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강산무진도" "송석원시회도" "단발령 망금강" 본문
<대가는 완벽한 형식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화가의 기량은 대작大作(규모나 내용이 큰 작품)에 여실히 나타난다.
대작은 소품의 아기자기한 멋과 달리 웅혼雄渾(웅장하고 막힘어 없음)하고 장쾌한 기상을 자아내니 이것이야말로 회화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대작을 남긴 화가라야 비로소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를 대가로 말하는 것도 이들이 기량의 출중함을 대작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산수화에서 단원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이인문李寅文(1745~1824 이후)이 그런 대작의 대가였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욱文郁이고, 호는 유춘有春 또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라고 하였는데 그냥 고송古松으로 불리곤 했다.
대대로 사자관寫字官(조선 시대에,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의관議官(조선 시대에, 중추원에 속한 벼슬로서 뒤에 찬의贊儀로 고침) 등 기술직에 종사하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도화서 화원이 되어 정조·순조 연간에 화가로 활동하여 조선 산수화를 한 차원 높이 끌어올렸다.
그림을 그린 공으로 주부와 첨사 벼슬을 얻었다고 하나 이인문에게 있어 그런 관직이 주는 의미는 크지 않다.
그는 오직 화가로서 한생을 살았고, 그림으로 이 세상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는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1802년(순조 2)에는 ≪순조순원후 가례도감의궤 純祖純元后 嘉禮都監儀軌≫의 제작에 참여했다.
작품 자체로 미술사에 이바지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이다.
이인문의 명작으로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길이 8미터 56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장축은 조선시대 회화사의 기념비적 대작이다.
강산의 아름다움을 무진장無盡藏(다함이 없이 굉장히 많음) 전개하는 이 그림은 아름다운 누각산수에서 시작하여 큰 배가 오가는 유장悠長한(급하지 않고 느릿한) 강변 풍경을 거쳐,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산세로 끝없이 펼쳐진다.
곳곳엔 절집과 계곡을 잇는 돌다리들이 있고 거기에 사는 사람과 탐승객探勝客(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모습이 점점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뒤로 가면 다시 산마을 풍경이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평온하고 아련한 강마을로 긴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스케일만 큰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구석 소홀한 필치가 없으며 산세의 표현엔 부벽준, 피마준, 미점법 등이 두루 구사되어 단조롭지 않다.
이인문 특유의 나무 묘사법인 수지법과 바위 묘사법이 곳곳에 구사되어 그의 개성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런 장대한 산수화는 험준한 산세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중국의 <촉잔도蜀棧圖>에서 유래했다.
일찍이 현재 심사정이 그린 대작 <촉잔도>(간송미술관)가 있으며 이인문에 와서 또다시 이런 명작을 낳은 것이다.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이인문이 대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감식안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감상도장이 횡축 마지막에 찍혀 있다.
이인문은 다른 화가에 비해 대폭大幅(긴 너비) 산수를 많이 남겼다.
72세에 지두로 그린 <대부벽준 산수도大斧劈皴山水圖>(1816), 76세 때 임희지, 김영면 등과 어울리면서 그린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80세에 그린 대폭의 8곡병풍인 <산정일장호두병山靜日長護頭屛>(1824) 등은 노대가의 흔들리지 않는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고송 이인문의 평생 벗은 단원 김홍도였고, 고송의 예술은 단원과 짝을 이룸으로써 더욱 빛났다.
산수화에서 당대에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다.
고송은 단원과 동갑으로 외가로 치면 인척이 된다는 설도 있다.
고송과 단원은 환갑 때 함께 그림을 그리고 화제를 쓴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1805)를 남겼고,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조선 후기 중인들의 문학 단체)의 ≪옥계시사첩玉溪詩社帖≫이 제작될 때는 둘이 함께 초청되어 고송은 낮 풍경을, 단원은 밤 풍경을 그린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를 그린 바 있다.
