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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으로 쌓아올린 박물관

새샘 2024. 5. 30. 15:33

미국이나 유럽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다.

그리고 이곳을 여행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여행 코스 중 하나가 박물관이다.

미국과 유럽의 박물관에는 세계의 보물들이 넘쳐난다.

대항해시대를 거쳐서 최근 제국주의 시대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각국의 유물을 자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이 그러하고 영국의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 British Museum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작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던 미국의 여러 박물관에도 다른 나라의 유물이 많은 것은 좀 의아하다.

유럽을 이어 뒤늦게 부국이 된 미국의 박물관들 상당수는 약탈이 아닌 기업가들이 기부한 다양한 컬렉션 collection(수집된 예술품)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고 미국을 무작정 칭송할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유물을 사 모을 때 사용한 부의 축적 과정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 미국을 대표하는 박물관 기부자인 아서 새클러 Arthur M. Sackler(1913~1987) 가문의 마약 스캔들이 폭로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화려한 부자의 고상한 취미에 감추어진 21세기 박물관의 실체를 살펴보자.

 

 

아시아 유물 수집의 '큰손' 아서 새클러

 

미국의 수도 워싱턴 Washington D.C.에는 1858년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국립박물관인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이 있다.

스미스소니언협회라는 미국 최대의 국영박물관재단 산하에서 관리하는 일련의 박물관들을 말한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박물관 하나가 아니라 워싱턴 기념비 Washington Monument와 미국 국회의사당 United States Capitol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11개의 박물관이 위치해 있어, 내셔널 몰 National Mall이라고도 불린다.

그중 스미스소니언의 자연사박물관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2014)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최근 이름이 바뀐 국립아시아미술관(위)과 베이징대학 새클러 박물관(아래). 모두 아서 새클러의 기부로 탄생한 박물관이다. (사진 출처-출처자료1)

 

동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동아시아의 미술품을 보관한 아서 M. 새클러 갤러리 Arthur M. Sackler Gallery라는 이름도 익숙할 것이다.

미국 최대의 동아시아 미술품 수집가인 아서 새클러의 기부를 기념하여 명명된 이 박물관은 미국 안에서 한·중·일의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동아시아 연구의 보고다.

그런데 2020년 2월 학회 참석차 다시 워싱턴을 가보니 2019년 12월을 기점으로 아서 M. 새클러 갤러리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아서 M. 새클러와 또다른 기부자의 이름을 딴 프리어 갤러리 Freer Gallery를 통합해 '국립아시아미술관 National Museum of Asian Art'으로 재개관한 것이다.

얼핏 보면 단순한 박물관 조직 개편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배경에는 최근 20년간 미국을 뒤흔들고 있는 거대한 마약 스캔들이 있다.

 

아서 새클러는 러시아(벨라루스 Belarus)의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 브루클린 Brooklyn의 빈민가에서 성장했다.

새클러 형제는 1950년대에 작은 약품회사인 퍼듀 파마 Purdue Pharma를 인수해 사업을 급성장시켰다.

새클러 형제의 형인 아서 새클러는 사업보다는 예술품을 모으고 평가하는 일에 더 보람을 느꼈고, 스스로를 문화재 수집가가 아니라 큐레이터 curator(박물관 학예사)라 자부할 정도로 전문 지식도 풍부했다.

실제로 그의 부에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결합되어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명품 예술품을 모았다.

 

그리고 말년에 아서 새클러는 미국에서 아시아 문화재 연구의 가장 '큰손'으로 꼽힐 만큼 아낌없는 기부를 했다.

그 덕에 하버드대학 Harvard University, 프린스턴대학 Princeton University 등에 대학 박물관이 세워졌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The Met)과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Solomon R. Guggenheim Museum에도 아시아관이 만들어졌다.

새클러는 심지어 중국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베이징대학(북경대학北京大學) Peking Unviersity 서문 근처에 위치한 베이징대학 새클러 미술 및 고고학 박물관 Sackler Museum of Art and Archeology at Peking University도 1980년대에 새클러의 기부금으로 세운 것이다.

