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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7: 중세 말기의 신앙 운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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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7: 중세 말기의 신앙 운동

새샘 2024. 5. 13. 17:54

제도 교회가 겪고 있던 곤란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기 평신도의 종교적 헌신은 과거 어느 때보나도 광범하고 진지했다.

중세 전성기 설교의 근본 주제는 구하고자 애쓰는 모든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구원이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세 말기에 접어들자 신자 개개인이 신에게 나아가는 경로를 급격히 다양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경로들 중 일부는 교회가 이단이라고 선언한 방향으로 신자를 이끌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의 그리스도교도 대부분에게 이단은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교회와 지방 교구 사제가 거행하는 성사가 그들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말기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구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성사, 의식, 설교

 

1300년에 이르러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방 교구 교회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사제는 평신도를 위해 교회의 성사를 주관했다.

성사聖事—세례, 견진, 미사, 고해, 혼배, 신품, 종부와 같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들—는 신의 은총과 권능을 개개의 신자에게 전하는 의식이었다.

중세 말기의 신앙생활은 성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세례洗禮는 그리스도교도를 교회생활에 입문시키는 것이었다.

중세 말기의 세례는 유아가 태어난 직후 베풀어졌는데, 세례가 없다면 구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견진堅振은 세례 성사에서 아이에게 했던 약속을 '확인'했다.

사제가 주관하는 미사 missa(매주 일요일과 종교적 축일에 거행)에서 독실한 그리스도교신자가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성변화聖變化를 이루었다.

사제 앞에서 하는 죄의 고해告解는 신의 용서를 보증해주었다.

그러나 지상에서 죄에 대한 완전한 참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은 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연옥煉獄에서 고해가 이루어져야만 했다.

혼배婚配 성사(혼인 성사)는 비교적 새로운 형태의 성사로서 중세 말기에 점점 강조되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교회의 축복으로 엄숙하게 올린 그리스도교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신품神品 성사는 성사를 통해 신의 은총을 지상에 가져다주는 특별한 권능 즉 신권神權을 사제에게 부여했는데, 이 권능은 부도덕한 삶을 산 사제일지라도 소멸되지 않는다.

종부終傅 성사 또는 병자病者 성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그것은 모든 죄에 대한 최종적인 고해를 확증하는 것으로, 구원의 확신 속에서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세례와 마찬가지로 종부 성사는 비상 상황에서 모든 그리스도교도가 집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밖의 성사는 서품된 사제만—견진과 신품의 경우 주교만이 집전할 수 있었다.

 

성사 제도는 중세 말기의 다른 신앙적 관행의 토대가 되었다.

순례巡禮는 고해의 한 형태로서 연옥을 머무는 시간을 줄여줄 수 있었다.

십자군 참가는 극단적 순례로서 참가자에게는 그가 평생 지은 죄 때문에 바쳐야 할 모든 고해가 완벽하게 충족된다는 약속이 주어졌다.

다른 많은 경건한 행위—예를 들어 로사리오 rosario 기도(묵주默珠 기도)나 빈민 구제—도 죄에 대한 고해 및 구원을 돕는 선행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신앙에는 단순한 고해 이상의 것이 있었다.

모든 선행과 마찬가지로 기도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성인, 특히 동정녀童貞女 마리아 Maria(성모聖母 마리아)는 신의 강력한 중재자로 간주되었다.

위험에 처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신자는 성인聖人(성자聖者)에게 기도했다.

몇몇 성인은 특별한 질병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치질에 걸릴 경우 성 피아크르 Saint Fiacre에게 기도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성인에 대한 헌신은 성인의 유물—성인의 뼈나 옷 조각—과 접촉함으로써 더욱 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신앙에서 미사에서의 빵과 포도주만큼 강력하고 핵심적인 것은 없었다.

빵과 포도주는 사제의 성별聖別(신성한 일에 쓰기 위하여 보통의 것과 구별하는 일)을 거쳐 그리스도의 참된 몸(성체聖體과 피(성혈聖血)가 되었던 것이다.

신자들은 때로 미사 성찬용 빵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서, 병든 가축에게 먹이는가 하면, 하루에 되도록 여러 차례 성별된 빵을 보기 위해 이 교회 저 교회를 몰려다니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믿음과 관행 그리고 성인 유물에 대해 교회 개혁가들은 미신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사기꾼 성직자 집단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평신도 모르게 슬쩍 끼워 넣은 것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이 등장하고 지속된 이유는, 평신도가 그것을 중단시키려는 교회 개혁가의 노력에 빈번히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그것에 깊이 헌신했기 때문이다.

