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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의 변방에서 튀르키예의 기원을 찾다

새샘 2024. 5. 15. 13:07

유라시아 반대쪽 아나톨리아 반도 Anatolia peninsula의 강대국 튀르키예 Türkiye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다.

튀르키예는 유럽과 근동 사이에서 강력한 군대로 주변을 호령한 오스만튀르크제국(또는 오스만투르크제국) Ottoman Turkish Empire의 후손이지만, 우리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사실 튀르키예가 한국에 느끼는 형제애는 자신들이 유럽 동쪽 깊숙한 유라시아의 중심에서 기원했다는 역사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현대 튀르키예의 역사책 첫머리에는 알타이 Altai와 몽골 Mongolia에 있었던 유목제국 흉노匈奴가 등장한다.

지금의 튀르키예는 유럽과 근동을 잇는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지만, 자신들을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7세기 알타이에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돌궐突厥(튀르크 Türk 또는 투르크 Turk)이라는 나라를 만들었고, 15세기가 되어서야 지금의 튀르키예가 있는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이주해왔다.

근동과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 반도는 15세기 이전까지는 튀르키예인(또는 투르크인) Turkish들의 역사가 아닌 셈이다.

 

튀르키예가 세계적인 그리스와 근동 문명을 마다하고 굳이 머나먼 알타이,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기원을 찾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오스만튀르크가 멸망하고 지금의 튀르키예가 들어선 사건이다.

신생국가 튀르키예는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취하는 한편 머나먼 미지의 땅에 자신의 고향을 둠으로써 튀르키예의 정체성이 서양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양면 정책을 실시했다.

 

머나먼 극동 지역의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며 아낌없는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현대 유럽의 일부로 살면서도 정체성은 아시아에 두는, 그들의 이중적인 역사인식의 발로인 셈이다.

유라시아 동쪽에 자신의 기원을 둔 튀르키예의 사례는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과 고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이 현실의 치열한 일부분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늦사랑에 빠진 고고학자가 발견한 돌궐

 

돌궐제국의 역사를 증명해준 획기적인 발견을 한 러시아 학자 니콜라이 야드린체프(위)와 그가 몽골에서 발견한 튀르크 문자가 새겨진 오르콘 비문(아래)(사진 출처-출처자료1)

 

튀르키예인의 조상인 튀르크인들은 중국 역사에 돌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4~5세기 무렵 알타이 고원지대에 살았다.

돌궐족은 그들이 복속하던 유연柔然을 몰아내고 유라시아 초원의 패권을 장악한 돌궐제국(튀르크제국 또는 투르크제국 Turkic Empire)으로 이어졌다.

역사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돌궐제국의 실체가 그들의 문자를 통해 생생하게 우리에게 등장한 것은 약 150년 전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비문 덕택이었다.

2018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은 '칸의 제국 몽골'이란 제목의 몽골 특별전을 개최했다.

화려한 황금 유물 사이에 거대한 비문의 탁본과 고古튀르크의 왕이었던 빌게 칸 Bilge Khan(재위 716~734)의 석인상石人像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두 전시품은 말로만 전해지던 튀르키예인들의 최초 국가인 돌궐제국의 역사를 증명해준 획기적인 유물이다.

 

빌게 칸이 친동생인 퀼 테긴 Kül Tigin을 추모하기 위해 732년에 세운 비석은 앞뒤로 각각 튀르크 문자와 한자漢字로 새겼는데, 한자는 당나라 현종이 직접 지은 추모글이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화려한 황금 못지않은 시베리아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다.

유목민이 만든 돌궐제국은 그들만의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한자와 함께 썼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튀르크와 튀르키예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이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은 러시아 학자인 니콜라이 야드린체프 Nikolai Yadrinchev다.

 

그의 발견 못지않게 그의 삶 역시 상당히 극적이다.

야드린체프는 19세기 후반 시베리아와 몽골 일대를 열정적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많은 박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고대 유적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몽가이자 역사가였던 그는 시베리아를 제정러시아로부터 독립시켜 스위스나 미국 같은 풍족한 낙농국가로 만들고 싶었다.

시베리아 조사는 그 가능성을 탐사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시베리아를 독립시키려는 그의 꿈은 실패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튀르크 문자를 발견함으로써 결국 유라시아 역사에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야드린체프는 1889년에 몽골의 오르콘강 Orkhon River 상류를 조사하다가 위구르제국 Uyghur empire 의 수도인 하라-발가스 Khara-Balgas(오르두-발리크 Ordu-Baliq라고도 부름)와 고튀르크 문자가 새겨진 비문인 '오르콘 비문'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정체불명의 글자는 생김새가 중세 북구에서 쓰이던 룬 Rune 문자와 비슷하여 '예니세이강 Yenisei River의 룬 문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르콘 비문이 발견되자마자 유럽의 모든 언어학자들이 경쟁적으로 달려들어 문자 해독에 나섰다.