아서 새클러 덕에 미국의 세계적인 박물관을 가면 빠짐없이 아시아의 명품을 볼 수 있고, 그중 상당수는 본국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아서 새클러의 문화재와 박물관 사랑의 하이라이트는 워싱턴에 개관한 아서 M. 새클러 갤러리다.

아쉽게도 그는 개관 4개월 전인 1987년 5월에 죽었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워싱턴 박물관 거리에 당당하게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세워지면서 그의 이름은 영예롭게 영원히 기억되는 듯했다.

그리고 아서 새클러의 유지를 받은 새클러 가문의 자손들은 기부와 박물관 일에 종사하면서 부자 명문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미국을 뒤흔든 마약 스캔들

 

하지만 그들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균열의 시작은 1990년대 중반 몇백만 명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며 미국 전체를 뒤흔든 마약 스캔들이었다.
이 마약의 확산은 기존의 경로와도 사뭇 다르고, 그 피해 또한 막대했다.

다른 어떤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한 헤로인계 heroin인데다 미국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급격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넷플릭스 Neflix에서 공개한 <죽음의 진통제 The Pharmasist>라는 다큐멘터리 documentary(다큐 docu: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물이나 기록물)는 평범한 중산층 백인 약사가 자신의 아들을 마약으로 잃은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의 아들이 복용한 마약은 합법적으로 의사를 통해서 처방받은 약품이었다.

그의 아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약을 처방받아 마약에 중독되었고, 속절없이 죽고 말았다.

 

마약이라고 하면 갱단이 개입되어 길거리에서 몰래 거래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의사로부터 처방전을 받아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니 너무 놀라웠다.

이런 마약성 진통제를 만들어 대량으로 공급한 악덕 기업이 바로 아서 새클러의 가문이 소유한 퍼듀 파머다.

 

퍼듀 파머가 출시한 약품은 헤로인을 기반으로 만든 옥시콘틴 oxycontin이다.

1996년에 출시된 옥시콘틴은 약효가 12시간이나 지속되는, 헤로인보다 두 배나 효과가 좋은 무시무시한 마약성 진통제였다.
이 위험한 약을 팔면서도 퍼듀 파마는 옥시콘틴이 전혀 의존성이 없으며 통증을 완벽하게 조절하는 기적의 약이라고 허위 광고를 했다.

또한 의사들이 이 약을 처방하도록 의사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퍼듀 파머의 로비력과 마케팅은 곧 수십만 미국인의 헤로인 중독으로 이어졌다.

 

옥시콘틴의 중독이 심각한 또다른 이유는 그 대상이 마약중독자가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이었다는 것이다.

마약과는 전혀 상관없던 사람이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옥시콘틴을 처방받아 먹는다.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되어도 옥시콘틴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되고, 몇년 뒤에는 회복 불가능한 마약중독자가 되어 재산을 탕진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지금도 관련 기사나 다큐멘터리의 댓글을 보면 어이없게 중독자로 전락하여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제는 헤로인보다 100배나 강한 진통제인 펜타닐 fentanyl의 오남용이 심해지고 있다.

 

지금도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마약 스캔들의 시작은 바로 새클러 가문의 부도덕한 사업이었다.

새클러 박물관의 화려한 유물과 아름다운 기부의 원천이 몇십만 명의 목숨이었던 셈이다.

옥시콘틴은 아서 새클러가 죽고 발매되었으니 그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퍼듀 파머는 사업 초창기인 1950년대부터 의도적으로 의존성을 강화한 약을 만들어왔다.

또한 의사들에게 로비를 하고 외판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마케팅 전략은 바로 아서 새클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비판에 직면한 새클러 가문은 2019년 9월 파산신청을 하면서 아서 새클러의 명예만이라도 지키고자 했지만 미국인들의 분노의 불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지우기에는 역설적으로 아서 새클러가 박물관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화려한 유물에 숨겨진 욕망

 

새클러 가문의 악명이 널리 알려지면서 분노한 사람들이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이에 새클러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던 박물관들이 하나둘씩 이 가문의 지원을 거부하고 새클러의 이름을 지우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기부자 명단에서 새클러 재단의 이름을 지우고 앞으로 지원을 받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버드대학도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폐합하는 방식으로 새클러 박물관을 없앴다.

