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8: 사상, 문학, 예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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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8: 사상, 문학, 예술

새샘 2024. 5. 21. 21:13

중세 말기의 고난은 지적·예술적 생활을 정체시켰지만, 사실 중세 말기는 사상, 문학, 예술 부문에서 지극히 창조적인 시대였다.

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발전 양상을 잠시 뒤로 미루고, 14세기와 15세기의 다른 중요한 지적·예술적 성취를 살피기로 한다.

 

 

○신학과 철학

 

12·13세기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 같은 스콜라 Scholar 철학자들은 이성적·체계적이고 이해 가능한 자연 세계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 이미지는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신에 관한 지식과 그로 말미암은 구원으로 이끌도록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1300년 이후 이런 확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프란체스코 Francesco 수도사인 오컴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1287?~1347) 같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중세 스콜라 철학의 보편 논쟁의 하나이며, 어떤 대상이나 개념은 그 자체는 알 수 없고 오직 이름만 알 수 있다는 회의주의 이론) 사상가는 인간의 이성이 신의 존재 같은 근본적인 신학적 진리를 증명할 수 없으며, 신에 관한, 즉 구원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신이 성경을 통해 계시한 것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계에서 관찰 가능한 규칙성과 이해 불가능한 신성神性의 본질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으며, 자연법으로부터 신의 본질을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 어떤 자연 법칙(중력 같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거나, 이런 자연 법칙이 신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 절대적 권능과 위엄에 대한 모욕이었다.

 

유명론은 중세 말기 대학에서 대단히 영향력이 커졌고 유럽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오컴의 관심은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터무니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도록 만들었고, 그 때문에 중세 신학은 종종 조롱거리가 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신은 과거 일을 되돌릴 수 있는지, 또는 무수히 많은 정령이 동시에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중세 사상가들은 뾰족한 바늘 끝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가 춤을 출 수 있는가를 질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전능에 대한 유명론자의 주장은 16세기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루터, 칼뱅 등에 의하여 주도된 16세기 종교 개혁의 중심 사상)의 기본 전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지식인들은 초자연적 설명 없이도 자연계를 탐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근대 과학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

추상적 범주가 아니라 오직 개별적 실체만이 실재하며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하는 유명론자의 주장은 또한 경험주의—세계의 지식은 추상적 이성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에 기초해야 한다는 믿은—를 장려다.

이것 역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속어 문학

 

오컴의 철학이 그랬듯이, 중세 말기의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강렬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자연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 Wolfram von Eschenbach(1170~1220)와 단테 Dante(1265~1321) 같은 중세 전성기 작가들은 중세 말기의 계승자들이 이룩하게 될 작품 세계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중세 말기의 작가들은 인간의 결점과 실수를 묘사하는데서 훨씬 앞서나갔다.

또한 그들은 속어를 위한 새로운 문학 형식—때로는 시, 하지만 주로 산문—의 발달을 선도했다.

중세 말기 저술가들 대부분은 여전히 라틴어로 저술했지만, 가장 혁신적이고 야심적인 문학작품은 점차 유럽 각국의 속어로 집필되었다.
이런 발달 배후에는 중세 말기의 세 가지 근본적 변화가 가로놓여 있었다.

즉, 속어와 민족주의가 점점 더 동일시되었고, 평신도 교육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속어 문학을 읽는 대중이 등장했다는 점 등이다.

우리는 중세 말기 세 명의 주요 속어 작가—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1313~1375), 제프리 초서 Geoffrey Chaucer(1343?~1400), 크리스틴 드 피장 Christine de Pizan(1364~1430)—의 작품에서 이런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조반니 보카치오

 

보카치오 초상(사진 출처-https://brunch.co.kr/@kerol9/44)

 

보카치오는 궁정 로망스, 전원 서정시, 학술 논고를 포함한 몇몇 소품만으로도 문학사에서 영예로운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의 최대 걸작은 ≪데카메론 Decameron이다.

이것은 사랑, 성, 모험, 그리고 교묘한 속임수에 관한 100가지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흑사병을 피해 일시적으로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 교외의 별장에 체류한 7명의 젊은 숙녀와 3명의 신사가 세련된 파티 석상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다.

