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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신사임당 "초충도"

새샘 2023. 12. 2. 20:50

<저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하겠다>
 

전傳 신사임당, 16세기 초, 종이에 채색, 초충도 8폭 병풍, (왼쪽 위)제1폭 가지와 방아깨비, (왼쪽 아래)제2폭 수박과 들쥐, (오른쪽 위)제3폭 원추리와 개구리, (오른쪽 아래)제7폭 양귀비와 도마뱀, 각 폭 34.0x28.3㎝,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어머니로 강릉에서 나고 자라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했다.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뛰어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현행 오만 원권 지폐의 초상이기도 하다.
사임당이란 호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는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명화로 꼽히고 있다.
율곡은 어머니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짓기에 능하고 농필弄筆(희롱조로 지은 글)을 잘하며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치 않은 것이 없었다.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렸고 초충, 영모, 포도를 잘 그려 세상에 적수가 없었다."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초충도 화첩 서너 점과 산수·포도·묵죽·묵매 등 전칭傳稱(전하여 일컬음) 작품이 몇몇 전하고 있다.
그중 <초충도> 8첩 병풍이 가장 유명하며, 이들을 대개 비슷한 유형으로 구성된다.
① 오이와 메뚜기, ② 물봉선과 쇠똥벌레, ③ 수박과 여치, ④ 가지와 범의땅개, ⑤ 맨드라미와 개구리, ⑥ 가선화와 풀거미, ⑦ 봉선화와 잠자리, ⑧ 원추리와 벌 등이다.
 
사임당의 <초충도>섬세한 필치와 미려美麗한(아름답고 고운) 채색으로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품격이 있다.
그림의 주제인 풀과 벌레를 보면 모두 사생寫生(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에 기초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토속적인데, 나비, 벌 등의 표현이 마치 곤충채집을 한 것처럼 좌우대칭을 이룬다.

이는 자수의 본으로 그렸기 때문이며 그런 조용한 정지감 속에서 우리는 정서의 해맑은 표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사임당은 작품에 낙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증할 수 있는 작품이 없다.

사임당 그림에 도서낙관이 없는 것은 당시의 풍조가 그러했던 점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자체가 흉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원수의 사랑방에 친구들이 찾아와 노닐다가 "자네 아내 그림 솜씨 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이에 안채로 사람을 보내 그림을 그려 보내라고 했더니 사임당은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재삼재사에 이르자 사임당은 남편의 청을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아내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결국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백자 접시 위에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지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러니 사임당의 도서낙관은 애당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임당의 작품 감정은 화풍, 재료뿐만 아니라 그 그림의 내력과 증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신빙할 수 있는 작품은 오죽헌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오죽헌 소장본은 본래 율곡을 모신 강릉 송담서원에 전래된 것으로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가 1655년 송담서원을 방문했을 때 그림을 보고 사임당의 그림 솜씨에 감격하였다는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는 사임당 신씨의 먼 친척으로 신립 장군의 6대 손인 신경申暻이 작품을 수장하게 된 동기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한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도 사임당의 <초충도>에 발문을 붙인 것이 있어 그 글이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우암은 이렇게 말했다.
 
"이 화첩은 좌찬성 이원수의 부인되는 신사임당의 그림이다. 그 손가락 아래서 표현된 것이라면 능히 흔연히 자연스러움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이 아닌 것 같을진대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근본이 되는 기운의 융화를 모아 참된 조화를 이룸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저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선생의 종증손從曾孫(자기 형제의 증손자)되는 동명東溟 이백종李百宗이 판관이 되어 평안도 안주 병영으로 나가면서 이 화첩을 내게 보이며 글을 써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화첩이 남의 집으로 흘러가 이씨의 소유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백종이 사임당의 그림을 찾아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더니 마침내 금년 어느 날에 한양의 어느 집에서 이것을 얻어 옛 모양으로 표구하여 다시 이씨 집안에 전해 내려갈 백대百代의 보배로 삼으니 그 뜻이 과연 부지런하고 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그림이 다행히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았기에 지금 이 화첩을 보며 사람들은 부인(사임당)의 어머니됨과 선생(율곡)의 아들됨이 진실로 근본과 가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백종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기해년(1659) 섣달에 우암 송시열 쓰다.
 
우암 송시열 같은 도학자가 이 화첩을 대한 것을 보면 선현先賢(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사물로서 그림을 보았다.
<초충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의 모습까지 그려본 것이었다.
그것은 그림의 또 다른 효용 가치이며, 그림을 보는 또 다른 눈이다.
 그러나 우암이 소중히 보존하라고 그렇게도 신신당부한 사임당의 화첩은 불행히도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새샘 블로그에는 2021. 1. 19에 올린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대한 또 다른 글이 실려 있다.
(
https://micropsjj.tistory.com/17040093)

 
2023. 12. 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