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서론,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1: 서론, 몽골 제국의 흥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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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서론,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1: 서론, 몽골 제국의 흥기

새샘 2024. 6. 24. 23:05

11장 서론

 

1300년에 이르러 중세 전성기 유럽의 팽창은 끝났다.

이베리아 Iberia에서는 (그라나다 Granada가 페르난도 2세 Fernando II와 이사벨 1세 Isabel I에게 함락된) 1492년까지 더 이상 무슬림 Muslim(이슬람교도) 영토에 대한 정복이 진행되지 않았다.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과 아크레 Acre의 십자군 왕국이 각각 1261년과 1291년에 붕괴되었다.

독일의 동유럽 팽창만이 꾸준히 지속되었지만, 이 역시 14세기 중반 리투아니아 Lithuania에 새로운 발트 국가 Baltic country가 등장하자 그 속도가 늦춰졌다.

유럽의 자원이 생태학적 한계에 도달하면서 대내적 팽창도 종식되었다.

자원 압박은 14세기에 발생한 굶주림, 흑사병. 전쟁과 같은 복합적인 영향으로 인한 극적인 인구 감소 덕분에 가까스로 늦춰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기의 유럽인은 내부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토지에 바탕을 둔 정복 사업은 늦춰졌지만, 새롭게 해양에 기반을 둔 제국이 14·15세기 지중해 세계에 등장해 흑해 Black Sea에서 카나리아 제도 Canary Islands(스페인어 Canarias)까지 수많은 식민지를 획득했다.

새로운 해양 교역로가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을 통해 열렸고, 그 결과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거대한 경제적 통합이 이루어졌으며 아시아의 향료와 아프리카의 황금에 대한 서북유럽의 수요가 증대했다.

15세기 말 지중해의 선원과 식민지 개척자들은 지배 영역을 대서양―북으로 아조레스 제도 Azores Islands에서 남으로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는―으로 확대했다.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 Portugal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가 희망봉 Cape of Good Hope을 돌아 인도 India에 도달했다.

 

15세기의 '대서양 지중해 Atlantic Mediterranean' 정복은 그 후에 전개된 수많은 극적인 사건의 예비 단계였다.

1492년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는 중국에 도달하고자 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했고, 1600년에 이르러 에스파냐 España와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America 대륙을 정복했다.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너무나 익숙한 탓에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유럽인과의 접촉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들의 제국에 일대 격동을 가져왔다.

1600년까지 아메리카 원주민의 50~90퍼센트가 질병, 학살, 노예화 등으로 사망했다.,

유럽인들에게는 정복의 결과가 그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정복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1300년까지 유럽인은 지중해 세력으로서 비잔티움 Byzantium과 이슬람 Islam을 압도했지만, 지중해와 북대서양 바깥 해역에서 유럽 세력은 아직 미미했다.

그러나 1600년에 이르러 유럽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강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선박이 항해할 수 있고 그들의 대포가 도달할 수 있는 모든 지역에서 유럽인은 제국주의적 야심과 상업적 이익을 추구했다.

유럽인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내륙 지역에 대해서는 19세기 말까지도 완전한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그들의 지배권은 그 후 한 세기도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1600년의 시점에서 유럽의 해군은 바다를 제패했고, 세계의 자원은 유럽인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이 시기에 만들어진 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몽골

 

1259년 이후 칭기즈 칸 제국이 분열되어 건국된 몽골 계승 국가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지중해 세계와 극동 간 교역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유럽인이 인도, 중국 China, 인도네시아 향료(말루쿠/몰루카) 제도 Spice(Maluku/Molucca) Islands in Indonesia등과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의 일이다.

유럽인에게 아시아와의 관계는 지극히 중요했다(물론 경제적 중요성보다는 유럽인의 상상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실크로드 slik road(비단緋緞)에 출몰한 유럽 상인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몽골 제국 Mongol Empire(몽고제국蒙古帝國)의 등장은 이런 의미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몽골이야말로 둘 사이에 진정한 관계 수립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의 흥기

 

몽골 제국의 흥기(1206~1260년)
테무친이 칭기즈 칸으로 즉위
몽골의 중국 북부 정복
몽골의 러시아 남부 정복
몽골 세력 유럽에서 철수
맘루크 술탄국 Mamluk Sultanate이 몽골의 이집트 진출 저지
          1206년
          1234년
          1237~1240년
          1241년
          1260년

 

몽골인 Mongolian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수많은 스텝 steppe(러시아와 아시아의 중위도에 위치한 온대 초원 지대) 유목민 중 하나였다.