기존 자료에서 줄거리를 상당 부분 빌려왔지만, 보카치오는 특유의 푸성함과 재치로 그것들을 각색했다.

 

보카치오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문학적 '우아함'을 피하고 꾸밈 없는 구어체로 글을 썼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핏기 없는 노리개나 쌀쌀맞은 여신 또는 꿋꿋한 동정녀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과거 서양 문학에 등장했던 어떤 여성보다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남성과 어울린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성직자들 역시 지상의 천사보다는 보통 남자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다.

성 문제에 관한 보카치오의 묘사를 사실적이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다.

≪데카메론≫은 모든 인간적인 것을 건강하고 유쾌하게 다룬 작품이다.

 

 

●제프리 초서

 

자연주의 속어 문학의 창조자라는 점에서 보카치오와 여러모로 닮은 인물이 잉글랜드의 제프리 초서이다.

초서는 현대인도 비교적 적은 노력을 기울이면 그의 영어 문장을 읽어낼 수 있는 최초의 작가에 속한다.

특히 초서는 잉글랜드의 위대한 문학적 전통을 확립한 인물이자 영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네다섯 명 가운데 포함된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그를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바로 다음가는 인물로 꼽으며, 밀턴 John Milton,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디킨즈 Charles Dickens와 동급에 속하는 문인으로 평가한다.

 

초서는 여러 편의 매우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최대 걸작은 의심할 나위 없이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이다.

≪데카메론≫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하나의 테두리 안에 통합된 이야기 모음집인데, 초서는 일군의 사람들이 런던에서 캔터베리로 순례 여행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구사했다.

그러나 ≪데카메론≫과 ≪캔터베리 이야기≫ 사이에는 차이점 또한 있다.

초서의 이야기는 산문이 아닌 현란한 운문으로 되어 있으며,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다른 계급—기사도 정신이 충만한 기사, 성실한 대학생, 코에 사마귀가 있고 도둑질 잘하는 방앗간 주인 등—에 속해 있다.
활기찬 여성도 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여성은 잇새가 벌어지고 결혼 경력이 많은 '바스의 여장부'로, 그녀는 '사랑의 치료법'을 알고 있다.

각각의 등장인물은 자신의 직업과 세계관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초서는 이런 방식으로 대단히 다양한 인간 희극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는 보카치오보다 시야가 넓다.

보카치오 못지않게 재치 있고 솔직하고 건강하면서도, 때로는 보카치오보다 한층 심원하다.

 

 

●크리스틴 드 피장

 

중세 말기에는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 저술가들이 등장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최초의 직업 문필가 중에는 크리스틴 드 피장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크리스틴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성년기를 보냈는데,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 왕실의 궁정 서기관이었다.

남편이 죽자 홀로 된 크리스틴은 자신과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글을 썼다.

그녀는 기사도와 전쟁에 관한 논고—그녀의 후원자인 샤를 6세 Charles VI에게 바쳤다—를 포함해 매우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더 폭넓은 독자를 겨냥한 글도 썼다.

상상적인 논고인 ≪부인들의 도시 Le Livre de la Cité des Dames≫는 남성 비방자에 맞서 여성의 성격, 본성, 능력을 폭넓게 옹호한 비유적인 작품이다.

그녀는 또한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에 나타난 여성혐오주의에 관해 격렬한 논쟁을 펼친 활기찬 팸플릿 문학에도 참여했다.

이 논쟁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어찌나 유명했던지 '여성 논쟁 the debate over women'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크리스틴은 중세 최초의 여성 문필가는 아니었지만, 글을 써서 생계를 꾸린 최초의 속인 여성이었다.

 

 

○조각과 회화

 

자연주의가 중세 말기 문학의 지배적인 특징이었듯이, 중세 말기 예술의 특징도 자연주의였다.

13세기의 고딕 Gothic 조각가들은 전 시대의 로마네스크 Romanesque 조각가들보다 동식물과 인간의 실제 모습에 대해 한층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중세 초기의 미술이 추상적 디자인을 강조한데 비해, 중세 전성기에는 사실주의가 더 강조되었다.

