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술, 신이 허락한 음료 본문

글과 그림

술, 신이 허락한 음료

새샘 2024. 7. 31. 20:19

"진실은 와인에 있다"라는 라틴어 속담은 사람이 와인에 취하면 마음속 진실을 말한다는 뜻이다.

한편 또 다른 뜻도 있는데, 와인의 좋은 맛은 쉽게 만들어내기 어렵고, 오로지 좋은 원료와 숙련된 양조 기술이 함께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진실된 기술만이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술을 언제부터 마셨을까

 

고고학 자료에서 알코올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세계의 불가사의에 오를 일이 아닐까.

대신에 다양한 간접증거가 그 존재를 증명한다.
중국의 상나라 때 제작된 청동예기靑銅禮器(제사에 쓰는 청동 그릇) 중 술주전자와 술잔들이 기록과 함께 잘 남아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부터는 술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나온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술을 빚은 증거가 최초로 나온 것은 대체로 9000년 전이다.

물론 액체의 술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발효술의 성분이 토기 바닥에 남아 있는 것을 고고학자가 발견한 것이다.

 

중국 황하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인 양사오(앙소仰韶)문화에서 귀리와 보리로 빚은 맥주의 흔적이 나왔고, 흑해 연안의 나라 조지아 Georgia에서는 와인의 흔적이 나왔다.

최근에는 근동의 요르단 Jordan에서도 1만 3000년 전의 맥주 흔적이 나왔다는 고고학 뉴스도 등장했다.

곡물의 섭취가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 발효를 이용한 음료는 자연스럽게 뒤따랐을 것이다.

최근 농경이 일반화되기 이전인 후기 구석기시대(약 1만 5000년 전)부터 곡물의 대량섭취와 빵을 제조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으니, 술의 제조 역사도 똑같이 올라갈 것으로 기대된다.

 

술의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기 어렵지만, 대신에 술을 담았던 토기의 바닥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분석하여 술의 증거를 찾는다.

토기의 바닥을 면봉 같은 것으로 긁어서 그 안에 남아 있는 미량의 녹말 성분인 규소체硅素體 silica body(식물 조직 성분의 하나인 규소로 이루어진 미세한 입자로서, 식물마다 규소체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를 분석해서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의 중심부인 허난성(하남성河南省)의 70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인 자후 Jiahu(가호賈湖) 유적에서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토기를 분석한 결과 쌀에 꿀과 과일을 섞은 막걸리와 같은 발효주를 빚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토기의 밀랍이나 포도 같은 과일의 껍질에 섞여 있는 맥주효모균이 곡물 속에 있는 전분과 결합하여 발효를 진행시키는 방식 때문이었다.
자후 유적에서 17개체 토기를 분석했는데, 모두 비슷한 수치가 나왔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비슷한 성분의 술을 여러 개의 토기에 나눠서 담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신석기시대 초기이지만 꽤 많은 양의 발효주를 만들었고, 한국을 포함한 최초의 막걸리는 적어도 9000년 전으로 그 역사가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자후의 사람들은 자포니카 japonica라는 쌀을 재배했는데, 이는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는 종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소뼈와 거북이 등딱지로 만든 갑골甲骨(거북의 등딱지와 짐승의 뼈)들이 발견되었는데, 여러 부호가 새겨져 있어 갑골문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무덤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282호라고 명명된 자후의 한 무덤에서는 술을 담은 그릇과 함께 뼈로 만든 피리가 함께 발견된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아마 마을에서 제사를 주재하던 샤먼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또한 피리는 이 인물이 가무에도 능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반도에서는 서기전 8~9세기가 되면 본격적으로 논에서 벼를 재배한다.

2900년 전 한반도 호남 지역에서 널리 발달한 청동기시대 문화로 평야지대에서 쌀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던 송국리松菊里문화는 지금의 농촌과 거의 유사한 마을 배치로서 현대 농촌의 기원으로 불린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근처 채석장에서 돌을 떼어서 마을의 족장을 위해 고인돌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의 제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결속감을 느꼈다.

논이라는 것이 마을 사람이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일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고된 육체노동에 술이 빠질 수 없다.
청동기시대의 마을 행사가 일반화되면서 음주가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고, 쌀이 그 원료로 쓰였을 것이다.

 

시대는 뒤떨어지지만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시대의 음주문화에 대해서 서민들은 밭일을 할 때나 여행 중에 탁주(백주白酒 또는 박주薄酒)를 마신다고 했다.

그러니 청동기시대에도 막걸리류의 술을 마셨을 것이다.

실물 술은 없지만, 다른 주변 증거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농경문 청동기(사진 출처-출처자료1)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 유물이 있다.