그리고 1893년에 덴마크 학자 빌헬름 톰센 Wilhelm Thomsen이 최초로 그 뜻을 파악하는데 성공한다.

그가 처음으로 해독한 단어는 '신' 또는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 Tengri'였다.

튀르크 문자가 비교적 쉽게 해석될 수 있었던 이유는 튀르크 문자가 한글처럼 표음문자였으며, 돌궐제국의 사람들이 비문을 세울 때에 한 면은 튀르크 문자를 쓰고, 그 반대 면은 중국 한자를 썼기 때문이다.

 

야드린체프가 오르콘 비문을 발견하게 된 배경에는 사랑했던 아내와의 사별이 있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하목수夏目漱)의 소설 ≪도련님≫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이상을 좇던 열혈 운동가였다.

원래 시베리아의 큰 도시인 옴스크 Omsk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돈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시베리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유형流刑(귀양) 생활을 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신문사를 운영하며 대중운동을 하다가 자신의 일을 도와주던 열네살 어린 아델라이다 바르코바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야드린체프는 결혼 후 딸도 얻고 다복한 생활을 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 네 살이 되던 해에 아내가 사망한 것이다.

야드린체프는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독에 빠져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이에 보다 못한 그의 동료인 유명한 실크로드 탐험가 그리고리 포타닌 Grigorii Potanin이 그에게 몽골 조사를 권유했다.

몽골의 푸른 초원은 야드린체프에게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했고, 오르콘 비문을 발견하는 천운도 얻었다.

하늘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는 대신 세계적인 명성을 준 셈이다.

 

그의 극적인 인생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시베리아의 유명인사가 된 홀아비 야드린체프는 사별한 아내의 친구였던 알렉산드라라는 젊은 여의사에게 반했다.

야드린체프는 그녀를 자신이 일하는 알타이로 초청해서 청혼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야드린체프를 단순히 존경할 뿐이라는 이유로 그의 애타는 구애를 거절했다.

절망에 빠진 야드린체프는 다시 알콜중독자로 돌아갔다.

그는 1894년 알타이 바르나울 Barnaul 시에서 알렉산드라에게 마지막 구애를 했고, 또다시 거절당하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아편을 마셔 자살시도를 했다.

놀란 알렉산드라가 급하게 응급처치를 했지만 결국 야드린체프는 그녀의 품에서 죽고 말았다.

튀르키예의 역사를 여는 획기적인 발견을 한 세계적인 학자요, 시베리아 고고학의 개척자였던 야드린체프는 그렇게 너무나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인복이 많았던 그였기에 그의 친구들은 가십거리가 될 법한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야드린체프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야드린체프 죽음의 진실은 그를 아꼈던 친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려졌다.

그의 외동딸인 리디아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다행히 아버지의 훌륭한 재질은 이어받았다.

리디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련 시절 북극권의 원주민을 연구하는 민속학자로 활동했다.

그의 손자와 증손자들도 문필가로 활약하고 있다.

 

 

○아타튀르크, 튀르키예를 세우다

 

시베리아의 한가운데 위치한 알타이의 튀르크 역사가 20세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키예에 다시 등장한 데에는 튀르키예의 국가 영웅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ürk(케말 파샤라고도 불린다)의 역할이 컸다.

 

본래 알타이에서 살던 튀르크의 일파였던 오스만튀르크는 서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메흐메트 2세 Mehmet II(재위 1444~1446, 1451~1481)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튀르키예인들은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이후 오스만튀르크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오스만튀르크제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의해 공중분해될 위험에 처했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아타튀르크가 1923년에 지금의 튀르키예를 건국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아타튀르크는 세속주의와 친서방주의를 표방하는 정책을 펼쳐 아랍을 탈피하는 동시에 유럽에 동화되고자 했다.

튀르키예가 차지한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가 거대한 지역임은 분명하지만 오스만튀르크 시절에 비하면 사실 너무나 작은 땅이었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마저도 아르메이나인 Armenians, 쿠르드족 Kurds을 비롯하여 튀르키예와 쉽게 조화될 수 없는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었다.

세계주의를 지향하던 오스만튀르크제국 시절에는 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다민족 사회가 무리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내세운 유럽의 국가들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럽과 겨루며 근대화를 이루어야 할 신생국가 튀르키예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그랬듯 튀르키예인 중심의 민족국가를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은 튀르키예인을 '황인종' 또는 '2급 인간'이라며 차별했고, 튀르키예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민족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이런 대내외적인 갈등 상황에서 신생국가 튀르키예는 유럽과 동등하게 만드는 자신들만의 역사를 강조할 필요성이 커졌다.

