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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 "자화상", 작가 미상 "강세황 초상", 화산관 이명기 "강세황 초상" 본문

글과 그림

표암 강세황 "자화상", 작가 미상 "강세황 초상", 화산관 이명기 "강세황 초상"

새샘 2024. 6. 21. 21:23

<나의 모습은 볼품없어도 문자속은 있었다오>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x51.0cm, 보물 제590호, 진주강씨 전세품,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왼쪽)강세황, 자화상, 칠분전신첩,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지름 15cm,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작가 미상, 강세황 초상, 18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50.9x31.5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초상화가 여러 폭 전한다.

도포道袍(예전에, 통상예복으로 입던 남자의 겉옷으로 소매가 넓고 등 뒤에는 딴 폭을 댄다)를 입은 자화상自畵像(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 대례복大禮服(나라의 중대한 의식이 있을 때에 벼슬아치가 입던 예복)의 전신상, 화첩 크기의 반신상, 얼굴만 그린 소조小照(조그맣게 찍은 얼굴 사진이나 그린 화상畫像) 자화상, 그리고 선면扇面(부채의 거죽) 초상까지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초상화가 전하는 예는 표암 이외엔 없다.

 

화첩 속의 초상화는 환갑 넘어 벼슬길에 오른 표암이 한성판윤 등 고위직을 지내면서 남들과 함께 그려진 일반 초상화의 예이지만, 한종유가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 풍으로 그린 선면 초상은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인물화 형식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헌에 따르면 표암은 나이 일흔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여러 초상화 가운데서 미술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은 역시 위 그림인 표암의 <자화상>이다.

표암은 일찍이 54세 때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모가 보잘것없지만 외모만 닮게 그리는 화원의 초상과 달리 자신은 정신을 나타내었다고 자부하였다.

그는 이렇게 자평했다.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것없어서 그를 잘 모르는 사람 중에 그 속에 이렇게 탁월한 지식과 깊은 견해가 있으리라는 것으로 모르고 그를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만다 그는 번번이 싱긋이 한 번 웃고 말았다.

· · · · · 외모는 모자라고 수수해 보이지만 속은 상당히 영특하고 지혜로워 뛰어난 지식과 교묘한 생각을 가졌다."

 

잘못 읽으면 자화자찬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표암은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화가답게 외모를 정확히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어 했다.

초상화는 산수나 화조와 달라서 삼차원의 모습을 이차원의 평면에 옮길 때 형상의 특징을 요약해서 잘 잡아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휘속고震彙續攷≫에 전하는 일화로 표암은 자화상을 그린 뒤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시 초상화로 유명한 임희수任希壽를 찾아간 일이 있다.

이때 임희수가 표암이 그린 자화상의 광대뼈와 뺨 사이에 두어번 붓을 대자 그의 모습과 흡사하게 되는 것을 보고 표암이 크게 탄복했다고 한다.

 

표암이 70세가 되는 1782년에 그린 <자화상>은 이런 성실한 조형적 실험과 탐구의 결였다.

이 작품은 실로 명작이라 할 만하다.

인체 데생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 어색한 곳이 없으며 얼굴을 표현한 기법도 완벽하다.

거기에 약간의 태서법泰西法(실제로는 판판하지만 멀리서 보면 음영과 입체감이 나타나게 그리는 화법으로서 서양 화법의 영향을 받은 것)도 가미하여 음영까지 들어 있다.

채색 또한 고상하고 푸른 도포에 붉은 도포 끈을 둘러 좋은 악센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상화나 복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다면 이 그림에서 어색한 점이 바로 눈에 띌 것이다.

도포(평복 두루마기)를 입었으면서 오사모烏紗帽라는 관모官帽(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사연은 표암이 직접 쓴 찬문에 적혀 있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피하인사彼何人斯)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발미호백鬚眉晧白)

 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걸쳤으니 (정오모頂烏帽 피야복披野服)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다 (어이견심산림이명조적於以見心山林而名朝籍)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흉장이유胸藏二酉)

 필력은 오악을 흔들 만하지만 (필요오악筆搖五嶽)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오 나 혼자 즐기는 것임을 (인나득지人那得知 아자위락我自爲樂)

 노인의 나이는 일흔이요 호는 노죽이다 (옹년칠십翁年七十 옹호노죽翁號露竹)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썼다 (기진자사其眞自寫 기찬자작其贊自作)

 때는 임인년이다 (세재현익섭제격歲在玄攝提格)"

 

우리는 여기서 표암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그의 여유로운 유머 감각을 다시 한번 읽을 수 있다.

