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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4: 신세계와 만난 유럽, 11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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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4: 신세계와 만난 유럽, 11장 결론

새샘 2024. 7. 17. 21:39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초상(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A6%AC%EC%8A%A4%ED%86%A0%ED%8D%BC_%EC%BD%9C%EB%9F%BC%EB%B2%84%EC%8A%A4)

 

에스파냐 España 지배자들이 저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1450~1506)의 항해 비용을 떠맡기로 결정한 것은 포르투갈 Portugal 모험가들의 행보와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 Bartolomeu Dias가 희망봉을 성공적으로 돌아간 1488년 이후, 포르투갈이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지배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포르투갈과 경쟁관계에 있던 에스파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서쪽 방향으로 항해해서 아시아를 찾아낼 정도로 대담한 인물을 후원하는 일이었다.

콜럼버스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무지한 자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던 몽상가의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늦어도 12세기 이후에는 유럽 사회 전반에 걸쳐 알려져 있었다.

콜럼버스의 계획이 페르난도 2세 Fernando II 왕과 이사벨 1세 Isabel I 여왕에게 설득력 있게 들렸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카나리아 제도 Canary Islands와 아조레스 제도 Azores Islands의 정복과 식민지화로 말미암아, 대서양을 가로질러 일본에 이르기까지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점점이 이어져 있다고 보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둘째로, 제노바 Genova(영어  Genoa) 선원 콜럼버스는 지구의 실제 크기를 잘못 계산했다.

그 결과 그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하면 1개월 안에 일본과 중국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메리카 America는 어머어마한 계산착오 덕분에 15세기 말에 유럽인의 의해 발견―엄밀히 말하면 재발견―되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과오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콜럼버스는 1492년에 1개월의 항해 끝에 바하마 The Bahamas 히스파뇰라 섬 Hispañola Island에 도달했고, 에스파냐로 귀환해 자신이 아시아 변방의 섬들에 상륙했노라고 보고했다.

 

 

○신세계 발견

 

신세계와의 만남(1000년 무렵~1545년)
바이킹의 뉴펀들랜드 정주
콜럼버스의 히스파뇰라 도착
발보아의 태평양 도달
마젤란 선단의 세계 일주 항해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
피사로의 잉카 정복
포토시 은광 발견
          1000년 무렵
          1492년
          1513년
          1519~1522년
          1521년
          1533년
          1545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이 아니었다.

바이킹 Viking 선원들은 1000년 무렵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Newfoundland, 래브라도 Labrador, 뉴잉글랜드 New England에 도달해서 짧은 기간 정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이킹이 아메리카에 상륙했다는 사실은 몇백 년 동안 유럽인에게 망각 또는 무시되었다.

15세기에는 그린란드 Greenland에 있던 스칸디나비아인 Scandinavians의 정주지定住地(자리 잡고 머물러 사는 땅)마저 방기放棄(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함)되었다.

그러므로 콜럼버스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그를 따른 자들은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 신세계 개척에 착수했다.

 

콜럼버스가 아시아의 향신료를 갖고 돌아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소량의 금과 몇 명의 원주민을 데리고 귀환했다.

그 원주민은 (그리스도교 개종을 통해) '구원되어야' 할 그리고 유럽인의 노예가 되어야 할 부족이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에스파냐 군주들의 입장에서 황금과 원주민의 존재는 콜럼버스의 세 차례의 추가 원정 및 다른 인물들의 추가 원정에 대한 재정 지원을 제공할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곧이어 신대륙의 본토와 다른 섬들이 발견되자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장 널리 보급한 인물은 이탈리아 지리학자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 (1454~1512)였다.

그 후 서반구의 대륙은 베스푸치―그는 이런 영예를 얻을 자격이 없었지만―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America'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세계라는 것을 알고 난 에스파냐인 Españoles은 처음에는 실망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거대한 땅덩어리가 가로놓여 있었기에 에스파냐는 아시아의 향료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도저히 포르투갈을 앞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대양이 유럽과 아시아를 갈라놓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여전히 남아 있던 의문은,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Vasco Núñez de Balboa가 파나마 지협에서 태평양을 처음으로 관측함으로써 말끔히 사라졌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Karl V(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손자)는 1519년에 페르디난도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의 제안을 받아들여 남아메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아내도록 했다.
그러나 마젤란의 항해는, 지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서, 남아메리카 남단을 경유하는 아시아 항로 개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없이 입증했다.

