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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오브제로 풀어보는 테라 인코그니타

새샘 2024. 6. 15. 00:13

<테라 인코그니타 Terra Incognita>의 핵심 메시지는 '미지의 땅'에 살던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도 아니고, 또 이상향의 사람도 아닌 그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머나먼 미지의 땅과 역사에 열광하고 환상을 품는 것이 어떤 이들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은 좀더 친근한 매체인 영화를 통해 색다른 방법으로 이 책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선택한 영화는 최근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기생충>(2019)이다.

고고학자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시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영화이기도 하고, 줄거리도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으니 미처 보지 못한 독자라면 영화를 먼저 보아도 좋겠다.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나는 <기생충>의 오브제 objet(영어 object: 라틴어 objetum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앞으로 던져진 것'을 의미하는데, 일상적인 사물이나 방식이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된 경우 '오브제'라고 부름)에 주목했다.

첫 번째 오브제는 박사장의 아들이 좋아하는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다.

인디언 오브제는 영화 막바지에 모든 갈등이 파국을 맞을 때도 다시 등장한다.

두 번째 오브제는 수석이다.

가난한 주인공 가족들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지만 정작 영화에서는 수석의 의미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설왕설래가 있었다.

세 번째 오브제는 박사장의 아들이 그린 초상화다.

그림 하나를 두고 어머니와 가정교사는 각자 그럴듯한 해석을 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음이 밝혀진다.

물론 봉준호 감독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기생충>의 이 오브제들이 이 책을 준비하던 나의 생각과 너무나 잘 들어맞아 놀랐다.

그 이유를 하나씩 풀어보자.

 

 

○인디언: 타인의 역사를 무시하며 즐기는 오락거리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 전시. '인디언'을 대중문화의 대상으로 한 여러 예를 모아놨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 책의 1부는 주변의 편견에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다루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타인을 바라볼 때 그들의 미개함을 강조한다.

바로 미 대륙의 원주민들(통칭 인디언)처럼 말이다.

인디언 오브제는 <기생충>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한다.

극중에서 넘볼 수 없는 엄청난 부를 가진 박사장 집의 막내아들 박다송은 미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 놀이를 즐겨한다.

급기야 영화 마지막에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에는 아들뿐 아니라 박사장과 '기생충' 가족의 가장인 기택도 인디언 복장을 하고 서로를 죽이는 혈투를 벌인다.

<기생충>에 묘사된 인디언 놀이는 나에게 미개하다고 여기는 타인에 대한 멸시와 조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인디언'이라는 말은 원주민을 향한 무지와 멸시를 포함하기 때문에 지금은 '미 대륙 원주민' 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부른다.

신대륙으로 이주했을 때 자신들은 도와준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미국인들은 죄책감을 무마하고자 다양한 인디언 캐릭터를 자신들의 문화에 적용시켰다.

야구팀, 오토바이, 응원전, 대학의 마스코트 등 수많은 대중문화에 인디언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인디언 말살에 대한 참회라기보다 대중문화로 희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문화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던 미국 사회에서는 최근 인디언 코스튬플레이 costume play(코스프레 cosplay: 캐릭터 의상을 입고 서로 모여 노는 놀이로서 예술 장르의 일종)를 하는 마스코트나 상표를 취소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1915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00년 넘게 사용되어 오던 프로야구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Cleveland Indians'가 2022년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Cleveland Guardians'로 이름을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배경이나 맥락을 무시한 채 타인의 문화를 왜곡하여 소비하는 현상을 인류학에서는 문화도용文化盜用 cultural appropriation이라고 한다.

예컨대 정글에 가서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서바이벌 TV 프로그램이나 아시아를 표현할 때에 국적불문하고 기모노가 등장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참신하고 재미있어 보일 수 있지만 그 대상은 대부분 자신들이 침략했거나 국력이 떨어지는 나라들이다.