 

 

○종교와 사회 질서

 

중세 말기 사람들은 종교를 사회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이해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삶의 중심이었다.

교회 마당은 공동체의 만남의 장소였고 때론 시장 역할도 했다.

교회 건물은 외적의 공격이 있을 땐 피난처였고, 마을 대소사를 위한 집회 장소였다.

교회 건물의 유지, 보수는 마을의 공동 책임이었다.

교회의 축일은 한 해의 변화를 나타냈고, 교회의 종소리는 하루의 시간을 표시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축일은 교회가 숙한 더욱 큰 단위의 지역 공동체 또는 국가 공동체의 축일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중세 말기 종교의 인습적 관행에서 영적 만족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중세 말기 성인들은 죽은 후 명예를 얻기는 했지만, 그들 중 상당수의 삶은 분명 논란거리였다.

잔 다르크 Jeanne d'Arc의 경우에서 보듯이 성인과 미녀 사이의 구분선은 매우 흐릿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이탈리아어 Santa Caterina da Siena)(영어 Saint Catherine of Siena)는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 집안일 돕기를 거부하고, 자택의 방 두 개 가운데 하나를 기도실로 쓰면서, 부모와 12명의 형제자매를 한 방에 지내게 했다.

잉글랜드 노르위치의 성녀 율리아나 Julian of Norwich는 다니던 교회 곁에 지은 작은 암자에 들어가 세상에서 은둔한 채 여생을 기도와 명상에 바쳤다.

잉글랜드의 마저리 켐프 Margery Kempe는 십자가상 예수의 고난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여러 시간 동안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고, 이 때문에 미사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었기에 교구민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다.

 

개인 차원의 비범한 신앙심은 경외심을 자아내는 것이었지만, 교회의 종교적 통제권 및 개인과 공동체의 연결고리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위험한 것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일부 신자들은 엄격한 영적 수련을 통한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궁극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신비적 추구에 성공한 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신의 교회에 복종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층 온건한 인물일지라도, 속어로 종교 서적을 저술해 평신도가 쉽게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위험 지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의 도미니쿠스 Dominican Order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1260?~1327)는 신이 든 모든 인간 영혼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어떤 힘 즉 '영혼의 불꽃 the spark of the soul'이 있다고 라틴어와 독일어로 가르치기도 하고 글도 썼다.

인간은 모든 육체적 감각을 부인함으로서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할 수 있고, 그곳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크라르트는 교회 출석을 그만두라고 권하진 않았지만—그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므로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신을 찾고자 하는 서람들에게 내면으로의 여행이 성사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평신도를 상대로 한 설교에서, 개개인의 의지에 따라 신성神性(신의 성격이 또는 신과 같은 성격)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교회 당국은 '무지하고 규율 없는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위험한 극단적 행위'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교리적 정통성을 변명했지만 그의 가르침 중 일부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국어판 표지(사진 출처-쿠팡플레이 홈페이지 도서/음반/DVD 광고)

 

좀 더 안전한 정통의 길을 걸었던 사람은 15세기에 수도사와 평신도를 상대로 설교한 독일의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같은 실천적 신비주의자였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영어 The Imitation of Christ, 한자 준주성범遵主聖範)(1418~1427 무렵)는 신과의 완전한 몰아적 합일을 추구하기보다 일상생활에서 신의 임재臨在 즉 신과 함께함을 느끼고자 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독자에게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살면서 경건한 그리스도교도가 되라고 가르쳤다.

이 책은 미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외적 경건보다 내면의 경건을 강조했고, 신자에게 성경을 묵상할 것과 소박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을 촉구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라틴어로 쓰였지만 신속히 유럽의 주요 속어로 번역되었다.

최근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 책은 성경을 제외한 다른 어떤 그리스도교 서적보다도 널리 읽혔다.

 

 

○롤라드파와 후스파

 

중세 말기의 대중적 이단 운동은 12·13세기에 비해 더 널리 확산된 것도 아니었고, 교회에 더 위협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보헤미아 Bohemia에서는 이단 운동이 교회와 국가 양쪽의 기존 권위에 심각한 도전장을 던졌다.