마젤란의 지휘 아래 에스파냐를 출발한 5척의 선박 중 오직 1척만이 3년 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했다.

265명의 선원 중 18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대부분의 선원은 괴혈병 또는 굶주림으로 죽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과의 전투 중 살해되었다.

이 재앙은 아시아로 가는 안전하고 편리한 서남 항로 발견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러나 아직 서북 항로를 향한 꿈은 살아 있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북아메리카 탐험가들은 지속적으로 서북 항로 개척에 열을 올렸다.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정복

 

에스파냐인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에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곧 신세계에 그 나름의 엄청난 이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콜럼버스가 가져온 얼마 안 되는 금은 그 자체로는 하찮은 것이었지만 아메리카 어딘가에 황금이 덩어리 형태로 쌓여 있으리라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마침내 몇몇 에스파냐 모험가들은 그들의 탐욕스러운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벼락부자가 되었다.

1519~1521년에 콘키스타도르 conquistador(에스파냐어로 '정복자'란 뜻)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는 불과 600명의 유럽인 병사를 거느리고―가련한 수천 명 아즈텍 신민 Aztecs(멕시코 일대의 원주민 종족)의 지원을 받아―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 그 지배자의 엄청난 부를 탈취했다.

1533년 또 다른 콘키스타도르 프란치스코 피사로 Francisco Pizarro가 고작 180명의 병력으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잉카 제국 Inca Empire을 정복하고 비축된 어마어마한 양의 금과 은을 약탈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대포와 말(둘 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없었다)을 보유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들이 거둔 성공은 무엇보다도 대담성, 용맹, 배신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아즈텍과 잉카의 압제자 편에 서서 싸우기를 내켜하지 않았던 원주민의 도움을 얻기도 했다.

에스파냐와 최초로 동맹을 맺었던 원주민들은 잉카 압제자보다 새로운 정복자가 훨씬 더 악랄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신세계에서 제국이 얻은 이익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약탈자였다.

그들은 멕시코와 페루의 토착 문명이 몇백 년 동안 축적한 금과 은을 순식간에 빼앗았다.

하지만 귀금속 광산 탐사는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최초의 금광은 히스파뇰라에서 발견되었다.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한 노천 광산이 신속히 자리 잡았다.

엄청난 수의 원주민이 질병, 학대, 과로 등으로 죽었다.

1492년 히스파뇰라의 인구는 약 100만 명이었다.

하지만 1510년에는 10만 명만 살아남았고, 1538년 그 지역의 인구는 겨우 500명이었다.

 

엄청난 수의 노동자가 사라지자 히스파뇰라 광산은 경제성이 없어졌고,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가축 사육과 설탕 생산의 눈을 돌렸다.
유럽인들은 카보베르데 제도 Cabo Verde Islands와 기니 만 Gulf of Guinea의 상투메 섬 São Tomé Island에서 행해진 사탕수수 농장을 본떠,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새로운 산업의 노동력으로 이용했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고도의 자본집약적 사업이었다.

노예 수입으로 인해 비용이 치솟자, 설탕 산업은 극소수의 부유한 농장주와 재력가만 경영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카리브 해역 Caribbean Sea의 섬들에서는 설탕 생산이, 멕시코 Mexico 본토에서는 가축 사육이 중요했지만,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가장 근간이 되었던 산업은 광업이었다.

금은 맨 처음 에스파냐 정복자들을 신세계로 끌어들인 유혹물이었다.

그러나 가장 수지맞는 수출품이 된 것은 은이었다.

1543~1548년에 멕시코시티 Mexico City와 볼리비아 Bolivia의 포토시 Potosí에서 은광이 발견되었다.

