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5. 화가 촌평3: 오원 장승업, 석지 채용신, 백련 지운영, 소림 장석진, 심전 안중식,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본문

글과 그림

동주 이용희 "한국 근대회화 백년전에 즈음하여" - 5. 화가 촌평3: 오원 장승업, 석지 채용신, 백련 지운영, 소림 장석진, 심전 안중식,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새샘 2023. 11. 22. 17:27

장승업, 방황공망산수도, 비단에 담채, 151.2x31.0cm, 호암미술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술)로는 조선조 제일이라 평가되는 오원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이지만 일자무식에 글도 익힌 일이 없습니다.

술이 대단하고 성품이 소탈해서 수없이 일화를 남긴 사람이죠.

실경을 스케치하러 다닌 일도 없고,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 에게 배웠다지만 제대로 배운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대감들 집에 식객으로 다니면서 중국 그림—그것도 안 본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고화古畫(옛 그림), 화본畵本(그림 배울 때 보고 베끼는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 보통인데 엄청난 천부天賦(태어날 때부터 지님)준법皴法(산악·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기법), 수법樹法(나무 그리는 방법), 토파土坡(흙으로 쌓아 올린 둑), 인물, 화조花鳥(꽃과 새 그림), 기명절지器皿折枝(그릇, 꽃가지, 과일 따위를 섞어서 그린 그림)에 신운神韻(고상하고 신비스러운 운치)이 돌았습니다.

말하자면 구도와 기법이 전통화이면서 화기가 하도 초출超出(다른 사람에 비해 두드러지게 뛰어남)해서 손이 제대로 노는 감이 있습니다.

 

오원의 기준작은 산수, 화조, 계묘鷄猫(닭과 고양이 그림), 기명절지할 것 없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물론 오원은 대감들의 요구로 그린 게 태반이라 신명이 안나면 범작凡作(평범한 작품)을 했습니다만 신명이 나면, 즉 술이 얼큰히 취하고 옆에 분粉 냄새가 돌면 엄청난 기량을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천재죠.

 

이 전시회에 나온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와 <무관산수도無款山水圖>의 세부를 보면 토파, 수목의 처리는 그야말로 대가의 솜씨고 그림에 품격이 감돕니다.

오원은 그의 그림을 자세히 분석해서—시간이 있다면 논평할 작품입니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고, 하여간 그의 솜씨가 발군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터입니다.

그의 기명절지, 또는 준정기명尊鼎器皿(술잔과 솥 그림)의 기준작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1905) 댁에 전하던 것이 있습니다.

6·25 이전에는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1904~1967) 방에 걸렸던 것인데 아마 국제수준에서도 제일급일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이 전시회에 나온 오원의 기명절지는 오원답다고 하기 어렵죠.

오원 역시 그리기 싫거나, 그리다가 싫어지면 제자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에게 대필시키거나 완성시켰다니까 심전 화제畵題의 오원 것은 주의를 요하는 것이죠.

 

 

장승업, 자웅계, 비단에 채색, 141.8x36.9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 전시회에 나온 <닭> 그림도 좋은 작품이고 특히 <자웅계도>는 중국 상해파의 냄새가 납니다만 국제적 수준이죠.

오원은 아시다시피 노안蘆雁(갈대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그림)으로도 유명한데 노안의 특징은 기러기 머리가 쇠뭉치가 떨어지듯 무겁게 느껴지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인상을 줍니다.

그의 유명한 <백안도百雁圖>는 지금 어디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오원은 제자인 심전과도 다르고, 여기 나온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1884~1933)의 기명절지 같은 얌전한 그림, 그야말로 '그림'과도 다릅니다.

그런 뜻에서 오원의 감별은 비교적 쉽습니다.

오원의 잘된 산수, 기명, 화조, 노안 등을 보고 나면 동시대의 것은 싱거워서 안 보게 됩니다.

 

 

채용신, 운낭자상, 1914년, 비단에 채색, 120.1x61.5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의 초상은 서양풍을 도입한 흔적이 많고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나 개인으론 이 사람의 그림은 좋아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관인官人(조선 고종 때 종이품)의 여기餘技(틈틈이 취미로 하는 재주나 일)라고 생각합니다.

전시회에 나온 <운낭자도雲娘子圖>가 유명한데 나는 일본인이 왜 이 그림을 치켜세웠던지 그 진의가 의심스러워 저항감을 갖고 보게 됩니다.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1852~1935)은 기본적으로 아마추어 화가죠.