투르크어 사용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빈번히 통혼하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고유의 언어를 사용했고 고비사막 Gobi Desert북부―오늘날 몽골의 위치―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양羊은 그들에게 집(양모 천막의 형태로), 옷, 밀크, 고기 등을 제공했다.

역사상의 많은 유목민족이 그러했듯이, 몽골인은 고도의 숙달된 기마 전사로서, 남쪽의 정주민족에 대한 약탈을 통해 그들의 목축과 수공업 생산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몇백 년 전 중국이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부분적으로 몽골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국인은 몽골인을 내부 분열 상태에 놓이도록 만들고, 몽골인의 군사적 에너지를 부족 상호간의 싸움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국을 지켜냈다.

 

그러나 12세기 말 몽골의 통치자 테무친 Temuchin은 다양한 몽골 부족을 단일한 지배권 아래 통합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투는 부족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병시킴으로써 테무친은 단기간에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했다.

1206년 모든 몽골인은 그의 최고권을 인정했고 그는 칭기즈 칸 Genghis Khan―대양의 (또는 전 세계의) 군주―이란 호칭을 얻었다.

칭기즈 칸은 대군을 지휘해 비非몽골인 이웃 민족들을 상대로 싸웠다,

그 당시 중국은 적대적인 3개의 국가금金, 남송南宋, 서하西夏로 분열되어 있었다.

1209년 칭기즈 칸은 서북 중국의 서하를 공격했고, 1211년 다시 북중국의 금金나라를 침공했다.

이러한 공격 행위는 처음에는 계획적인 정복 시도라기보다는 약탈 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230년대에 이르러 몽골은 중국 북부 및 서부에 대한 전면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했다.

몽골의 정복활동은 1234년 금의 멸망으로 절정에 달했다.

1279년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 Khublai Khan은 중국의 남송 정복을 완료했고 이로써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재통일했다.

 

한편 칭기즈 칸은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중앙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고 타슈켄트 Tashkent, 사마르칸트 Samarkand, 부하라 Bukhara 같은 중요 상업도시(이 세 도시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를 제국에 편입시켰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셋째아들 오고타이가 그 뒤를 이어 오고타이 칸 Ogotai Khan이 되었다.

그는 금의 정복을 완료하고, 옥수스 강 Oxus River(아무다리야 강 Amu Darya River)과 카스피해 Caspian Sea 사이의 땅을 정복했으며, 서쪽을 향한 대대적인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

1237년과 1240년 사이에 몽골 군단軍團(horde: '천막' 또는 '야영'을 뜻하는 튀르크어 '오르두 ordu'에서 온 말로 영어는 corps)은 남부 러시아를 정복한 다음, 서쪽을 향해 두 갈래 방향으로 습격하기 시작했다.

둘로 나뉜 몽골 군대 중 소부대는 폴란드 Poland를 휩쓸고 동부 독일 East Germany로 향했으며, 대부대는 남서쪽의 헝가리 Hungary로 진격했다.

1241년 4월 몽골 소부대는 폴란드의 레그니차 전투 Battle of Legnica에서 독일, 헝가리 연합군과 맞닥뜨렸고, 양쪽은 피투성이의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몽골 대부대는 사요 강 전투 Battle of the Sajó River(또는 모히 전투 Battle of Mohi)에서 헝가리 군대를 궤멸시켰다.

 

몽골 군대가 서쪽으로 얼마나 더 밀고나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몽골 군대가 동유럽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칸이 옹립되는 데는 5년이 소요되었고, 1248년 새로운 칸마저 죽자 다시 3년 동안 공위 기간이 이어졌다.

몽골의 정복활등은 페르시아 Persia, 중동 Middle East, 중국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1241년 이후 몽골인은 유럽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지 않았다.

1300년에 이르러 몽골의 팽창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위협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14세기 중반까지 거대한 육상 제국(세계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다)을 계속해서 지배했다.

그 후 절름발이 티무르 Timur the Lame(유럽에서는 타메를란 Tamerlane으로 알려졌다)의 리더십 아래 몽골 제국은 짧은 기간이나마 재통일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는 중국을 침공하던 중 사망했고, 그 후 몽골 제국의 여러 지역이 (소아시아의) 오스만튀르크 Ottoman Türk를 포함한 지방 지배자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몽골의 문화적 영향력은 지속되었고, 그 영향력은 15·16세기 페르시아와 무굴 제국 Mughal Empire 인도에서 산출된 인상적인 예술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의 성공은 기마부대의 규모, 속도, 훈련에 힘입은 것이었다.

