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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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를 위한 사랑의 흔적

새샘 2024. 7. 10. 08:40

"공동묘지의 언덕 위에서 나는 영생을 갈구하던 영혼들의 얼굴을 보았다."

-드미트리 플라빈스키 Dmitri Plavinsky-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2005년 스티브 잡스 Steven Jobs가 스탠퍼드대학교 Stanford University 졸업식 축사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보통 "당신이 날마다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다보면 언젠가 당신을 바르게 살 것이다"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청중들은 웃기 시작했다.

그 뜻이 중의적重義的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결국은 당신은 그 말이 맞다는(즉, 죽는다는) 것을 알테니"라는 의미도 된다.

이 당시 스티브 잡스는 암 판정을 받고 치료를 하던 중이었다.

아마 잡스에게도 삶은 중의적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고고학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고고학자들은 주로 발굴 대상으로 삼는 무덤은 바로 고대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 삶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우리는 왜 죽음을 기억하려 할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난 그날부터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죽음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결국 죽어서 없어진다는 것을 느끼면 자포자기하며 자기파괴적으로 살 수도 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집단적으로 발현된다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자와 그 영혼의 불멸함을 거대한 건축물인 무덤을 만들어 기념함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 뜻에서 무덤은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제2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무덤에 사람을 묻을 때에 우리는 죽은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기대한다.

여러 다양한 무덤 중에서 항아리에 사람을 묻는 독무덤(옹관묘甕棺墓)이라는 것이 있다.

이 독무덤은 마한시대에 우리나라 전라남도 일대에서 널리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독무덤은 전 세계적으로 어린아이가 죽으면 넣어서 묻는 풍습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관을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항아리는 곧 어머니의 자궁을 뜻했기 때문이다.

죽어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듯 몸을 구부려서 넣는 독무덤만큼 무덤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는 유물도 없다.

 

무덤은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체화體化시키는(물체로 변화시키는) 상징이었다.

무덤이라는 거대한 제단에 정기적으로 제사 지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즉, 무덤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경험의 장 eroticizing death으로 만들었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장 꺼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덤을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는 제사를 마치 축제처럼 지냄으로써 고대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무덤에는 이처럼 인류의 생존 비결이 담겨 있다.

 

세계 고고학 자료의 절반 이상은 무덤과 관련되어 있다.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 이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생을 또는 저세상에서의 행복을 바라며 정성껏 시신을 안치했다.

이 무덤 하나하나는 곧 내세에서의 복을 기원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산 자가 남긴 마지막 사랑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고학자가 무덤에서 꺼내는 유물은 원래 죽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었다.

그건 단순한 유물을 넘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준 마지막 선물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도 그런 사실을 가끔 잊어버린다.

사람뼈(인골人骨)가 나온다고 해도 정작 고고학자들은 상처, 변형된 뼈, 사고 흔痕(흔적) 등에 더 흥미로워 한다.

무덤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들이 하는 일상적인 대화를 보자.

 

"뭐 재밌는 인골 좀 나왔나요?"

"제가 흥미로운 인골을 보여드리죠. 이것 보세요. 도끼로 머리를 세 군데나 찍었네요. 그 구멍 크기가 당시 사용되던 도끼의 크기와 똑같아요."

"와! 뒷머리와 옆머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찍었네요. 어디 보자. 뼈가 상처 이후에 더 자란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즉사한 모양이네요."

"조직이 살아있는 말의 미라도 발견했습니다. 위에서는 먹은 풀의 흔적이 생생하고요."

"축하해요. 진짜 재밌는 얘기가 많이 나오겠군요."

 

그렇다.

이게 고고학자들이 흔히 하는 대화다.

고고학자들이 죽은 사람들을 무례하게 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겉으로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무덤의 발굴과 사람뼈 처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서부 시베리아의 무덤에서는 유독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무덤이 많다. 5년 전 바라바 평원의 무덤에서는 두 손을 꼭 잡은 모자의 4000년 전 유골이 발견되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한국의 무덤에서는 제대로 된 사람뼈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뼈 같은 유기물질은 땅의 상태에 따라서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대체로 산성 토양의 경우는 뼈가 잘 삭아서 없어진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물빠짐이 잘 되는 땅을 무덤으로 선호하는데, 이런 환경에서 사람뼈는 더 잘 산화된다.

그러니 한국의 무덤에서 사람뼈가 발견되는 건 특수한 경우다.

하지만 시베리아 Siberia의 무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람뼈들이 발견된다.

 

필자는 유학 첫해부터 시베리아 발굴에 참여했다.