에스파냐 왕실은 이들 은광이 발견되기 전에 일찌감치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놓았다.

그러므로 놀라우리만큼 생산성 높은 이 광산들에거 얻은 수익은 고스란히 에스파냐 왕실에 귀속되었다.

포토시는 단기간에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광산도시가 되었다.

해발고도가 무려 5,000미터에 달하고 기온이 연중 섭씨 15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570년 무렵 포토시의 인구는 12만 명을 헤아렸다.

히스파뇰라에서 그랬듯이, 노예화된 원주민 노동자는 이들 광산에서 그리고 광산 인근의 질병이 만연한 인구 과밀 도시에서 몇만 명씩 죽어갔다.

 

새로운 채광 기술(1555년 멕시코에, 1571년 포토시에 도입된 수은 아말감법)은 한층 더 많은 양의 은 생산을 가능케 했지만, 그 대가로 원주민 노동자의 사망률은 더욱 높아졌다.

1571년과 1586년 사이에 포토시의 은 생산량은 네 배로 늘어났고, 1590년대에는 그 절정에 도달해,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로 매년 약 286톤의 은이 반입되었다(1540년대에는 43톤에 불과했다).

유럽에서는 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던 1525~1535년에 해마다 85톤이 생산되었지만, 1550년부터는 서서히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유럽의 은 부족 현상은 16세기를 거치는 동안 말끔히 종식되었는데, 이 시기에 유통된 은의 대부분은 신세계에서 온 것이었다.

 

유럽 경제에 아메리카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15세기 말에 이미 시작된 인플레이션 inflation(인플레, 통화 팽창)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인플레이션은 애당초 유럽의 인구 증가, 경제 확대, 한정된 식량 공급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1540년대 이후의 인플레이션은 유럽 경제에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 때문이었다. 

그 결과 역사가들이 '가격혁명'이라 부른 현상이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은 유럽 대륙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에스파냐는 특히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500년에서 1560년 사이에 에스파냐의 물가는 두 배로 올랐고, 1560년과 1600년 사이에 다시 두 배가 뛰었다.

이렇듯 이례적으로 높은 물가는 에스파냐의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그 결과 1620년대와 1630년대에 들어 신세계 은의 에스파냐 유입 속도가 완만해지자 에스파냐 경제는 붕괴하고 말았다.


1600년 이후, 유럽에 유입된 신세계 은의 양은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물가는 계속 올랐다.

물론 이전보다 상승 속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1650년대에 이르러 유럽의 곡물 가격은 1500년보다 5~6배 올랐고, 그것은 사회적 혼란과 빈민의 고통을 초래했다.

잉글랜드의 경우 1590년과 1610년 사이의 20년은 이 나라가 최근 300년 동안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인구가 늘어나고 임금이 폭락하면서 생활수준은 극적으로 하락했다.

평균적인 식품 가격을 건축 노동자의 평균 일당으로 나누어 생활수준을 계산하면, 1600년 잉글랜드의 생활수준은 14세기 초의 비참했던 시기보다도 훨씬 낮았다.

그러므로 수많은 유럽인이 간절한 기대를 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난 것은 이상한 일이 결코 아니다.

만일 유럽의 늘어난 인구의 배출구로서 신세계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7세기에 과연 어떤 비극적 사태가 벌어졌을 것인지 궁금하다.

 

 

11장 결론

 

1600년에 이르러 식민지화와 해외 정복은 유럽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6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유럽 장거리 무역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유럽 경제의 무게 중심은 이탈리아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영구히 옮겨졌다.

향로 무역의 도관 역할을 박탈당한 베네치아는 서서히 쇠락했다.

제노바인은 점차 금융 분야로 이동하면서 다른 지역, 특히 에스파냐에서 모험 상업을 지원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구들은 선박들로 북적댔으며 풍요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경제적 주도권은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등 북대서양 국가로 넘어갔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19세기까지 아메리카 식민지를 보유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북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 것은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특히 잉글랜드인이었다.

이 새로운 제국들은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까지 존속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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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