 

다민족국가에서 민족국가로 거듭나는 시점에 아타튀르크는 유라시아 깊숙이 있는 미지의 땅에서 튀르키예인이 기원했다는 내용을 담은 <튀르키예 역사의 테제 Türk Tarih Tezi>를 발표한다.

1923년에 발표된 이 테제는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기원한 튀르크인들의 일파는 히말라야 고원으로, 또다른 일파는 아나톨리아 고원(현재의 튀르키예)으로 와서 근동 문면의 한 축을 이루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유라시아 전역에 넓게 펴져서 살고 있는 튀르크 계통의 사람들은 곧 튀르키예의 일부로 보는 범투란주의 pan-Turanism를 정립했다.

미지의 거대한 영토를 튀르키에의 역사에 포함시킴으로써 튀르키예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당시는 서구 열강의 강세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동방주의東方主義)의 등장으로 강대했던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이 부정되는 시점이었다.

아타튀르크는 새로운 역사를 들고 나오면서 유럽인들과 구분되는 튀르크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유럽과의 동화를 지향하는 세속주의의 진행 과정에 튀르키예인까지 유럽에 동화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한국이 튀르키예의 이웃이 된 이유는

 

우리에게 튀르키예는 형제의 국가로 기억된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2002년 한일월드컵의 한국-튀르키예 간 3~4위전은 승패를 떠나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비행기로 12시간이나 걸리는 유라시아 반대쪽의 튀르키예가 어쩌다 우리의 형제국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흔히 한국전쟁 때에 네 번째로 큰 규모인 1만 4000여명 원조군을 파견했던 인연을 떠올린다.

한국전쟁 때에 튀르키예 말고도 수많은 나라들이 원조를 하고 피를 흘렸지만, 튀르키예만큼 형제애를 강조하지는 않는 걸 보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튀르키예와 한국의 형제의식은 범투란주의라는 튀르크 계통의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튀르키예가 자신들의 최초 국가로 간주하는 흉노는 고조선과 인접해 있었고, 고구려 시기에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니 튀르크 계통의 사람들은 고대 한국으로 보자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한 형제 같은 나라가 된다.

이뿐이 아니다.

튀르키예는 유라시아 전역에 있는 튀르크 계통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형제 또는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동부 시베리아 북극권에서 살고 있는 사하족 Sakhas(또는 야쿠트족 Yakuts)까지도 자신들과 이어져 있다고 본다.

 

튀르키예가 극동의 나라에 형제애을 느끼게 된 동기는 엉뚱하게도 한국이 아니고 일본이었다.

오스만튀르크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은 동양의 작은 나라인 일본이 유럽의 열강 러시아를 꺾어버린 대단한 사건이었다.

유럽의 변방에 위치했지만 머나먼 동방인 알타이에서 기원한 튀르키예로서는 극동에 있는 일본의 약진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일은 튀르키예가 자신들이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형제국가라는 표현은 튀르키예가 건국된 직후 일본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과 친선관계를 수립하면서 등장했다.

물론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놓고 본다면 튀르키예와 이웃 국가지만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는 아르메니아 Armenia(기독교 중심의 국가)와 아제르바이잔 Azerbeijan(이슬람 중심의 국가)의 미묘한 상황을 제대로 구분하는 한국인이 거의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이렇게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무너진 이후 아타튀르크가 튀르키예를 재건하고 그들의 국가를 보존하는 데에 유라시아 사관은 큰 역할을 했고, 그 사이에 형성된 극동에 대한 호감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에 대대적인 파병과 원조로 한국을 진정으로 도와주며 형제국가가 되었다.

 

튀르키예와 한국의 우호관계는 냉정한 국제관계 속에서 계속 이어나가야 할 중요한 외교 자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들어 현대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20세기의 정치 상황이 그 이면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대사를 끌어와 현대의 정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과정이 각국의 우호를 증진시키기보다는 주로 주변 국가와의 갈등이나 전쟁의 빌미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히틀러 Hitler는 게르만족 Germanic의 기원인 아리안족 Aryans이 티베트 Tibet나 파미르 Pamir 고원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히틀러가 저지른 유대인 Jews과 집시 Gypsy에 대한 인종청소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대인 역시 중동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유대인이 내세운 명분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었다.

그리고 갈등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征韓論과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앞세우며 한반도와 만주를 침략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렇게 근대국가가 되면서 미지의 땅은 각국의 현실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이용되었고, 그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고고학 자료를 사용했다.

 

한국과 튀르키예의 우호관계는 고대사의 인연이 현대의 우호로 이어진 드문 경우다.

그런 점에서 다른 정치적인 셈법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고대 미지의 땅에서 벌어진 역사를 현대로 가져와 분쟁의 근거로 사용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런 상황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몇천 년 전의 역사를 현대의 이해에 맞게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역사를 오해하고 재단하는 시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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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5.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