잉글랜드에서는 극단적 예정설을 주장한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의 신학 교수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1330?~1384)에 의해 롤라드파 Lollards 이단 운동이 출발했는데, 그는 부패한 교회가 주관하는 성사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위클리프는 잉글랜드 왕에게 교회 재산을 압류할 것, 부패한 사제와 주교를 사도적 청빈과 경건의 기준에 합당한 인물로 대치할 것 등을 촉구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롤라드파가 유일한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교회의 성사를 교구민에게서 돈을 갈취하기 위한 기만적 관행이라며 거부했다.

부패한 교회 제도를 대신해 롤라드파 설교자들은 영어 번역 성경(성경의 영어 번역은 위클리프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및 그 밖의 속어 번역 종교 문헌을 지참하고 시골을 여행하면서 평신도가 직접 읽도록 권했다.

 

14세기 말 롤라드파 운동은 초기에 재정적 도움을 준 귀족 지지자를 포함해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렸으나, 1414년의 봉기 실패 이후 귀족 지지자를 잃고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롤라드파는 16세기에도 살아남아 교회 당국자를 수시로 경악케 만들었지만, 중세 말기 종교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여겼던 거의 모든 것[순례, 성사, 성상聖像(성인의 화상畫像이나 초상)]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서면서 소수파 운동을 뛰어넘지 못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보헤미아에서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인 체코 Czech얀 후스 Jan Hus(1373?~1415)는 프라하 Praha(영어 Prague) 카를로바 대학 Univerzita Karlova(영어 Charles University)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로서, 많은 청중을 상대로 '세상과 육신과 악마'를 통렬히 비난하는 설교를 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성체 성사를 거부함으로써 많은 지지자를 잃었던 롤라드파와는 달리, 후스는 평신도가 미사의 성별된 빵(성체)뿐만 아니라 성별된 포도주(성혈)—중세 말기 교회에서 성혈은 사제만 받을 수 있었다—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성체가 중심임을 강조했다.

양형영성체론兩形領聖體論 Utraquism으로 알려진 후스의 이 요구 사항은 보헤미아 평신도들 사이에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후스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도 후스를 지지했는데, 그들의 지지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민족적 자부심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스가 요구한 교회 개혁이 지난 세기 동안 교회에 빼앗겼던 세입을 되찾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415년 후스가 자기 주장을 옹호하고 고위 성직자들에게 전면적 교회 개혁을 설득하고자 콘스탄츠 공의회 Council of Constance에 가기로 작정했을 즈음, 보헤미아인 Bohemians 대부분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후스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보장은 그가 도착하자마자 철회되었다.

공정한 청문의 기회를 제공받기는커녕 후스는 이단으로 선언되어 화형대에서 불태워지고 말았다.

 

보헤미아의 후스 지지자들은 즉시 반란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귀족은 그 틈에 교회 토지를 차지했고 사제, 직공, 농민 등은 후스가 추구했던 종교적 개혁과 사회 정의를 위해 집결했다.

1420년부터 1424년 사이에 타보르파 Taborites로 알려진 급진적인 후스파 Hussites 군대는 탁월한 맹인 장군 얀 지슈카 Jan Žižka(영어 John Zizka)(1376?~1424)의 지휘 아래 교황이 보낸 십자군 침략자를 완벽하게 물리쳤다.

이 승리는 타보르파의 급진주의를 증폭시켜 종말론적 열정으로 치닫게 했다.

그러다 1434년 좀 더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후스파가 급진파를 압도했고 교회와의 타협안—보헤미아 교회 안에서 양형영성체론을 가톨릭 정통과 나란히 인정하는—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17세기까지 온전히 가톨릭교회로 복귀하지 않았다.

 

롤라드파와 후스파는 여러 면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양자는 모두 대학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성직자에게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 것을 요구했고, 특히 초기에 귀족계급의 지지를 얻어냈다.

두 운동은 또한 대단히 민족주의적이어서 라틴어 대신 그들의 속어(영어 English와 체코어 Czech)를 채택했으며, 스스로를 국제적인—따라서 외국풍의 제도 교회를 거부하는 잉글랜드인 English 또는 체코인 Czech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은 또한 평신도에 대한 속어 설교를 특히 강조했다.

그들이 확립한 모든 특징은 그 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한층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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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5.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