13세기에 조각된 나뭇잎과 꽃은 직접 관찰에 입각한 것이 분명해서, 현대의 식물학자들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에 속하는지를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

인체 조각 역시 얼굴 묘사와 신체 비례에서 점차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변했다.

1290년 무렵에 이르면 리얼리즘 Realism에 대한 관심이 어찌나 높아졌던지, 합스부르크가 Haus Habsburg의 독일 황제 루돌프 1세 Rudolf I의 묘지 조각상 작업을 하던 한 조각가는 황제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 더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급히 서둘러 황제를 찾아갔다고 한다.

 

자연주의적 경향은 그 후 200년 동안 조각 장르에서 지속되었고, 그 경향은 필사본 채색과 회화에까지 확대되었다.
필사본 채색과 회화는 어떤 면에서 전혀 새로운 예술이었다.

벽화는 중세는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널리 애호되었는데, 특히 젖은 회반죽 위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fresco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은 프레스코 화법에 더해 처음으로 나무나 캔버스 canvas 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이러한 그림을 처음에는 템페라 tempera(물에 천연고무 도는 달걀흰자를 섞은 물감)로 그렸지만, 1400년 무렵에는 북유럽 최초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기법은 새로운 예술적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화가들은 이제 교회의 제단 뒤편에 종교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놀랍도록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필치로 후원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중세 말기의 가장 선구적인 화가는 피렌체 출신의 조토 Giotto di Bondone였다.

그가 벽이나 화판에 그린 종교적 인물들에는 휴머니티가 깊숙이 배어들어 있다.

조토는 탁월한 자연의 모방자였다.

그가 그린 인물이나 동물은 과거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비해 생동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스도가 성지聖枝 주일(부활절 직전의 일요일. 그리스도가 수난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 후대의 신자들은 이날 축성된 나뭇가지를 들고 기념한다)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소년들은 그 광경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다.

성 프란체스코(라틴어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영어 Saint Francis of Assisi)가 죽은 뒤 눕혀졌을 때 한 구경꾼은 그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성흔聖痕(스티그마타 stigmata: 예수가 받았던 상처와 비슷한 상처)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동정녀童貞女 마리아 the Virgin Mary의 부모인 요아킴 Joachim과 안나 Anna가 오랫동안의 이별 끝에 재회했을 때 서로 포옹과 입맞춤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서양 미술사상 최초의 깊고 부드러운 키스일 것이다.

조토는 삼차원적으로 미술을 인식한 최초의 화가였다.

한 미술사가가 말했듯이, 조토의 프레스코화 fresco는 처음으로 "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토가 죽은 뒤 이탈리아 화단에는 그에 대한 반동이 나타났다.

14세기 중반의 화가들은 한동안 자연주의를 포기하고, 마치 공중에 떠도는 것처럼 보이는 피폐하고 무서운 종교적 인물들을 그렸다.

그러나 1400년 무렵 화가들은 다시 땅으로 내려와 조토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위대한 르네상스 미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북유럽의 미술은 필사본 채색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 갑작스러운 발전이 있었다.

북유럽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1380?~1441),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1400?~1464), 한스 멤링 Hans Memling(1430~1494)—셋 다 플랑드르인 Flemish people(또는 Flemings)이다— 등을 꼽을 수 있다.

세 사람은 초기 유화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이다.
그들은 유화를 매개로 현란한 색채와 선명한 사실주의를 표현할 수 있었다.

반 에이크와 반 데르 바이덴은 깊은 종교적 신앙심을 표현하고 익숙한 일상생활의 경험을 세세하게 묘사하는데 뛰어났다.

신앙과 일상생활은 얼핏 양립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같은 실천적 신비주의 저서도 신앙과 일상생활의 연결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플랑드르 Flandre의 화가들이 온화한 표정의 마돈나 Madonna(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배경 그림으로, 사람들이 일상 업무에 종사하는 모습—심지어 한 남자가 벽에 오줌 누는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은 결코 신성모독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성聖과 속俗의 결합은 멤링의 작품에서는 분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종교화와 세속 초상화를 따로 분리해 그렸고, 두 분야에서 모두 탁월했다.

그러나 이 통합은 저지대 지방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브뢰헬 Brueghel과 렘브란트 Rembrandt의 작품에서 다시 달성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5. 2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