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4-독일과 이베리아, 8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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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8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경제, 사회, 정치 6: 봉건제와 국민적 군주국가의 등장 4-독일과 이베리아, 8장 결론

새샘 2023. 11. 27. 12:57

◎독일의 봉건 군주국가

 

1200년 무렵의 신성로마제국

 

중세 전성기 독일 Deutschland(영어 Germany)은 매우 다른 발전 과정을 겪었다.

1050년의 독일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국이었다.

수많은 반半자치적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독일 황제는 카롤링거 Carolingus(또는 Karolinger) 식 기반—교회와의 긴밀한 동맹, 신성한 왕권의 전통, 동쪽 슬라브 Slavic 영토 정복의 높은 수익성 따위—위에서 강력한 군주국을 만들었다.

스위스 Switzerland(Swiss Confederation), 동부 프랑스 Eastern France, 저지대 지방, 북부 이탈리아 Northern Italia(영어 Italy) 등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황제들은 교회와의 제후에 크게 의존했다.

왕가의 주요 행정관은 대주교와 주교였는데, 그들은 과거 카롤링거 왕 Carolingian kings들이 그랬듯이 독일 황제에 의해 성지에 임명된 인물들이었다.

심지어 일부 교황들도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을 정도였다.

교회 지도층 인사들은 대개 황제의 친척인 경우가 많았고, 지역에 할거하는 공작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독일은 11세기 잉글랜드만큼 행정적으로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군주 권력의 효율성에 관한 한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잉글랜드와 전혀 다른 기초에 근거하고 있었다.

 

 

○교황과의 갈등

 

1056년 하인리히 3세 Heinrich III는 어린 아들—하인리히 4세 Heinrich IV—을 후계자로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점부터 황제권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3세는 일군의 개혁 성직자들을 교황에 임명했는데, 그들의 정책에 대해서는 다음 제9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소년 왕 하인리히 4세와 개혁 교황들 사이에는 즉각 갈등이 시작되었다.

갈등은 섭정들(중부 동일 및 남부 독일 출신)과 작센 Sachsen(영어 Saxony) 귀족계급 사이에도 표출되었다.

하인리히 4세가 직접 통치를 시작하자 작센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1073년 이 적대감정은 처참하고도 파괴적인 내전인 작센 전쟁(색슨 반란) Saxon revolt(또는 Saxon Rebellion)으로 폭발했다.

 

작센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로마의 개혁 교황들과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다음 제9장에서 설명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새로이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Pope Gregorius VII(영어 Gregory VII)(재위 1073~1085)는 교회의 영적 생활을 개혁하려면 먼저 교회를 (황제를 포함한) 평신도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가진 주교 및 수도원장 임명권을 금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시도를 거부했고, 그를 교황직에서 쫗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황은 작센 귀족계급과 동맹을 맺고 아직 채 아물지 않은 독일의 내전에 다시 불을 지폈다.

이번에는 전세가 하인리히 4세 황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반란적인 귀족들은 교황의 지원을 받아 황제의 폐위를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 뒤 서양 중세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인 카노사의 굴욕 Road to Canossa이 연출되었다.

1077년 한겨울에 하인리히 4세는 허겁지겁 알프스 Alps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 Canossa Castle에서 교황 앞에 부복했다.

교황은 독일 제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흘 동안을 내내 성문 앞에 서서 국왕의 기장을 모두 옆에 둔 채 맨발에 허름한 옷을 입고 하인리히는 교황의 도움과 위로를 간청하면서 눈물을 그치치 않았다."

독일 지배자 중 어느 누구도 그 같은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 기억은 앞으로 몇 백 년 동안 독일 역사에 깊숙이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폐위를 막아내기 위해 선수를 친 사건이긴 했지만 전쟁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투쟁은 1122년까지 이어졌다.

그해에 마침내 하인리히 4세의 아들 하인리히 5세 Heinrich V는 교황과 타협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제후들은 황제로부터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실질적인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거의 50년 동안이나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진 후 제후들은 한층 더 군사화하고 위험스러워졌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제후들은 황제의 세습 계승권에 개의치 않고 새로운 황제를 선출할 수 있다는 주장 그 후 이 원칙에 입각해 그들은 가장 허약한 계승자를 선택하거나 온 나라를 내전에 휩쓸리게 하곤 했다—을 관철시킴으로써 더욱 큰 권력을 얻었다.

교황은 새로운 로마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줄 권리를 보유함으로써 황제 선출 과정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몇 가지 명백한 이유 때문에 교황은 지나치게 강력한 독일 군주의 등장을 두려워했다.

교황은 독일 황제를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Normans에 대한 균형주 세력으로 존중했지만, 존중한 것과 똑같은 정도로 황제를 두려워했다.

독일 황제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를 직접 지배할 경우, 교황—그의 영적 독립성에 그리스도교도의 구원이 걸려 있었다—은 그의 꼭두각시가 될 위험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이 두려움은 그 뒤 13세기에 교황과 황제 사이의 투쟁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하인리히 6세

 

독일 왕국에 밀어닥친 거센 조류를 막아내려 한 대표 인물은, 12세기의 호엔슈타우펜 왕가 Hohenstaufen Dynasty의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영어 Frederick I)(재위 1152~1190)였다.