약 2500년 전 한반도에서 농사를 짓고 청동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이 청동기 뒷면에는 나무 위에 새가 앉아 있는 솟대가 그려져 있고, 앞면에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서울대 권오영 교수는 이 사람이 벌거벗고 밭을 갈고 있다고 보았고, 제사의 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어딘가에 걸 수 있는 청동기로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니, 단순히 농사의 풍경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샤먼이 몸에 걸치고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 걸었던 장식이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풍년을 기원하면 밭을 가는 일종의 의례를 했었다.

 

벌거벗고 밭을 가는 제사 의식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16세기에 활동한 유희춘柳希春의 문집 ≪미암선생집眉巖先生集 3권에는 함경북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입춘에 벌거벗고 밭을 가는 풍습이 있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막걸리는 정액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벌거벗고 밭을 갈고 막걸리를 음복하고 땅에 뿌리는 행위는 다산과 풍요를 뜻한다.

 

농경문 청동기의 밭을 가는 제사 행위를 묘사하는 그림 옆으로 입이 좁고 몸이 통통한 항아리가 있다.

2500년 전 이러한 의례에서 쓰였던 술독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봄에 사람들은 같이 술을 마시면서 기를 돋우고 밭을 가는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여수 오림동 고인돌에 새겨진 칼을 숭배하는 모습의 암각화(사진 출처-출처자료1)

 

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은 어떻게 했을까.

청동기시대 때 제사를 지내던 장면이 여수 오림동의 고인돌에 새겨져 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에 꽂힌 돌검(석검石劍)을 향해 두 명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앞사람이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있고, 그 뒷사람 역시 공손한 자세로 서 있다.

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유라시아 일대에서 칼은 용맹했던 전사를 상징했다.

김천 송죽리나 춘천 중도에서는 고인돌 앞에 실제로 꽂혀 있는 칼이 발견되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오른쪽에는 그릇이 2개 놓여 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조상에게 바치는 술을 담았던 그릇이다.

 

실제로 고인돌을 발굴하면 그 주변에서 자잘하게 깨진 민무늬(무문無文)토기 조각들이 수도 없이 발견된다.
제사를 지내고 그 자리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들을 깬 흔적이다.

제사 후 그릇들을 깨는 풍습은 유라이사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고구려인들도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면 그 그릇을 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같은 풍습이다.

지금도 유라시아 곳곳에 있는 성황당의 일종인 '오보'라 불리는 제사터에서는 음복을 하고 그릇을 깬다.

이런 풍습을 '훼기毁棄(그릇을 훼손함)'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저승을 이승과 정반대로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온전한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깨거나 구멍을 뚫어서 저승의 용도로 바꾸는 것이다.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을 발굴하면 산산조각이 나 있는 토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수천 년의 제사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입으로 찧어 만든 막걸리

 

술의 발효를 위해서는 누룩이 필요하다.

발효는 술의 맛과 도수를 결정짓는 중요한 과정이다.
만주 원주민인 말갈靺鞨과 물길勿吉[만주 쑹화강(송화강松花江)과 헤이룽장(흑룡강黑龍江)에서 우리나라 열국시대에 해당하는 4~8세기에 사냥을 주로 하며 살았던 호전적인 사람들로서 후에 청나라를 건설한 여진족이 이들의 후예이다]은 쌀을 씹어서 다시 뱉어내는 방식으로 발효시켰다.

이 씹는 방법은 남쪽으로는 일본, 오키나와와 대만까지 퍼져 있다.

 

그런데 말갈과 물길족은 농사보다는 사냥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인데 쌀로 술을 빚는다는 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풍습을 이은 만주족의 미인주米儿酒도 그 원료는 쌀이 아니라 기장이다.

이 기록은 중국 당나라 때에 이연수가 쓴 ≪북사北史≫라는 역사서에 나온다.

이미 말갈과 물길의 사신이 직접 중국에 가던 시절이니, 그들이 가져온 술을 맛보고 기록한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술을 어떻게 발효시켰을까.

그 답은 만주 일대에서 서기전 4세기에 등장해 사방으로 확산된 온돌에 있다.
그들은 온돌의 고래(방고래: 방의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길) 근처에 두고 따뜻하게 발효를 시켰다.

지금도 말갈과 고구려의 후손인 나나이족 Nanai(나족那乃族 또는 혁철족赫哲)은 술항아리에 뚜껑 대신 작은 종지를 덮어 집 안에 둔다.

이런 술을 담그고 마시는 풍습은 2000년 전 강원도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집자리에서도 발견된다.
강원도 춘천 일대에서도 만주와 마찬가지로 온돌을 썼던 2000~1500년 전의 집자리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온돌 근처에 뚜껑을 얹어놓은 항아리들이 많이 발견된다.