이 흐름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도 동참하여 2019년 12월에 그 이름을 바꾼 것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새클러의 이름은 금기시될 것 같다.

 

새클러 컬렉션은 동아시아 고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로망 roman(로맨스 romance, 낭만浪漫)과도 같은 존재였다.

필자도 러시아 유학 시절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당시 갓 생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통해 러시아과학원에서 받은 한달 월급에 맞먹는 돈을 들여 새클러 컬렉션의 책을 산 적이 있다.

그의 수많은 컬렉션 중 중국 오르도스 Ordos 지역의 유목민이 남긴 청동기들을 모아놓은 도록은 박사논문을 쓸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고고학이나 미술사 전공자 중에서 필자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새클러의 공적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렇게 내쳐진다면 기부를 하려던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대부분의 기부자들이 기업가들일 텐데 솔직히 말하면 회사를 운영하면서 크든 작든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기부가 줄어드는 부작용이 아무리 크다 한들 가족을 잃거나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몇백만 명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그들이 호화로운 박물관에 새겨진 '새클러'라는 이름을 보며 느낄 참담함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한편 박물관의 빠른 대처가 반가우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의 상당수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불법적인 경로로 들어온 것이다.

새클러의 일로 인해 박물관의 어두운 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각 박물관들이 빠르게 새클러의 이름을 지우고 있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화재계에서 유독 칭송받는 기부자들이 있다.

가산을 팔아 국보를 지켜낸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이 좋은 예이다.

그외에 알려지지 않는 개인 기부자들도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의 2층에는 수많은 기증자들의 유물 전시장이 있어서 각각의 사연들으로 그들의 뜻을 기린다.

물론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선의의 기부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와 같은 공공사업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는 명성을 얻고 출세하기 위해 문화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고고학과 문화재는 돈과 적절한 사업 감각만 있으면 비교적 접근하기 쉽다.

예컨대 트로이의 황금 Gold of Troy(프리아모스의 보물 Priam's Treasure)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슐리만 Heinrich Schliemann(1822~1890)은 거의 무학에 가까웠지만 부도덕한 군수사업으로 부자가 된 뒤 고고학자로 전환해 자신의 신분을 극적으로 바꾼 사람이다.

문명 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그는 트로이의 발굴과 그 유물의 관리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를 두었다.

또한 영국의 필트다운 Piltdown에서 발견된 화석 인류로 알려졌던 필트다운인 Piltdown은 찰스 도슨 Charles Dawson(1864~1916)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명성을 얻기 위해 위조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유럽에서 새로운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직접 발굴하여 이름을 알리는 경우가 많다면 미국에서는 유물 수집과 박물관 설립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의 게티 센터 The Getty Center 설립에 기여한 장 폴 게티 Jean Paul Getty(1892~1976)가 좋은 예이다.

화려한 유물 컬렉션으로 유명한 폴게티 미술관의 명성과는 달리 기부자 폴 게티 개인은 괴팍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

손자를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하는 범인들에게도, 뇌종양에 걸려 죽어가는 아들에게도 그는 돈이 아까워서 쓰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손님용 유료전화기를 설치할 정도였다.

폴 게티는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주변 사람을 사이코패스 급으로 괴롭혀 모은 돈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더이상 그를 선의의 기부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아서 새클러나 폴 게티의 기부는 오히려 자신의 악명을 더욱 각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신이 기증한 문화재와 이름을 새긴 박물관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의 행동은 잊히고 싶어도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서 새클러와 폴 게티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아주 명확하다.

훌륭한 예술품과 고고학 유물을 모은 공적이 결코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관람객들의 경탄을 부르는 엄청난 박물관에는 유물을 둘러싼 정당하지 못한 사연들이 상당수 숨어 있을 것이다.

무작정 유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 전에 세계 각국의 유물이 어떻게 이곳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이 먼저여야 한다.

컬렉션의 역사가 고대의 역사 자체를 왜곡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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