'붉은 수염 red beard'란 뜻의 이탈리아어 '바르바로사 Barbarossa'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성역을 '신성 로마 제국 Holy Roman Empire'이라 부름으로써 제국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재천명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란 칭호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어온 보편 제국이며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황제는 제후들이 자기 영지 내 귀족을 복종시키려는 노력을 돕는가 하면, 반대급부로 제후들이 부유하고 독립적인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 대한 황제의 권리 주장을 지지해줄 것을 기대하는 등 독일 제후들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대체로 이 체제가 온전히 작동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이탈리아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 및 교황과의 파멸적인 충돌을 감수해야 했다.

밀라노 Milano의 리더십과 교황의 지원 아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롬바르디아 동맹 Lombard League을 맺어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지배권 주장에 저항했다.

한편 독일 제후들은 엘베 강 Elbe River 동쪽의 비옥한 농토를 식민지화함으로써 꾸준히 힘을 키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 및 교황과의 타협을 이끌어냈고, 타협의 결과 도시들은 황제에게 거액의 현금을 지불하고 정치적 독립을 얻었다.

1184년 마인츠 Mainz의 프리드리히 황궁에서는 12세기의 가장 화려한 행사 중 하나가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아들 하인리히가 왕이자 황제로서 자신을 계승하는 것에 대한 제후들의 승인을 얻어내고,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 노르만인 왕의 누이와 하인리히의 결혼을 결정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을 떠났고 성지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신중한 계획은 아들 하인리히 6세 Heinrich VI(재위 1190~1197)에 의해 열매를 맺었다.

하인리히 6세는 어려움 없이 부왕의 재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로부터 막대한 수입을 얻었고, 아내의 오빠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시칠리아 왕위에도 올랐다.

그것은 교황이 항상 두려워하던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바야흐로 막강한 단일 지배자가 북부 및 남부 이탈리아를 동시에 지배하게 되면서, 교황의 중부 이탈리아는 양쪽에서 포위 당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하인리히 6세는 후계자로 이제 겨우 3세밖에 되지 않은 아들—미래의 프리드리히 2세—을 남겨둔 채 1197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새로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Pope Innocent III는 바르바로사와 하인리히 6세가 독일과 북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와 왕국 사이에 구축한 연결고리를 깨부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독일에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자 교황은 두 명의 유력 제위 주창자의 눈치를 보면서 번갈아 지원했다.

교황의 제위 경쟁의 승자가 시칠리아—교황은 시칠리아를 노르만인에게 봉토로 하사했다—를 교황에게 반환해줄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非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인 제위 주창자 오토 4세 Otto IV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으로 판단되자 교황은 눈치껏 비장의 카드를 썼다.

그는 또다른 제위 주창자인 16세 소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소규모 군대를 딸려 북쪽으로 보냈다.

그는 그토록 나이 어린 소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휘하는 소규모 군대가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오토 4세는 사촌인 잉글랜드의 존 왕 King John of England과 한편이 되어 운명을 같이 했다.

오토 4세의 군대가 부빈 Bouvines 전투에서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Philip the Magnificent King of France에게 참패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이론의 여지없는 새로운 독일 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재위 1216~1250)는 중세의 지배자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시칠리아에서 자란 프리드리히 2세는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아랍어도 할 줄 알았다.

그는 학문의 후원자였다.

그가 남긴 매사냥에 관한 유명한 저서는 초기 서양과학사—관찰에 입각한—에서 영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진기한 동물을 모아놓은 동물원, 무슬림 궁수대, 베일에 싸인 채 격리된 여성으로 이루어진 하렘 harem 등을 관리·운영했고, 여행할 때마다 그들 모두를 동행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가 한 도시에 들어가면 그 도시는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이렇듯 이국적인 행태를 보였으면서도 그는 동시에 대단히 인습적인 중세적 지배자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권리를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독일 영방 제후를 지원하던 조부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 사망 후 이어진 격변의 20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독일에서는 제후들이 이미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어서,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것 말고 프리드리히 2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들(처음에는 하인리히, 다음에는 콘라트 Konrad)을 황제 사후에 독일 왕으로 선출토록 조치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탈리아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동맹 소속 도시들은 또다시 제국에 대한 세금 납부 의무를 거부했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는 노르만인이 창설한 지극히 강력하고도 행정적으로 정교한 왕국이 혼돈에 빠져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문제 해결에 뛰어들었다.

1212년부터 1220년까지 그는 독일에 머물면서 독일 귀족계급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고 20년 동안 전란을 겪으면서 잃었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토지를 최대한 회복했다.

또한 그는 1220년에서 1226년까지 시칠리아와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황제의 권력을 재확립했다.

그는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십자군 원정에 나서 이집트 무슬림 지배자와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수복에 성공했는데, 그는 무슬림 지배자와 매사냥 취미에 대해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1230년에서 1235년까지 그는 시칠리아에 머물면서 교황의 침공—실패로 끝났지만—으로 훼손된 황제의 권위를 회복했다.