그러나 고송의 산수화는 단원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고송은 아호 그대로 송림松林을 즐겨 그렸다.
노송이나 솔밭의 소나무를 아주 운치 있게 표현하고 단아한 필치의 수목들과 각진 바위들을 배치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남종화와 북종화의 화법을 두루 사용하여 완벽한 형식미가 주는 감동이 있다.
마치 결벽증이라도 있는 듯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그래서 고송의 작품에는 태작駄作(졸작拙作: 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작품)이 거의 없어 감식가들이 말하기를 고송의 그림을 보면 적이 안심이 된다고 한다.
단원과 비교해 말한다면 고송의 필치는 맑고, 단원은 그윽하다.
구도로 볼 때 고송은 시각을 넓게 잡고, 단원은 대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카메라로 치면 고송은 광각렌즈를 사용하고 단원은 접사렌즈를 즐긴 셈이다.
그 점은 무엇보다도 ≪옥계시사첩≫의 그림에 잘 나타난다.
고송은 드물지만 간혹 진경산수도 그렸다.
<수옥정漱玉亭>과 <발연鉢淵> 같은 대폭의 진경산수도 있고,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을 때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운리제성도雲裡帝城圖>도 있다.
고송의 진경산수 대표작을 꼽자면 단연 <단발령 망금강斷髮嶺望金剛>이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명화를 열 점만 꼽더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아름다운 그림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금강산 유람에는 일정한 탐승 코스가 있었다.
옛 금강산 기행문을 보면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개 서울에서 양주(의정부) → 포천 → 철원 → 김화金化 → 창도昌道까지를 기본적으로 거치게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닷새 거리였다.
그리고 창도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단발령으로 오르고, 여기서부터 30리 더 들어가면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다다른다.
이유원李裕元의 글에 따르면 묵희령墨戱嶺 10리 고개의 정상이 단발령이라고 한다.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하얗게 환상적으로 피어올라 사람들은 너나없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되어 저기서 살고 싶다"는 말을 내뱉곤 하여 단발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묵희령이라고 했을까.
묵희란 먹장난이란 뜻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 고갯마루에서 보면 절로 그림의 구도가 잡히기 때문이었을까?
'단발령 망금강'이라는 화제가 처음 제시된 것은 겸재 정선이 36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그린 ≪신묘년화첩≫이다.
이후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은 진경산수의 좋은 소재가 되었고, 대개 비슷한 구도로 되어 있다.
단원이 44세 때 정조의 명을 받고 그렸다는 ≪금강사군첩≫ 속에도 <단발령> 그림이 있었다.
지금은 화첩이 낙질落帙(한 첩의 책에서 낱장들이 빠져 나감)되어 흩어지는 바람에 어떤 그림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원의 ≪금강사군첩≫은 훗날 많은 화가들이 방작倣作(보고 베껴 그림)하여 이풍익李豊翼의 ≪동유첩東遊帖≫, 김하종金夏鍾의 ≪풍악첩楓嶽帖≫ 등을 통해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역시 똑같은 구도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로는 근경으로 단발령을 넘는 탐승객들이 점경點景인물(산수화에서 화면 곳곳에 그려진 사람)로 묘사되어 있고, 고갯길 양옆에는 소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다.
단발령에서 보았다면서 단발령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 점은 겸재 이래로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화가의 시점을 그림 속에 제시함으로써 실경이 더욱 현장감 있게 다가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안개 너머로 피어오르는 일만 이천 봉우리의 모습을 그렸는데, 여기에서 고송 이인문은 고송다운, 고송만의 표현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야말로 금강석이 뿌리채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환상적 모습이다.
화가의 노련한 솜씨에 찬사가 절로 나온다.
고송은 회화의 형식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던 화가였다.
그래서 <강산무진도>건 <단발령 망금강>이건 완벽한 회화미와 더불어 예술적 감동을 전해준다.
실로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은 산수화의 대가였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7. 3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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