1996~1998년에 조사했던 유적은 5000년 전의 청동기시대부터 몽골제국이 번성하던, 약 1000년 전까지 서부 시베리아에 살던 다양한 시대의 사람들이 만든 무덤들이었다.

달려드는 모기와 등에들을 쫓아내며 숲속에서 사람뼈를 발굴한 뒤 머리뼈(두개골)와 네다리뼈(사지골)를 따로 분리해서 차곡차곡 종이상자에 포장을 했다.

붓질로 사람뼈 주변의 흙을 털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각각의 사람뼈들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전이되곤 했다.

 

그 가운데 한 젊은 여성의 유골이 있었다.

여성의 골반뼈 사이에서는 얇은 태아의 머리뼈 조각이 발견되었다.

아마 그녀는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죽음과 맞바꾸면서까지 아이를 낳았던 수천 년 전의 여인의 고통을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과 아이를 함께 땅에 묻었을 가족과 남편의 심정을 생각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해 온다.

 

 

○기나긴 여행을 위한 우주선

 

인류는 공통적으로 죽음을 기나긴 여행으로 생각한다.

시신이 들어가는 관은 그래서 그들의 머나먼 여행을 위해 타는 것에 해당한다.

 

일본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서는 영생을 찾아 우주로 가는 교통수단으로 기차가 등장한다.

머나먼 여행을 떠나가는 이미지로 기차만큼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게 또 있을까.

장진 감독이 연출한 <로맨틱 헤븐>(2011)이라는 영화에서는 음속전투기가 천국으로 가는 상징으로 등장했다.

이 영화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임종을 앞둔 어미니를 바라보는 딸이 말했다.

 

"엄마, 그렇게 누워 있으니 비행기 조종사 같다."

 

 

창원 다호리에서 발견된 목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나무로 만든 관 중에 통나무관이 있다.

한국에서는 약 2000년 전에 창원 다호리 지역에서 살았던 변한 사람들이 썼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 통나무관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변한 일대에서 통나무관은 많이 쓰였을 것이다.

남아 있는 흔적이 거의 없어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비슷한 통나무관은 시베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통나무관을 쓰는 이유는 하늘로 자라는 나무처럼 죽은 사람 역시 저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시베리아 주민들은 통나무를 관으로 많이 쓴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죽은 경우 돌궐 계통 주민들은 안이 빈 나무의 구멍 안에 넣어서 매장했다.

그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구멍을 더 넓히기도 했다.

에벤키 Evenki(시베리아와 극동 러시아 일대에서 순록을 치며 사는 원주민들)의 사람들은 나무에 관을 매다는 경우도 있다.

나무의 열매처럼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렇듯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나무는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통나무 안에 매장을 함으로써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 돌려보낸다는 생각은 2500년 전 알타이 Altai의 파지릭 Pazyryk 고분에서도 발견되었다.

거대한 고분 안에는 잣나무로 만든 통나무 관이 놓였다.

그리고 무덤에는 그 주인공을 하늘로 데려갈 말도 같이 묻혀 있다.

하늘과 지상을 이어주는 통나무 캡슐에 탄 무덤의 주인은 길을 인도하는 천마를 따라서 저승으로 머나먼 여행을 했던 것이다.

지금도 제사터에서 알타이의 원주민들은 나무에 말의 가죽을 걸어놓고 하늘과 소통을 한다.

 

 

사막을 헤엄치는 배 모양의 관들로 이루어진 샤오허 무덤 전경(사진 출처-출처자료1)

 

영화 <신과 함께>에서는 저승사자가 삼도천三途川(삼도내: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큰 내)을 헤쳐 나가는 장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Styx가 그러하고 우리의 삼도천이 그러하다.
그리고 많은 고고학적 유물에서도 그러한 증거들이 나온다.

4000년 전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중국 신장 지역에 위치한 유적인 샤오허(소하小河: 샤오허의 사람들은 '토차르 Tocharian'라고 불리는 최초 인도유럽인의 일파이다)에는 사막이라는 기후 특징 덕에 거의 완벽하게 매장 당시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

이 무덤은 마치 수십 대의 배가 무리를 지어 사막을 가로지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그 관의 끝에는 마치 배의 노처럼 생긴 표식, 즉 묘비석을 세웠다.

사막에서 발견된 샤오허 무덤은 학익진을 펴고 바다를 헤엄치는 배처럼 사막에 펼쳐져 있다.

 

 

쓰촨 지역에서 발견된 배 모양의 관(쓰촨성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중국 쓰촨(사천四川) 지역에서도 배 모양의 무덤인 선관장船棺葬이 유행
했다.

