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2: 종교적 활력의 분출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9장 유럽의 팽창: 중세 전성기(1000~1300)의 종교적·지적 발전 2: 종교적 활력의 분출

새샘 2024. 1. 1. 12:28
유럽의 종교 부흥(1100~1300년)
시토 수도회 설립
동정녀 마리아 숭배 시작
카타르파 이단 등당
발도파 이단 등장
성찬에 관한 새로운 신학
프란체스코 수도회 설립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도미니쿠스 수도회 설립
          1098년
          1100년 무렵
          1140년 무렵
          1180년 무렵
          1150년 무렵~1215년
          1209년
          1215년
          121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Gregorius VII(재위 1073~1085)가 앞장선 개혁 운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유럽의 종교 부흥을 자극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교회정화 운동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평신도는 이제 성직자를 더욱 존경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 되기를 열망했다.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1066~1200년에 잉글랜드에서 수도 교단에 들어간 인원이 10배나 증가했는데 여기에는 사제 수의 증가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활동이 종교 부흥에 각별히 기여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평신도에게 성직자 규제에 참여해줄 것을 공공연히 호소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파급효과를 발휘했던 일련의 서한들을 통해 교황은 '간음을 저지르는 사제(결혼한 사제를 포함)'의 죄악을 규탄하고 평신도로 하여금 그들을 설교단에서 추방할 것과 그들이 집전하는 예배를 거부할 것을 당부했다.

교황의 이런 조치 때문에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자정 운동이 확산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종교적 열기가 팽배한 가운데 교황과 하인리히 4세 Heinrich IV(재위 1056~1105) 황제의 투쟁 같은 전 유럽인의 관심을 모은 사건까지 벌어짐으로써 서유럽인의 종교적 관심은 엄청나게 증폭되었다.

1050년 무렵까지 대부분의 유럽인은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교도였지만, 그레고리우스 7세 시대 이후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리스도교는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이끄는 이상이자 관습이 되었다.

 

 

◎시토 수도회와 카르투지오 수도회

 

시토 수도원(사진 출처-https://www.imaeil.com/page/view/2019040411322631399)

 

새로이 분출된 신앙심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12세기의 시토 수도회 Cistercian Order 운동을 들 수 있다.

1100년 무렵이 되자 어떤 형태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Benedictine Abbey도 성스러움을 열망하는 신도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경건한 그리스도교도는 철저한 금욕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렬한 '내면성'—가차 없는 자기반성과 신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명상적 노력—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수도생활의 이상을 온전히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교단들이 설립되었다.

그중 하나가 카르투지오 수도회 Carthusian Order였다.

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독방에서 생활했고 육식이 금지되었으며 매주 3일 동안은 빵과 물과 소금만 먹으면서 정진해야 했다.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수를 늘리는데 무관심했기에 줄곧 작은 규모를 유지했다.

 

그러나 시토 수도회는 달랐다.

1098년 처음 조직된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투스 계율을 가능한 한 가장 순수하고 엄격하게 준수하고자 했다.

세속적인 유혹을 피하기 위해 그들을 되도록 문명과 동떨어진 숲과 황무지에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들은 모든 불필요한 교회 장식과 화려한 집기를 회피했고, 정교한 기도문을 강조한 클뤼니 수도원 Cluny Abbey 방식을 포기하고 명상과 개인적인 기도생활을 존중했으며,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위대한 설교자이자 탁월한 문인이며 당대 유럽 종교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 Saint Bernard of Clairvaux(라틴어 Bernardus Claraevallensis)(1090~1153)의 카리스마적인 지도 아래 시토 수도회는 크게 성장했다.

1115년에는 산하 수도원이 5곳에 불과했지만 베르나르두스가 사망한 1153년에는 343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장은 단지 좀 더 많은 사람이 수도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었다(기존 수도원들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많은 경건한 평신도가 새로운 수도원을 후원하기 위해 기금과 토지를 헌납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수도원에 직접 들어가거나 후원자로서 돕게 되면서 종교적 신앙과 헌신의 성격에 변화가 일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성인 숭배를 대신해 예수 그리스도 숭배와 동정녀 마리아 경배가 강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인의 유물에 대한 숭배는 새로운 시토 수도회에서 성체 축성 또는 성찬식으로 대치되었다.