비록 과학적 분석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나이족의 풍습과 너무나 닮았다.

 

중국에까지 알려진 입으로 찧어 술을 만드는 말갈인들의 것은 다소 기괴한 방식으로 치부할 법하다.

그런데 이렇게 입으로 찧는 술은 의외로 널리 퍼져 있다.
일본에서 2015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는 마을의 축제를 위한 술을 입으로 찧어서 만든 '구치카미자케(구교미주口み酒)가 등장한다.

 

다행히 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 문제에 실마리를 주었다.

2013년, 쓰촨(사천四川)성의 중심지인 청두(성도成都) 교외인 라오관산(노관산老官山)에서 한나라 시절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수없이 발견된 한나라 시대 무덤이라 발굴 당시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무덤의 주인공은 의사였고, 경락을 표시한 인체모형과 함께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의서醫書―중국의 명의 편작扁鵲의 의서인 ≪육십병방六十病方≫―이 출토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후 이 라오관산 무덤은 2013년 중국 10대 발굴로 선정되었다.

60가지의 의료 비법을 적은 이 책에서 36번째 의료 비방으로 입으로 곡물을 씹어서 만드는 방법을 다루었다.

 

여기에는 사람이 기가 통하지 않아 안마를 해야 할 때 반쯤 익힌 기장(황미黃米)을 아이가 씹게 한 뒤, 물을 타서 약으로 쓰면 더 효과적이라고 적혀 있다.

침은 녹말을 맥아당과 포도당으로 변화시키고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십병방≫에는 이 외에도 온주醞酒, 미주米酒, 후주後酒 등 다양한 술을 약재로 쓴다고 적혀 있다.

 

 

○실크로드를 거쳐 온 맥주의 반만년 역사

 

5000년 전 중국에서는 새로운 술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술, 맥주다.

스탠퍼드대학교 고고학자 류리 Liu Li(유리刘莉/劉莉)는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최신의 분석방법으로 중국 최초의 맥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산시(섬서陕西/陝西)성 웨이허강(위하渭河) 유역의 5000년 전 양사오(앙소仰韶)문화에 속하는, 실크로드가 중국으로 오는 끝자락인 미자야(미가애米家崖) 유적에서 밑이 뾰족하고 주둥이도 좁은, 양조를 하기에 적당한 토기를 발견했고, 그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양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수, 율무, 식물의 알뿌리(구근球根) 덩어리 tuber, 그리고 보리가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단순하게 곡물을 담는 항아리였다면 이들 재료들을 같이 넣을 리가 없다.

맥주와 같은 술을 빚지 않고는 이 곡물들이 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중국에서 가장 최초의 맥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

이는 바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원래 보리는 근동近東지역(Near East: 유럽에 비교적 가까운 동양 여러 나라들로서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말함)에서 재배하는 식물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1만 3000년 전에 이미 보리에서 추출한 맥아를 이용해 맥주를 제조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글자가 등장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는 맥주를 즐기는 것은 물론이고 맥아로 달인 술에 물을 타서 팔던 맥주집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기장, 수수와 쌀을 주로 재배했다.

실제로 중국 최초의 맥주가 발견된 양사오문화에서도 기장류가 주로 재배된다.

 

이제까지 중국에서 보리가 등장한 건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4000년 전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미자야는 그보다 1000년이나 이른 5000년 전의 유적이다.

양사오문화는 물론 그 이후에도 중국에서 주로 재배한 곡식은 수수였다.

주식으로 적당하지 않은 보리가 발견되었다는 점은 중국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술을 제조하기 위해 유라시아를 건너서 보리를 수입했음을 말해준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전파된 보리의 재배는 산시성의 양사오문화로 도입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보리로 술을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주둥이가 좁은 토기에 보리와 함께 풍미를 좋게 하기 위해 알뿌리를 넣고 땅에 묻어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식의 발달된 양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맥주를 발아들일 정도라면 보리만 수입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맥아를 만들어 제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인적인 교류도 있지 않았을까.

맥주라는 참신한 맛의 음료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5000년 전의 동서교류를 만들었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은 바로 맥주에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끝도 없는 길을 달리다 잠시 차에서 내려 맥주 한 캔을 따서 즐겼던 그 시원한 맛은 어쩌면 반만년 전 사막과 초원을 가로지르며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느끼던 그 맛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천국의 우유: 유목민들의 술

 

우유술(마유주) 쿠미스(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bb204u&logNo=20145945750)


"성스러운 두려움 느끼며 두 눈을 감을지니

그는 꿀 같은 이슬을 빨고

천국의 우유를 마실지니"

 

원나라 황제의 여름 수도인 제나두(또는 제너두) Xanadu(상도上都)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사무엘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의 유명한 시 <쿠빌라이 칸: 꿈속의 환상 Kubla Khan: or A Vision in a Dream>은 호화로운 몽골제국 제 3대 왕인 칸의 일상을 묘사한 것이다.

