 이에 저항하자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있는 존 왕의 모든 영지를 프랑스 왕이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곧 정복 전쟁이 뒤따랐고, 1204년 프랑스에 있던 앙주 왕가의 영지 중 가장 비옥한 지역이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떨어졌다.
필리프 2세는 이제 효과적인 지방 행정체계 구축을 위한 재원을 확보했다.
그는 일찍이 일 드 프랑스에 대한 행정 지배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얻은 교훈을 새로이 정복한 노르망디 Normandy, 멘 Maine, 앙주 Anjou 등의 영토로 확대시켰다.
현명하게도 그는 잉글랜드의 앙주 왕가가 그곳에 설치한 행정기구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대신 이들 영토를 감독하기 위해 바이 bailli라는 사법·행정·군사의 전권을 지닌 왕실 관리를 새로 임명했다.
필리프 2세는 바이를 일 드 프랑스의 기사 및 소귀족 중에서 뽑았고 그들을 여러 지역으로 자주 이동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리프 2세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왕의 대리인과 통치 담당 지역과의 불미스러운 유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엄격한 재무회계 및 기록관리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중앙 행정을 개선했다.
지방의 다양성을 중앙집권화된 왕권과 결합하는 필리프 2세의 행정체계는 그 후 500년 동안 프랑스 정치의 특징을 이루었다.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 8세 Louis VIII(재위 1223~1226)는 그 패턴을 새로 정복한 남부 프랑스 영토에 확대시켰고, 루이 8세의 아들 루이 9세 Louis IX(재위 1226~1270)는 그것을 더욱 확대, 심화시켰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루이 9세가 국내의 사법권 확립과 국외의 십자군 원정에 비범한 헌신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왕의 행정권 강화를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루이 9세는 13세기 왕권의 전범典範 model(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이 되었다.
죽은 후 그는 교회에 의해 성聖 루이 Saint Louis로 추증되었고, 그의 계승자들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선량한 왕 루이'의 위광威光(감히 범하기 어려운 위엄과 권위)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위광은 성 루이의 무자비한 손자 필리프 4세 Philippe IV 미남왕美男王 le Bel(the Fair)(재위 1285~1314)에 의해 대부분 탕진되었다.
필리프 4세는 동북쪽의 플랑드르 Flandre와 아직 잉글랜드에 속한 서남쪽의 영토를 상대로 공격적인 전쟁을 감행했다.
제9장에서 보게 되듯이, 그는 또한 프랑스 교회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을 잠식했다.
이들 원정에 비용을 대기 위해 그의 행정부는 탐욕스러운 자금 조달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재원을 갖고 있었음에도 필리프 4세는 그의 적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Edward I(재위 1272~1307)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는 신민의 자발적 납세를 통해 현금을 조달했던 것이다.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의 의회와 흡사한 대의기구—나중에 삼부회 Estates General로 불렸다—를 시도했지만, 그것은 프랑스 정치에서 잉글랜드의 의회에 필적하는 역할을 결코 하지 못했다.
이렇데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프랑스 귀족계급이 왕에 대한 직접세 납부 면제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시대 이래로 잉글랜드 군주는 귀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동의한 세금을 반드시 납부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카페 왕조 군주들은 프랑스에서 그에 준하는 관행을 뿌리내리게 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필리프 4세도 상황 타개에 도전하기보다 순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프랑스 귀족 계급의 면세 특권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군주국가의 정치 쟁점으로 남게 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봉건 군주국가의 유사점과 차이점
중세 전성기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모두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군주국가로 발전했고 국가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1300년에 이르면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민적 군주국가로 자리 잡았고, 잉글랜드는 브리튼 Britain 제도 전체를 지배하면서 프랑스 서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지닌 신흥 제국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두 왕국은 적대감으로 인해 1290년대에 전쟁을 치른 바 있었고, 이 전쟁은 그 후 20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중세 전성기에 매우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프랑스보다 작은 나라였던 잉글랜드는 한층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내부에는 (잉글랜드의 웨일스 Wales, 스코틀랜드 Scotalnd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제외하면) 잉글랜드 왕국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지역 언어나 지방 권력이 없었다.
잉글랜드 귀족은 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고 실제로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지만, 그럴 경우 지방은 중앙으로부터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지역적 분리주의가 중요한 힘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남프랑스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피점령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노르만인 Normans마저도 파리의 간섭에 짜증을 냈다.
불만 세력인 프랑스 귀족과 잉글랜드 침입자는 앞으로 몇 세기 동안 그와 같은 지역주의를 유리하게 활용했다.
또한 두 나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통치되었다.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왕가와 앙주 왕가의 왕들은 앵글로색슨 시대로부터 이어온 지방 제도를 기반으로 행정을 구축했다.
그들은 지방민, 특히 지방 기사에게 의존해 지방 정부의 많은 업무를 무보수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잉글랜드의 행정비용이 저렴해지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정부 정책이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발성이 사라지면서 업무가 삐걱대고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잉글랜드 왕들은 대체로 귀족, 기사, 평민으로부터 공식적인 동의를 얻는 데 유의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점차 인민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정책을 집행할 수 없는 제한군주국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 왕들은 한층 크고 부유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그들은 중앙 및 지방에서 행정부—관료적이고 급료에 의존했다—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관료는 지방 사회에서 독립적 지위를 갖지 못한 왕의 대변자였으므로 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지역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카페 왕가의 왕들이 잉글랜드 왕들과는 달리 대의기구에 의존할 필요성이 훨씬 적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카페 왕조는 여론을 반영하는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가 결여되었다.
또한 카페 왕가의 왕들은 초기의 허약성으로 인해 귀족계급에게 세금 납부를 요구하지 못했다.
지속적인 전쟁의 압력을 받아야 했던 중세 말기에 프랑스의 이런 약점은 파멸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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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