물론 성찬식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항상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참다운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된 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신학자들이 성변화聖變化의 교리를 분명하게 주장한 것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성변화의 교리란 사제가 미사를 집전할 때 신과 협력해 제단 위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한다는 교리다.

12세기에 일반 대중의 성체에 대한 존경심은 크게 높아져 성별聖別된(그리스도교에서 신성한 일에 쓰기 위하여 보통의 것과 구별하는 일) 빵 또는 성체를 들어 올리는 관행이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그 결과 회중會衆 Congregation(많이 모여 있는 사람들) 전원이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성체 신학은 사제의 권위를 크게 드높였으며, 또한 신심 깊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하도록 고무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긴밀한 동질감을 갖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방하게 되었다.

 

 

◎동정녀 마리아 경배

 

12세기에 등장한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숭배 열기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 관행은 동정녀童貞女(숫처녀) 마리아 Virgin Mary(또는 Mother of Jesus)에 대한 경배였다.

이것은 성체 교리보다 더욱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마리아는 서유럽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2세기에 마리아 경배가 그토록 두드러지게 된 정확한 이유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12세기에 마리아 경배가 서유럽 전역에 걸쳐 널리 성행했다는 사실이다.

시토 수도회는 마리아를 교단의 수호성인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교단 설립자인 성 베르나르두스는 일생 동안 마리아의 생애와 미덕에 관해 설교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로이 건립된 대성당은 모두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이었다.

노트르담 Notre Dame('우리의 귀부인'이란 뜻) 성당은 파리 Paris뿐만 아니라 샤르트르 Chartres, 랭스 Reims, 아미앵 Amiens, 루앙 Rouen, 랑 Lang 등 여러 곳에 있었다.

신학적으로 마리아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에게 탄원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마리아는 만인의 어머니요 무한한 은혜의 저장소로서, 아무리 죄인이라도 그에게 사랑이 남아 있고 궁극적으로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그를 위해 구원을 간청하는 존재였다.

당시에는 얼핏 낳 신에게서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마리아를 경배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든가 또는 임종 때 마리아가 기도해준 덕분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등 마리아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숭배의 의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중심적인 영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는데, 신학자들은 여전히 첫 번째 여인인 이브 Eve를 통해서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신학자들은 아담 Adam인 그리스도를 낳은 두 번째  여인 마리아의 도움으로 죄에 대한 승리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함으로써 종전의 관점에 균형을 잡아주었다.

또한 마리아를 표현한 예술가와 문인은 여성성과 인간다운 부드러움 그리고 가정생활에 주목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예술과 문학 양식을 부드럽게 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 경배의 등장이, 12세기 서유럽 전체에서 나타난 희망에 찬 낙관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동정녀 마리아만 12세기 종교에서 각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당대의 몇몇 여성도 크나큰 종교적 권위를 얻었다.

가장 널리 알려지고 영향력이 컸던 여성은 독일의 소녀이자 신비주의자인 빙엔의 힐데가르트 Hildegard of Bingen (1098~1179)였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환상을 생생하고 독창적인 라틴어 산문으로 받아쓰게 했는데, 그녀의 글은 흡인력이 대단해서 동시대인들은 그녀가 직접 신의 영감을 받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교황은 독일을 방문할 때 그녀를 축복했고 종교 지도자와 세속 지배자는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힐데가르트는 약리학, 여성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글을 썼다.

그녀는 종교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이 성가의 아름다움은 최근에 들어서야 재발견되었다.

21세기 현대인이 콤팩트디스크 꽂이에서 신비에 가득 찬 그녀의 성가를 찾는 모습을 그녀가 보게 된다면 무척 놀라워할 것이다.

음반가게의 클래식 코너에서 그녀의 작품은 베토벤과 브람스 사이에 '빙엔 Bingen'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적 이단의 도전

 

12세기의 거대한 종교적 열정은 도를 지나쳐서 교회가 승인한 한계를 벗어나기도 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평신도에게 성직자 규제에 힘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후로는 평신도의 종교적 열정을 통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12세기를 지나면서 교회가 교황 군주국가의 법률과 재무 행정에만 전념하게 되자 일각에서는 한때 그토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던 교회가 목표를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사제의 기적적 권능이 점점 강조되면서 평신도의 종교적 역할이 제한되었고 평신도가 영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12세기 후반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대중적 이단 운동이 전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12세기의 대표적인 이단으로는 카타르파 Cathars와 발도파 Waldensians를 들 수 있다.