 

 

이명기, 강세황 초상, 1783년, 비단에 채색, 145.5x94.0cm, 보물 제590호, 진주강씨 전세품,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표암은 초상화를 많이 남길 운수였는지 자화상을 그린 이듬해인 1783년에는 대례복을 입은 정식 초상화를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1756~1813)가 제작하게 되었다.

이해에 71세가 된 표암은 기로소耆老所(조선 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할아버지 강백년, 아버지 강현에 이어 3대째 기로소 대신이 된 것이다.
기로소는 현직 정2품(판서급) 대신으로 71세가 되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관운이 높고 천수를 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큰 경사였다.

그것도 3대를 이어오자 훗날 추사 김정희는 <삼세기영지가三世耆永之家>라는 현판 글씨로 이를 축하하기도 했다.

 

정조는 기로소에 들어간 표암을 축하하며 그해 5월에 화산관 이명기로 하여금 표암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이다.

불세출의 초상화가인 이명기는 당시 36세로 정조의 어진을 그린 어용화사였다.

이리하여 표암은 조선 후기에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가 그린 공식 초상까지 남기게 되었다.

 

표암의 진주강씨 집안에는 정조의 전교傳敎(하교下敎: 임금이 내린 명령)가 내려진 뒤 1783년 7월부터 8월까지 이명기가 표암의 초상화를 제작한 전 과정을 기록한 <계추기사癸秋記事>(계묘년 가을의 일)가 전한다.

여기에는 초상화 제작에 든 재료비, 인건비, 영정함 제작비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진귀한 회화사 사료가 되고 있다.

 

이명기의 표암 초상을 보면 그의 대표작이라고 꼽을 만하다.

얼굴 묘사의 정확성과 품위는 말할 것도 없고, 대례복의 무늬, 화문석의 표현 등 어디 하나 소홀한 곳이 없다.

특히 좌안칠푼으로 앉아 있는 3/4 정면 초상의 비례에 맞추어 사모 꼬리의 좌우 길이가 정확히 나타나 있다.

게다가 다른 공식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오른손을 살짝 드러내어 인물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아주 작은 처리 같지만 이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정조 시대의 초상화 양식이 경직되지 않고 난숙해 있음을 말해주는 징표이다.

 

표암은 79세까지 장수하였다.

표암이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그를 애도하는 제문祭文(죽은 사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나타낸 글)을 지었다.

표암의 초상화에는 정조의 어제御製(임금이 몸소 짓거나 만듦) 제문이 적혀 있다.

 

"탁 트인 마음,  고상한 운치 (소금아운疎襟雅韻) 

 소탈한 모습은 꾸밈이 없고 (조운연粗跡雲煙)

 수만 장의 종이에 붓을 휘둘러 (휘호만지揮毫萬紙)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다네 (내병궁전內屛宮牋)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았고 (경관불랭卿官不冷)

 시서화 삼절은 당나라 문사 정건鄭을 닮았네 (삼절칙건三絶則虔)

 중국에 사신으로 나아가니 (북사화국北槎華國)

 그를 만나러 숙소인 서루로 다투어 찾아왔다네 (서루종선西樓踵先)

 인재를 얻기 어려움을 생각하며 (재난지사才難之思)

  한 잔의 술을 내리노라 (박뢰시의薄酹是宜)”

 

제문을 읽노라면 표암 강세황의 인간됨이 어떠했고, 정조의 신하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표암의 초상화는 우리나라에 이런 아름다운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이 자랑스럽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https://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0%95%EC%84%B8%ED%99%A9_%EC%B4%88%EC%83%81(%EC%9E%90%ED%99%94%EC%83%81)

(강세황 자화상 찬문)

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237(이명기의 강세황 초상의 정조 찬문)

4. 구글 관련 자료
 
2024. 6. 2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