1235년서 1237년까지 그는 독일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는 그의 치세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1237년 그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의 고유한 정부 구조를 무시하면서 이들 도시에 대한 황제의 직접 지배권을 요구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 결과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또다시 발발해 125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교황은 이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교회에서 파문했고, 그의 사망 후에는 그의 후손 중 어느 누구도 독일이나 시칠리아의 권좌에 다시 오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우리는 과연 교황의 그러한 주장에 실효성이 있었는지 여부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1254년 프리드리히의 마지막 남은 적법한 후계자가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후계자의 죽음과 더불어 독일에서 실효적인 군주 지배가 계속될 마지막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황제들이 계속 선출되었지만 바야흐로 독일에서 군주의 권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 후 독일의 실질적인 정치권력의  몇 백 명의 영방 제후들 사이에 분할되었고 그들의 대립은 19세기 말까지 독일 정치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베리아의 봉건 군주국가

 

900~1250년의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재정복

 

이베리아 반도 Iberian Peninsula는 독일보다 한층 더 지역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달리 에스파냐 España(영어 Spain)는 근대 초기 유럽에서 근대 초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국가로 등장하게 된다.
중세 전성기 에스파냐 왕국이 가진 힘의 근원은 무슬림 지배 아래 이베리아 반도를 성공적으로 재정복하고, 이 정복을 통해 땅, 전리품, 약탈물을 획득한 데 있다.

중세 전성기의 이베리아에서는 네 개의 그리스도교 왕국이 있었다.

북부의 산악 국가 나바라 Navarra(언제나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았다), 서쪽의 포르투갈 Portugal, 동남쪽의 아라곤 Aragon과 카탈루냐 Cataluña(영어 Catalonia) 연합왕국, 중부의 카스티야 Castilla(영어 Castile) 이었다.

 

12세기 전 시기를 통해 그리스도교 군대는 착실하게 전진했고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Battle of Las Navas de Tolosa에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이 무슬림에게 거둔 대승은 그 절정이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면 최남단의 소국 그라나다 Granada만 무슬림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그라나다가 살아남은 것은 그리스도교도에게 기꺼이 조공을 바쳤기 때문이다.

카스티야는 당시에 에스파냐에서 단연 가장 규모가 큰 왕국이 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도시화되고 상업 지향적인 아라곤과 카탈루냐 왕국의 부유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이의 전쟁은 중세 말기에 두 왕국을 모두 약화시켰다.

그러나 아라곤의 페르난도 Fernando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Isabel의 결혼으로 이들 두 숙적이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통일 에스파냐 왕국 Kingdom of  España이 탄생했다.

1492년 두 가톨릭 군주(페르난도와 이사벨)는 에스파냐 최후의 무슬림 영토인 그라나다를 정복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사벨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1451~1506)라는 이탈리아 모험가에게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해 인도 India로 가는 임무를 맡겼다.

콜럼버스는 실패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우연히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 덕분에 16세기 에스파냐는 유럽 최강의 왕국이 되었다.

 

 

8장 결론

 

1000년의 유럽은 로마 세계에서 등장한 세 개의 서양 문명 중에서 세력이 가장 미약했고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했으며 지적으로로 가장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1300년에 이르러 유럽은 비잔티움 Byzantium 및 이슬람 Isalm 세계를 능가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경제적 기반—효율적 농업, 인구 증가, 상업의 확대 등 덕분이었다.

그 변화는 역동적이고 자신만만하며 유동성 높은 사회를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개개인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낡은 역할을 버리고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서유럽이 이 시기에 겪었던 정치적·군사적 변화였다.

1100년에 이르면 중무장하고 말을 탄 기사가 당대 최강의 군사 병기로 등장했다.

그러나 유럽 각국의 정부가 행정적·정치적 능력을 발전시켜 기사들을 장악하고, 그들로 하여금 산적행위나 강도질 이상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지도한 것은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중세 전성기까지 서유럽 세계는 도시국가와 제국이라는 두 가지 정부 형태만을 알고 있었다.

도시국가는 시민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고, 그 결과 한층 강력하고 적대적인 제국에 맞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곤 했다.

고대 그리스인 ancient Greeks이 페르시아 Persia를 상대로 거둔 승리가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도시국가는 빈번히 대내적인 경제적·사회적 대립으로 분열되곤 했다.

장기적으로 그들은 외부 정복자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못했다.

반면 제국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강력한 행정적 관료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광대하고 탐욕스러워서 신민으로부터 깊은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중세 전성기의 국민적 군주국가는 도시국가와 제국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황금의 중용'을 달성했다.

국민적 군주국가는 자신을 방어할 만큼 규모가 컸고 세련된 행정 기법을 발전시킬 정도로 부유했다.

또한 제국이었을 경우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서도 시민의 참여와 충성심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1300년 무렵 잉글랜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의 왕들은 공동체, 지역, 교회 등에 대한 열정적 충성심을 신민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승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세 전성기의 국민적 군주국가는 살아남았고 마침내 근대 유럽 국민국가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계보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중세적 기원을 갖지 못한 근대의 국민적 군주국가는 그 계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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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2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