카타르파는 남부 프랑스와 이앝리라에서 크게 성행했는데, 모든 물질은 사악한 원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성스러움을 얻기 위해서는 극단적 금욕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카타르파 일부는 신이 둘—선한 신과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피조 세계는 전적으로 악한 신의 세력권 안에 있고 영적인 사람은 여기에서 탈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카타르파 추종자들은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라고 믿었다.

남부 프랑스의 귀족 여성은 카타르파의 유랑 설교자를 숨겨주는가 하면 자기 가족을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등 카타르파의 확산에 각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세기의 종교적 이단 중 더욱 전형적인 것은 발도파였는데, 이 운동은 프랑스 도시 리옹 Lyon에서 시작되어 남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독일 등지로 확산되었다.

발도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애를 가능한 한 완벽하게 모방하고자 한 평신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서를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청빈한 생활과 설교에 헌신했다.

초기의 발도파는 가톨릭의 교리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도 처음에는 그들을 간섭하지 않았다.

사실 발도파는 초기에는 카타르파에 맞선 대항 운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그들이 허가 없이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즉각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자 그들은 더욱 과격해져서 대안적인 교회를 만들고 그 교회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1198년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재위 1198~1216)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나날이 세력이 커지는 이단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의 두 갈래 대응은 교회의 장래에 실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한편으로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모든 불복종을 짓누르기로 결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이상주의적인 종교 단체를 지원하기로 작정했다.

그 결과 교회 안의 역동적 영성을 좌절시키지 않고도 교황 군주국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카타르파를 억누르기 위해 인노켄티우스 3세는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에게, 자기 영지 안에 이단이 번성하도록 허용한 남부 프랑스 귀족에 대한 십자군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알비 십자군 Albigensian Crusade'이라고 알려진 이 원정은 북부의 침략자들이 남부의 몇백 명 지주를 강탈하는 정복 전쟁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어쨌든 십자군은 카타르파를 지원한 하부 조직 대부분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교황은 성공의 여세를 몰아 살아남은 이단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종교재판의 집행을 고무하고 권면했다.

1252년부터 종교재판에서 고문이 허용되었다.

유죄가 입증된 이단자는 무거운 형벌을 받았으며 일부는 화형대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발도파에 대해서도 비슷한 절차가 채택되었지만 카타르파만큼 성공적이지 않았다.

14세기 초에 카타르파는 사실상 소멸되었으나, 발도파의 소규모 집단은 스위스와 남부 독일의 산악 지방에서 17세기까지 살아남았다.

 

또한 인노켄티우스 3세는 사제의 특수한 지위와 교회의 계급제도를 강화하는 새로운 종교 교리를 선언했다.

그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Fourth Lateran council(Lateran IV)에서 교회에 의해 주관되는 성사聖事(형상 있는 표적으로 형상 없는 성총聖寵을 나타내는 행사)가 신의 은혜를 확보하는 불가결한 수단이며 성사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재확인했다.

라테란 공의회는 두 가지 성사, 즉 성체聖體와 고해告解를 강조했다.

성변화의 교리는 공식적으로 규정되었고, 모든 가톨릭 신자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성체를 받아야만 했다(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또한 공의회는 이단을 억제하고 성직자의 독보적 권위를 천명하기 위한 교리 및 규제를 공표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쿠스 수도회

 

앞서 설명했듯이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교회 내의 순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이 등장한 탁발托鉢수도회—즉, 도미니쿠스 수도회 Dominican Order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Franciscan Order였다.

탁발수도사는 여느 수도사와 마찬가지로 계율 준수를 서약했지만, 실제 행동은 수도사와 크게 달랐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회를 떠나 수도원에 은둔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예수와 사도들을 본받아 작은 집단을 이루어 도시와 시골을 유랑하면서 설교와 영적 안내를 베풀었다.

또한 그들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받아들이고 구걸로 호구지책을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단인 발도파와 비슷했지만, 그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공언했고 직접 이단과 싸우기도 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에스파냐의 성 도미니쿠스 Sanctus Dominicus(영어 Saint Dominic)(1170~1221)가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인가를 얻어 설립했다.

이 수도회는 특히 이단과의 싸움 및 유대인과 무슬림의 개종에 헌신적이었다.

