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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사정 "딱따구리" "노안도" "파초와 잠자리" "밤섬"

새샘 2024. 5. 20. 15:16

<세상 사람들아, 이 쓸쓸한 무덤에 갈퀴질을 하지 마라>

 

심사정, 딱따구리, 18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25x18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영조 시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 그 뒤를 이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시대였다.

그래서 영조 시대 명사들을 소개한 이규상李奎象의 ≪일몽고一夢稿≫ 중 <화주록畵廚錄>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온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정도도 비슷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화사적 평가를 볼 때 현재는 겸재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겸재는 진경산수라는 한국적인 화풍을 창출한 데 비해 현재는 화본풍畵本風(화첩에 실린 그림을 베껴서 그린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독창성, 개성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현재는 중국 화본풍에 머문 화가라는 평이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조순金祖淳도 ≪풍고집楓皐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겸재 정선은 말년에 그림이 더욱 공교롭고 신묘하게 되어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며 세상에 '겸현謙玄'이라 일컬어지나 그 아취雅趣(고아한 정취)는 현재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는 예찬倪瓚(원나라 화가), 심주沈周(명나라 문인화가)와 같은 중국 대가의 각체各體(글, 글씨, 그림 따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방식이나 격식)를 배워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겸재는 터럭까지도 모두 자득自得(스스로 깨달아 얻음)하여 필묵이 모두 조화를 이루니, 천기天機(하늘의 기밀 또는 조화의 신비)에 깊이 통달하지 않은 이는 대개 여기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필묵을 다루는 솜씨 자체는 현재가 뛰어났지만 그에게는 이를 더 높은 예술적 창조로 승화시킬 작가 의식이 없었다는 얘기다.

현재를 생각할 때 이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현재는 겸재의 제자가 아니던가.

그는 왜 스승의 화풍을 따르지 않고 화본풍의 관념산수에 머물렀을까.

 

그것은 그의 불우한 일생 때문이었다.

본래 현재는 청송심씨 명문가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 심지원은 소론계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효종의 딸을 셋째 며느리로 맞은 왕실 사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심익창이 과거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부정을 저질러 귀양 가고 나중엔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말하는데 연잉군이 훗날 영조) 시해 미수 사건에 연루되면서 가문이 몰락했다.

 

졸지에 파렴치 가문에다 대역죄인의 자손이 되는 바람엥 후손들은 세상에 고개를 들고 살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현재에게는 타고난 그림 솜씨가 있어서 화가로서 일생을 살고 회화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현재의 집안에는 본래 그림의 내림 솜씨가 있었다.

아버지 심정주는 포도 그림으로 유명했고, 외할아버지 정유점, 외삼촌 정유승, 정유복 거기에다 외사촌 누이까지 여류 화가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현재는 이런 배경에서 화가로 성장하여 필묵에서는 달인이 되었지만 사회적 활동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집 안에 쳐박혀 그림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겸재처럼 천하 명승을 노닐며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진경산수로 담아내는 삶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럴 처지도 못 되었고, 함께 어울릴 벗도 없었다.

누구는 그를 숙맥이라고 했다.

 

이처럼 바깥 세계와 차단된 현재의 그림은 더욱 관념풍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화실에 갇혀 반복 작업을 오래 계속하면서 필치는 날로 무르익어 붓을 다루고 먹을 사용하는 솜씨는 겸재도 따를 수 없는 원숙한 경지로 나아갔다.

그러나 삶은 단조로운 고독의 연속이었기에 그의 그림에는 항상 어딘지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

 

 

심사정, 노안도, 1763년, 종이에 담채, 27.0x29.5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심사정, 파초와 잠자리, 18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32.7x42.4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강가에 배를 대고 밤을 보내는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갈대밭으로 날아드는 가을날의 기러기를 그린 <노안도蘆雁圖>는 소재 자체가 그렇다 치더라도 <파초와 잠자리>를 그린 화조화花鳥畵(꽃과 새를 그린 그림)에서도 오히려 고독이 느껴질 정도다.

<딱따구리> 같은 작품에서는 떨어지는 꽃잎을 그려 넣어 더욱 애잔하다.

이처럼 흐드러진 멋과 아련한 운치를 능숙한 필치로 그린 화조화는 중국회화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작이다.

 

 

심사정, 밤섬, 경구팔경도첩 중, 1768년, 종이에 담채, 24.0x27.0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어쩌다 그린 진경산수에도 이런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들어 있는 ≪경구팔경도첩京口八景圖帖≫ 중 한강의 <밤섬> 그림을 보면 아주 밝은 화면이지만 애잔한 인상을 준다.

 

이런 현재의 예술 세계를 감상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어떤 미술사가의 해설보다도 그의 종손從孫(형이나 아우의 손자)인 심익운沈翼雲이 쓴 <현재거사玄齋居士 묘지명墓誌銘>이 가장 감동적이다.

 

"청송심씨는 그 공훈과 덕이 세상에서 빼어났다. 우리 만사부군晩沙府君(심지원)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했는데 거사는 그의 증손자였다.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물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네모나고 둥근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옛사람들의 화결畵訣(그림의 비결)을 보고 탐구한 뒤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여(목도심해目到心解) 드디어는 이제까지 해오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그윽하면서 소산한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래의 고루한 방법을 씻어내는데 힘써 중년 이후로는 융화천성融化天成하여(애써 이루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조화를 이루어) 잘 그리려고 기대하지 않아도 공교롭게 되지 않음이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50여 년 동안 근심과 걱정뿐,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날을 보내면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할 때도 물감을 다루면서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통유通幽(이치나 아취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그윽하며 미묘한 유현幽玄의 경지를 지남)의 경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멀리 이국땅까지 전파되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를 사모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사가 그림에 임한 바는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대성大成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거사가 이미 세상을 떠났건만 집이 가난하여 시신을 염殮하지도 못했다. 나 심익운은 여러 사람의 부의를 모아서 장례 치르는 것을 도와 모년 모일 그의 상자喪子 욱진郁鎭이 파주 분수원分水院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지는 만사부군의 묘소 동쪽 언덕이다. ······ 향년 63세에 돌아가시어 여기에 장례를 치렀다.

애달플지어다! 후세인이여, 이 무덤에 갈퀴질하여 훼손치 말지어다!"

 

심익운의 ≪강천각 소하록江天閣銷夏錄≫에 실려 있는 이 묘지명 끝에는 "현재거사를 장사 지낸 이듬해인 경인년(1770)에 심익운이 그의 묘지를 돌에 새긴다"라는 부기가 적혀 있다.

분수원에 있던 현재의 묘소는 청송심씨 문중 묘역 전부와 함께 다른 곳으로 이장되어 지금은 파주에 없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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