과거 타인의 문화를 미개하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고 만족하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문화도용은 미지의 땅에서 발견된 다른 사람들의 유물을 평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었다.

박물관의 고대 유물을 보며 한번이라도 '대체 어떻게 저런 도구들을 쓰며 살았던 거지'라고 코웃음을 친 적이 있는가.

<기생충>의 파티에 등장하는 인디언의 복장은 그런 현대인의 우월감을 드러낸다.

영화에는 박사장 가족이 멀쩡한 집을 놔두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원추형 텐트에서 자면서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가라며 안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디언 놀이를 하면서도 인디언을 무시하는 이중적인 마음은 고대 미지의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석: 찬란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축복하는 유물

 

옛 물건을 평가하는 송나라 시대의 광경(송인박고도宋人博古圖).(사진 출처-출처자료1)

 

<기생충>에 등장한 여러 오브제 가운데 주인공 기택이 부자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돌덩어리인 수석壽石/水石의 존재는 좀 뜬금없이 보인다.

기택의 가족들이 전혀 쓸모없이 보이는 수석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영화 내내 등장하다가 결국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하찮은 물건 취급하듯 물속에 던져버린다.

나는 수석이 기택의 가족들에게 일종의 부적과 같은 물건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층민으로 추락한 주인공 가족들은 자신들이 원래 상류층이었고 수석이 그들을 다시 상류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었다.

진품이건 위조품이건 사람들은 자기 조상의 물건을 가져다놓고 행복과 영원을 기원한다.

조상의 물건은 자신의 출신 성분이 위대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도구가 된다.

수석은 주인공 가족이 지금은 비록 비루하지만 알고 보면 하늘이 내린 집안(그것이 사실이든 만들어진 것이든)이라는 자부심으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제사그릇인 청동기로 스스로의 신분을 드러냈다.

상나라에서 시작된 청동 제사그릇은 주나라로 이어졌고, 종주국인 주나라는 주변의 여러 제후국들에게 제사그릇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각 제후국 역시 그 제사그릇을 대를 이어 전하며 자신의 신분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주나라의 청동솥은 이후 골동품으로 인기를 끌며 오랑캐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12세기에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남쪽으로 옮긴 남송 때 주로 유행했고, 소수의 여진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던 청나라 때도 성행했다.

청나라의 금석학은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의 청동그릇을 모으고 비석의 비문을 연구하는 등 자신들의 과거 영화를 반추하는 과정에서 발달한 학문이다.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고대 중국의 청동기는 힘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고급호텔에 가면 입구에 커다란 솥이 놓여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유물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현실을 위로받는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암흑기 말기에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은 바로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을 발굴하여 감상하는 딜레탕티슴 dilettantisme(옛것을 모으고 감상하는 행위)이었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객관적인 과거를 지향한다.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객관적인 과거의 역사에 조금 더 다가갈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유물은 현대인들에 의해 해석되고 평가될 수밖에 없다.

즉 고고학자는 객관적인 시각을 지향하지만, 고고학자의 시각은 그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적 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고고학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와 유물을 바라볼 때 편견은 없는지, 현대의 관점으로 곡해하는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생충>의 초상화 해프닝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 경주 괘릉掛陵(원성왕릉元聖王陵)에 있는, 서양인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석인상石人像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Sogdian(스키타이인 Scythian)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라비아인 Arabian, 페르시아인 Persian, 회족回族 Hui People이라고도 한다.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와 관점으로 인물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인의 고분 벽화를 본 한국인은 그 안에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의 기상을 느끼는가 하면, 중국인은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한계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어떠한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미지의 땅을 바라보는가를 감안할 때에야 비로소 더욱 편견 없이 과거를 바라볼 수 있다.

<기생충>에서 다송이의 그림을 두고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아이의 상황과 주변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고학을 현재라는 렌즈를 끼워서 과거를 바라보는 카메라에 비유하곤 한다.

객관적인 과거를 지향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땅의 모든 역사가 놀랍도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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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