처음부터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설교와 공개 토론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희망했고, 이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지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의 많은 수도사들은 그 당시 갓 설립된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가졌으며 철학과 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3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 Saint Thomas Aquinas(1225~1274)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도사로서, 자신의 신학적 노력의 주요 목적이 '이교도', 즉 모든 비그리스도교도를 개종시키는데 있다고 공언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항상 학문적 명성을 유지했으나 완고한 이단자를 다루는 데는 법적 절차가 최선의 방도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중세 종교재판소를 주도하는 심문관이 되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기원이 전혀 다른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교리나 규율에 대한 헌신보다 감성적 열정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성 도미니쿠스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은 서임된 사제로서 설교의 직분을 수행한 반면,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이탈리아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Francesco d'Assisi(영어 Saint Francis of Assisi)(1182~1226)는 평신도로서 초기에는 사회적 반란자나 이단자와 흡사하게 행동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에 불만을 느끼고 가난한 사람들의 종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에게 준 그는 공개적으로 옷을 벗어던지고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면서 공식적인 허가도 받지 않고 도시의 광장에서 구원을 설교했고 이탈리아 도시들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섬겼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철저하게 본받으려 했고, 성체 성사 이외에는 일체의 교리, 형식, 의식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는 교황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1209년 어느 날 그는 누더기를 걸친 작은 무리를 이끌고 로마에 나타나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복음서의 교훈을 한데 모아놓은 것에 불과한 소박한 계율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른 교황 같았으면 평신도 신분의 프란체스코를 구제불능의 비현실적인 종교적 무정부주의자로 간주하고 배척해버렸을 지 모른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철두철미한 복종을 공언했고 인노켄티우스 3세 또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프란체스코의 계율을 승인하고 설교를 허락했다.

그후 교황의 지원에 힘입어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확산되었고, 행정적 안정의 중요성과 모든 구성원에 대한 교리 학습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등 점차 세련된 모습을 갖춰가긴 했지만, 주로 신앙 부흥 운동 성격을 지닌 옥외 설교에 매진하면서 정통의 울타리 안에서 '사도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렇듯 인노켄티우스 3세는 생명력 있는 새로운 세력을 활용함으로써 교회 내의 종교적 열정이 유지되도록 했다.

 

13세기 말까지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교황 군주국가와 서로 협력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황은 탁발수도사들이 전 유럽에 걸쳐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지원했고 종종 그들이 교구 사제의 직무를 침범하는 것도 허용했다.

한편 탁발수도사는 이단과 맞서 싸웠고 교황의 십자군을 설교했으며, 선교 사업에도 적극적이었고 교황을 위한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탁발수도사는 귀감이 되는 신앙적 삶을 통해 그리고 힘찬 설교를 통해 13세기 전 시기에 걸쳐 종교적 열정을 유지시키는데 기여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이단 운동에 맞선 싸움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교회로서는 커다란 승리였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직 유럽인을 충분히 휘어잡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카타르파와 발도파에게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단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이단 색출을 구실로 종교재판 절차가 확실히 뿌리를 내렸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

 

교회는 유대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위협이 된다고 믿고 이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착취에 가까운 세금 징수와 박해 때문에 1300년 무렵에는 1150년 무렵에 비해 규모도 작아지고 세력도 약해져 있었다.

교회는 대중의 반유대주의적인 거친 공격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행동에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1300년에 이르면 많은 보통의 그리스도교도는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유대인을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믿게 되었다.

유대인은 일상적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자녀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마시며, 성체 성사 때면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힌다는 것이었다.

유대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조직적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유대인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배후에 악마적인 무엇인가가 잠복해 있다는 식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유대인의 부에 관련된 갖가지 공상적인 이야기들은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경제적 요인을 덧붙여주었다.

실제로 13세기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많은 유대인은 대금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3세기 전 시기를 통해 교회는 왕들과 협력하면서 유대인의 삶을 점점 더 엄격히 옥죄었다.

그러나 1280년대부터 왕들이 자신의 왕국에서 유대인 신민을 모조리 추방하기 시작했다.

1288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1290년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1306년 프랑스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14세기에는 독일 라인란트 Rheinland에서 유대인 추방이 이어졌고, 1492년 에스파냐에서도 유대인 추방이 있었다.

1500년에 이르면 오직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만 유대인 인구가 다수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때까지 살아가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