저항하는 자들을 무시무시하게 야만적으로 죽인 것도 성공 요인이었다.

그들의 성공은 또한 신민의 행정적 전통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적용할 줄 아는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몽골인은 그들 고유의 샤머니즘 shamanism(무교巫敎) 전통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므로 다른 민족의 종교 신앙에 대해 놀랍도록 관용을 베풀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제국—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지극히 다양한 종교를 포괄했던—을 통치하는데 뚜렷한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제국을 다스린 방식에는 이렇다 할 '몽골다운'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인의 경우—몽골인이 세운 원元이 중국의 복잡한 행정 관료제를 계승·유지했다—를 제외하면, 몽골 지배는 정교하지 못한 것이어서 대개 신민으로부터 안정된 조공을 확보하는데 치중했다.

 

 

○유럽, 몽골, 극동

 

몽골인은 그들의 제국이 어떤 상업적 이익을 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흑해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 장악했다.

그들은 유럽인과의 상업적 교류, 특히 육로와 해로를 통해 중국에 도달할 수 있는 이란 Iran의 도시 타브리즈 Tabriz를 경유하는 교류를 장려했다.

몽골 정복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으로 가는 실크로드는 서유럽 상인과 여행자에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수립되자마자 유럽인은 이 대상로를 과감하게 이용했다.

최초의 여행자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Louis IX(재위 1226~1270)가 1253년 몽골 궁정에 사절로 파견한 기욤 드 뤼브룩 Guillaume de Rubrouck 같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 Franciscan missionary였다.

서유럽 상인들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이들 초기 상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세 명의 베네치아인 Venetian—니콜로 폴로 Niccolo Polo, 마페오 폴로 Maffeo Polo, 마르코 폴로 Marco Polo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20년 동안 쿠빌라이 칸을 섬기며 중국에 체류한 뒤 향료 제도, 인도, 이란을 거쳐 고향에 돌아온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행기에 속한다.

그것이 동시대인의 상상력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 후 200년 동안 유럽인이 극동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의 대부분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얻은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갖고 있던 이 책의 사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유럽인이 실크로드 서쪽 끝자락과 맺은 관계는 14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제노바 Genova(영어 Genoa)가 특히 이 교역에 적극적이었는데, 그것은 경쟁 세력인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가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베이루트 Beirut와의 지중해 교역—이 경로를 통해 유럽의 극동 사치품 대부분이 유입되었다—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4세기를 거치는 동안 이란의 몽골인은 점점 더 서유럽인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1344년에 이르러 서유럽인에 대한 몽골인의 습격으로 인해 더 이상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자 제노바인은 타브리즈를 포기하고 말았다.

1346년 몽골인은 흑해 연안의 제노바인 식민도시 카파 Cafa를 포위 공격했다.

제노바인이 더 이상 흑해에서 상업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이 포위 공격은 몽골군에게 저항하던 제노바인을 흑사병에 감염시켰다는 점 때문에 기억할 만하다(몽골인은 우연히 고비 사막에서 흑사병을 가져왔는데 이 질병은 고비 사막의 풍토병이었다).

제노바인은 흑사병에 감염된 채 서유럽에 돌아갔고, 그 후 흑사병은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만들어준 기회의 창은 이렇듯 단기간 내에 닫히고 말았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몽골 제국 여러 지역들 사이의 적대감 때문에 실크로드 여행이 위험해졌다.

원이 무너진 1368년 이후, 서유럽인은 중국에서 완전히 배척을 당했고, 몽골인은 명明 제국 군대에서 기병으로 복무하는 것으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중국에서 흑해에 이르는 육상 교역로는 열려 있었지만, 유럽인은 더 이상 그 길을 따라 여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몽골에 의해 창출된 새롭고도 통합된 상업 세계는—유럽인이 직접 참여한 기간이 짧기는 했지만— 유럽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유럽인의 극동에 대한 기억은 보존되었다.

그리고 유럽과 중국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를 복원하려는 꿈은 계속 살아남아, 15세기 말부터 새롭게 전개된 유럽인의 상업적·제국적 팽창에 영향을 미쳤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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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2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