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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9: 기술의 발달, 10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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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9: 기술의 발달, 10장 결론

새샘 2024. 6. 4. 20:50

중세 말기 인쇄술의 발달(사진 출처-출처자료1)

 

중세 말기에 이루어진 업적을 말하면서 몇몇 획기적인 기술 발달을 빠뜨리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완전한 설명이 못 된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맨 먼저 대포와 총 같은 전쟁 무기의 발명을 다룬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빈번한 전쟁은 신무기의 발달을 재촉했다.

화약 자체는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화약을 파괴적인 군사적 용도로 처음 사용한 것은 중세 말기 서유럽에서였다.

대포는 1330년 무렵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그 성능이 크게 개선되어 전쟁의 본질을 뒤바꾸기 시작했다.

1453년 한 해 동안 대포는 두 차례 중요한 전쟁의 결과를 결정짓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즉, 오스만튀르크 Ottoman Türk는 독일 및 헝가리제 대포를 사용해 그때까지 유럽에서 가장 난공불락이었던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의 방어벽을 돌파했고, 프랑스군은 중포重砲(구경 155mm 이상으로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야포)를 사용해 보르도 Bordeaux 시를 함락함으로써 백년전쟁을 종식시켰다.

대포는 그 후 반란 귀족들이 돌로 쌓은 성 안에 은신하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국민적 군주국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배에 설치된 대포는 유럽 선박이 그 후 해외 팽창 시대에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4세기에 처음 발명된 개인 화기도 그 후 점차 완성도가 높아졌다.

1500년 직후 새롭게 등장한 머스킷 musket 은 이제껏 군사적으로 비중이 컸던 중무장 기병을 일거에 보병으로 대치시켰다.

창을 든 기병대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고 모든 병사가 좀 더 쉽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있는 군주국가는 내부 저항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중세 말기의 다른 기술 발달은 무기와는 달리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는데 기여했다.

안경은 1280년대에 처음 발명되어 14세기에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원시의 노인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4세기의 위대한 학자인 이탈리아 페트라르카 Petrarca는 젊은 시절 뛰어난 시력을 자랑했는데, 60대에 접어들어 안경에 의지해 그의 가장 중요한 몇몇 업적을 완성할 수 있었다.

1300년 무렵 나침반(나침판)이 사용됨으로써 선박들이 육지에서 멀리 떠나 대서양에서 모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얻어진 즉각적인 결과는 이탈리아와 북유럽 사이에 해상 직접 교역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선박 건조, 지도 제작, 항해 장치 등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개량에 힘입어 유럽은 해외 팽창을 시작할 수 있었다.

14세기에 유럽 선박들은 아조레스 제도 Azores Islands와 카보베르데 제도 Cabo Verde(영어 Cape Verde) Islands에 도달했다.

그 후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한 기나긴 휴지기가 끝나자 유럽 선박들은 1488년에 아프리카의 희망봉 Cape of Good Hope을 돌았고, 1492년에 서인도 제도 West Indies를 발견했으며, 1498년에 해로를 통해 인도 India에 도달했고, 1500년에 브라질 Brazil을 발견했다.

기술 발달의 결과로 세계는 갑자기 좁아졌다.

 

중세 말기 유럽인이 발명해 현대인의 생활에 가장 친숙하게 된 발명품은 시계와 인쇄된 책이다.

기계식 시계는 1300년 직전에 발명되어 그 후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개인이 구입하기에 값이 너무나 비쌌다.

그러나 도시들은 경쟁적으로 그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건물에 매우 정교한 시계를 설치했다.

이 새로운 발명품 시계는 궁극적으로 두 가지 의미심장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첫째 유럽인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복잡한 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사실 이러한 기계에 대한 관심은 이미 중세 전성기 방아의 보급을 통해 확산된 바 있었다.

그렇지만 시계는 1650년 무렵 이후 값이 매우 싸지면서 사실상 유럽의 모든 가정에 비치되었던 까닭에, 방아 이상으로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한 물건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마다 비치된 시계는 신기한 기계 장치의 표본 역할을 했다.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시계가 유럽인의 일상생활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중세 말기에 시계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간은 유동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 중 때가 언제쯤인지에 대해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어서, 대개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시계가 밤낮 구분 없이 엄밀하게 똑같은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 결과 시계는 전에 없이 정확하게 작업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야 했으며, 대부분은 '시간이 돈'이라고 믿게 되었다.

시간 엄수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효율성을 높여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긴장을 초래했다.

영국 여류 소설가 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에 등장하는 흰 토끼는 항상 회중시계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늦었을까'하고 중얼거리곤 하는데, 그것은 시간에 집착하는 서유럽인의 특성을 잘 요약해준다.