콜리지의 이 유명한 시는 '천국의 우유를 마실지니 drunk the milk of Paradise'로 끝을 맺는다.

이 천국의 우유는 바로 우유로 만든 술을 뜻한다.

 

초원에서도 많은 종류의 술이 발달했다.

이들은 목축 동물의 젖을 이용해 술을 만들었다.

최초의 말 사육 흔적이 나온 카자흐스탄 Qazaqstan/Kazakhstan의 보타이 Botai 유적에서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토기의 바닥에 붙어 있는 찌꺼기를 분석한 결과 말젖을 발효시켜서 나온 유지방인 것으로 밝혀졌다.

말젖을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치즈 또는 마유주馬乳酒와 같은 형태로 만들었던 증거였다.

우유의 발효과정에서 젖당의 작용으로 자연스럽게 알코올 성분이 나온 것이니, 목축의 시작과 함께 술의 역사는 시작된 셈이다.
이후 알코올의 약리작용을 알게 된 사람들은 양젖, 말젖을 이용해서 술을 만들고, 축제에서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알타이 지역에서 황금문화를 꽃 피운 2500년 전 파지릭 Pazyryk 문화의 발굴로 이 우유술의 실체가 밝혀졌다.

이 우유술은 흔히 유라시아 초원에서 쿠미스 kumis라고 불린다.

우코크 고원 Ukok Plateau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시신 옆에서 토기와 나무로 만든 막대(스트로 straw)가 나왔다.

막대기로 무엇인가를 저어서 마셨다는 뜻이니, 바로 우유 발효 음료인 쿠미스가 있었다는 걸 뜻한다.

이 막대기는 자작나무로 만들었는데, 자작나무의 하얀 색에는 모든 것을 정화시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목민들에게 이 쿠미스를 젓는 행위는 세상을 조종하는 것과 같았는데, 쿠미스는 어머니의 젖과 생명의 원천인 정액을 상징했기 때이다.

알타이의 전통신화에 따르면, 삼신할머니인 우마이 Umai는 우유의 호수에서 살면서 새로 태어날 아이들의 영혼을 관리한다.

죽은 사람의 부활을 기원하며 그 옆에 쿠미스를 놓은 것은 유목민들의 세계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황금보다 맥주 한 잔

 

생맥주(사진 출처-https://www.c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9708)

 

유독 고고학자들은 술과 가깝다.

이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공통인 듯하다.

야외에서 고단한 일을 하고 적당히 쉬는 데에 술은 좋은 도구가 된다.

실제로 미국의 고고학자 프라이스 Theron Douglas Price가 저술한 ≪고고학의 방법과 실제≫라는 책에는 고고학자의 필수품으로 당당히 '맥주'가 포함되어 있다.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서 적당히 마시면 원기를 돋워준다.

게다가 값도 싸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고고학자들에게는 단비 같은 존재다.

물론 필자는 맥주(새샘은 소맥)를 좋아한다.

종일 유적을 조사하고 지쳐버렸을 때 그 지역의 맥주 한 잔을 먹는 즐거움은 유별하다.
그 맛은 달리 형용할 수 없다.

소소하지만 세상 어떤 호화로운 술자리와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

 

사실 황금 같은 화려한 유물을 평생 한 번이라도 발견하는 고고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나날은 흙을 퍼내면서 보낸다.

신나는 보물찾기를 생각하며 고고학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에게 나느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한다.

 

"황금이나 보물은 볼 수 없을지라도 저녁에 비싸지는 않으나 맛있는 맥주를 드시게는 할 수 있을 겁니다."

 

화려한 황금을 찾아내는 것을 기대하며 고고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황금을 발견하기는커녕 제대로 만져본 사람도 거의 없다.

하지만 수많은 고고학 희망자들을 고고학자로 묶어두는 것은 황금 대신에 일과를 끝내고 마시는 맥주 한 잔에 있다.

 

적당한 술이 주는 즐거움은 과거 인류사회의 발전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술은 사람들이 유대를 돈독히 해주는 숨은 보조자였다.

우리 고고학자들의 삶도 어쩌면 그런 보이지 않는 술 한 잔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면서 조용히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일들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꼭 고고학자가 아니어도 황금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닌 맥주 한 잔의 소소한 즐거움을 통해 우리는 더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홀로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밤을 지새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4. 7.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