오래 살아서 서화미술회 또 서화협회에도 관계해서 많은 유작이 남아 있는데 소폭小幅(작은 크기의 그림)괜찮은 것이 있고 대작은 안고수비眼高手卑(눈은 높으나 솜씨는 서투름)라는 인상을 나는 가졌습니다.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은 서로 선후배로 친하여 소림 그림에는 심전의 낙관과 화제의 대필이 많은 것은 모두 아는 일입니다.

조석진은 철저한 전통파로 일제 아래서도 그림의 절개를 지키고 변하지 않고 전통산수, 어해魚蟹(물고기와 게 그림) 등을 그렸으며, 안중식은 전통화법으로 사경寫景(풍경화)도 시도한 분이죠.

 

1911년에는 서화미술회, 1918년에는 조선서화협회, 똔 그 전후해서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1868~1933)의 서화연구회도 발족합니다.

이때쯤 되면 점차로 일본인의 영향을 받습니다.

일본에 가서도 받고, 국내에 있으면서도 받고, '조선미술전람회' 소위 '선전鮮展'을 통해서도 받습니다.

이 과정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의 ≪서화백년≫이라는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당은 3·1운동 당시 옥고도 치르신 분이나, 그 그림이 전차 일본풍으롤 옮긴 것은 그것과는 다른 세계의 얘기라고 할 수 있겠죠.

 

1922년부터는 '선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것이 화가의 등용문 같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 심사원을 통한 일본화의 영향을 피하기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 중에서 전통 북종의 화법을 짙게 유지한 분은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1899~1978)이었죠.

심산하면 다음 생각이 납니다.

6·25가 발생한 1950년, 9·28 서울 수복되던 전날 저녁, 그때 명륜동에 있었던 내 집에 작가 마해송馬海松(1905~1966)과 심산이 찾아와서 밖에 총성을 들으면서 밀주를 사다놓고 칸 반되는 사랑방에서 장래 일을 얘기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취기가 돌자 지금 남산南山은 머리가 짤리고 포성이 왔다갔다 하는데 옛날 남산이 그립다는 얘기가 나와서 심산이 선지宣紙(주로 동양식 글과 그림에 사용되는 종이) 사절四折에 옛 모습의 남산을 그리기로 되었죠.

제목은 내가 <목멱고의木覓古意>(목멱산 즉 남산의 옛 뜻)라고 붙이고, 마침 있던 조그만 단계벼루에 왜묵倭墨을 갈아 놓고 화필 아닌 막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보느라니 붓을 중국인이 편봉이라고 부르는 측필 가까이 쥐고 빠른 속도로 묵선을 쳐 나가더군요.

여기 전시회에 와서 나는 심산의 같은 필치筆致(필세에서 풍기는 운치)를 봅니다.

전통화의 기본은 필치이죠.

붓 놀린 흔적이 눈에 안 들어오면 감상이 안 됩니다.

하여간 심산은 장서長逝(영영 가고 돌아오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할 때까지 전통화의 맥락에서, 그것도 북종화의 맥락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산수' 아닌 '풍경'을 전통기법으로 남기면서 그리려고 애쓴 흔적이 여기 전시장에 있는 초기 그림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 두 사람은 1950년대 수복 후에 자기류自己流(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자기 주관이나 관습)를 개척하였습니다.

그 예도 이 전시장에 한두 점 나와 있는데 이것은 이미 1950년까지라는 이 전시회의 연한을 넘는 것이죠.

하기는 심향心香/深香 박승무朴勝武(1893~1980)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도 모두 전통기법을 끝내 버리지 않은 분입니다.

 

여기 전시된 일제강점기의 작가들은 고생을 많이 했죠.

그림 그려서 살기가 어려워 대개는 학교 신문사에 나가고 삽화들을 그렸죠.

일본인에게 밀착해서 천거 받지 않으면 그림 팔기가 어려웠으니까요,.

요사이는 많이 다르죠.

그런데 기묘한 일은 고생고생해서 살면서 참을 수 없는 창작욕에서 나온 작품은 지금 보아도 와닿는 것이 있죠.

하느님은 예술과 부를 한꺼번에 주시기를 싫어하시는 것 같군요.

 

요컨대 이렇게 보아오면, 185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백년은 우리 회화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로 가는 과도기 같습니다.

전통산수를 주축으로 한 전통화, 그리고 그것을 뒷받치는 화기畵技가 자율 타율 반반으로 지나가고 새로운 서양화와 일본화의 영향을 싫든 좋든 받으면서 자기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듬으면서, 개성미가 주도하는 회화론에 인도돼서 새로운 우리 것을 찾으려는 과도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출처
1.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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