 

활판 인쇄술의 발명 또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쇄술 발명의 중요한 계기는 1200~1400년 사이에 책 만드는 재료가 양피지에서 종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양이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는 대단히 값이 비쌌다.

가축 한 마리에서 품질 좋은 양피지를 넉 장밖에 얻을 수 없었으므로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200~300마리의 양이나 송아지를 도살해야만 했다!

펄프 pulp로부터 얻어지는 종이는 책값을 실로 극적으로 하락시켰다.

중세 말기에 기록에 따르면 종이는 양피지의 6분의 1 가격이었다.

그러므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비용이 저렴해졌다.

문자해독률이 점차 높아지면서 저렴한 서적을 요구하는 시장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1450년 무렵의 활판 인쇄술 발명은 1454년 저 유명한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가 제작한 성경으로 이어져 이러한 수요에 충실히 부응했다.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켜준 이 발명 덕분에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활판 인쇄본 가격은 필사본의 5분의 1로 하락했다.

 

책을 쉽게 구해볼 수 있게 되자마자 문자해독률은 더욱 치솟았고, 이제 책 문화는 유럽인의 생활방식에서 근간이 되었다.

1500년 무렵 이후 유럽인은 모든 종류의 책—종교 팸플릿뿐만 아니라 교본, 가벼운 읽을거리,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면 신문까지—을 구입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사상의 신속, 정확한 확산을 보장해 주었다.

더욱이 혁명적 사상은 일단 그것이 몇백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만 하면 더 이상 쉽게 근절될 수 없었다.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개혁가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팸플릿을 인쇄함으로써 즉각 전 독일에서 추종자를 얻었다.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루터는 체코의 얀 후스 Jan Hus처럼 이단으로 선언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책의 보급은 또한 문화적 민족주의 성장을 자극했다.

인쇄술 발명 이전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지역 방언이 극심해 같은 언어로 말하는 국민 사이에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된 후 유럽 각국은 독자적으로 표준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니, 표준어가 책에 의해 균일하게 보급되었던 것이다.

'표준 영어 King's English'는 런던 London에서 인쇄되어 요크셔 Yorkshire 또는 웨일스 Wales로 운반되었다.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이 향상되었으며 정부 기능은 한층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10장 결론

 

경제적 혼란과 인구 붕괴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기는 서유럽 역사상 가장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시대 중 하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미래의 학자들이 인간의 창조성의 비밀을 규명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예술적·철학적·문학적·기술적 발전의 배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자연계의 운행을 이해하고 통제하고 모방하려는 지속적인 욕구이다.

이 사실이 이런 발전의 원인을 설명하는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중세 말기의 지식인들이 자연을 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신플라톤적 관점과 결별했다는 점일 것이다.

대신 그들은 자연계를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존재로, 즉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지만 그 배후에 가로놓여 있는 신에 관해서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그러한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얻게 된 자연계의 우연성과 독립성에 대한 의식은 과학적 세계관의 탄생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또한 그로 인해 유럽인은 자연계 자체를 인간의 목적을 위해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강력한 경제적·정치적 요인도 이 시기의 기술 발전을 자극했다.

흑사병과 전쟁의 파괴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상품 시장은 파괴되지 않았다.

노동력 부족 때문에 유럽의 기업가들은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 및 새로운 작물의 도입에 힘썼다.

끊임없는 전쟁은 놀라울 정도로 군사적 발명을 자극했다.

그것은 또한 강대국 정부로 하여금 신민의 재산에서 더 많은 세금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정부는 그 세금을 선박, 대포, 머스킷 총, 상비군 등에 투입했다.

개개인의 재산 증가는 방아, 공장, 시계, 책, 나침반 등에 투자하는데 필요한 자본 형성에 기여했다.

그것은 또한 유럽 인구의 교육 수준을 눈부시게 향상시켰다.

1300~1500년에는 수백, 수천의 새로운 문법학교가 설립되었고, 수십 개의 대학이 탄생했다.

부모들은 그런 학교들을 자식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믿을 만한 경로라고 생각했다.

여성은 아직 학교 교육에서 배제되었으나 점점 더 많은 소녀들이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 결과 여성은 중세 말기 유럽에 탄생한 독서 대중 가운데 지극히 중요한 (아마도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게 되었다.

 

끝으로 혼란은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개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지 않는 한 혁신을 촉진시켰다.

유럽인은 중세 말기에 전쟁, 흑사병, 경제 위기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신세계가 가져다준 기회를 잡았다.

그들이 중세 전성기에 발전시킨 자신감은 중세 말기의 고난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다.

1500년에 이르면 대부분의 유럽인은 200년 전의 선조들보다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팽창과 정복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유럽의 군대, 상인, 이주민은 전 지구를 누비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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