그리고 그 배 모양의 관 밑에 '요갱腰坑'이라고 해서 작은 구멍을 파고 다시 유물을 넣은 바구니를 넣었다.

창원 다호리에서 쓰였던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굴에서 관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흙 색깔의 변화로 관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추정할 뿐이다.

사람뼈도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무덤 안에 토기라도 없다면 그냥 구덩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렇게 관도 사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덤을 보면 그들이 바람처럼 여행을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곤 한다.

 

 

○황홀한 죽음의 경험

 

죽은 왕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표현한 마야 팔렌케 석관 뚜껑에 그려진 그림(사진 출처-출처자료1)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 Death Experience이란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 느끼는 다양한 초현실적인 경험을 말한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깨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심지어는 숨이 끊어지지 않은 때에 매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중국에서는 '경야經夜'라는 풍습이 있었다.

경야는 '밤을 지낸다'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사람이 죽었어도 하루를 더 안치해서 혹시나 다시 의식이 돌아올 것을 대비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빈장殯葬(초빈草殯: 사람이 죽은 뒤 주검을 바로 묻지 않고 기간을 정해 주검을 임시로 관에 넣어두는 것)이 시도된 적이 있다.

1720년 독일 바이마르 Weimar에서 시작된 중간 영안실 waiting morgue이 바로 그것이다.

때 이른 매장으로 봉변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을 잠시 안치해두고, 혹시라도 깨어날 때를 대비해서 음식과 물을 갖추어놓은 것이다.

이 중간 영안실은 한때 유럽 전역으로 퍼지기도 했다.

 

최근 의학의 발달로 임사체험의 경험이 증가하고 있다.

임사체험에서 느끼는 사후세계에 대한 모습을 실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학계에서는 임사체험을 사망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임사체험과 사후세계의 존재는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임사체험의 사례들을 종합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로 비슷한 데가 있다.

이러한 임사체험의 유사성은 사후관死後觀으로 나타난다.

 

임사체험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중 하나는 나비의 출현이다.

미국 뇌과학자였던 이븐 알렉산더 Eben Alexander는 예상치 않은 감염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임사체험을 공개했고, 이후 그의 이야기는 ≪뉴스위크지≫에 실릴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븐 알렉산더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영혼이 유체이탈하여 나비의 날개를 타고 다녔다고 표현했다.

 

무덤을 만들어서 시신과 함께 묻는 여러 유물 즉 껴묻거리는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니 내세관의 형성에 임사체험의 기억이 개입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실제로 나비의 날개처럼 하늘을 나는 듯한 매개체에 이끌려 저승으로 헤엄쳐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세계 각지의 무덤에서 보인다.

마야 Maya의 팔렌케 Palenque(멕시코 Mexico에 있는 마야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지) 석관이나 중국의 고대 청동기에서 사람이 헤엄치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늘을 헤엄치는 광경은 샤먼이 하늘과 접신하는 장면이기도 하며, 또 유체이탈을 하여 날아가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홍산문화의 무덤과 그 안에서 발견된 껴묻거리인 나비 그리고 애벌레 모양의 유물(사진 출처-출처자료1)


중국 동북 지역의 홍산문화에서는 당시 최고의 신분이었던 사제들의 무덤에서 번데기와 나비 형태의 옥들이 반복적으로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생사관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이 국보로 지정해 돔을 씌워 보존하고 있는 니우허량 유적의 제단(사진 출처-출처자료1)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제사 유적인 니우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은 거대한 피리마드 형식의 제단을 쌓고 그 일대에 제사장들의 무덤을 곳곳에 배치한 제사/무덤 유적이다.

 

여기서는 C자형의 돼지룡(저룡猪龍)이 나왔다.

이 유물은 마치 자궁 속의 태아 형태와 닮았으며, 또한 나무에 달려 있는 곤충의 번데기 형상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번데기에서 환골탈태하여 나비가 되어 세상을 날아가는 모습 때문에 옥룡玉龍은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홍산문화의 옥그릇(옥기玉器)에 반영되었다.

즉, 옥룡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기원하며 무덤에 넣어진 것이다.

또한 홍산문화에서는 나비형의 옥그릇과 애벌레 및 곤충의 모습을 한 옥그릇도 나왔다.

홍산문화의 옥그릇들을 종합하면 옥룡 형태로 있었던 애벌레가 다시 나비로 되어서 날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나비 형상의 유물이 무덤에서 발견되는 경우는 홍산문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양자강 유역에서 7000년 전에 번성했던 신식기시대인 허무두(하모도河姆渡) 문화와 북극권에서 알래스카와 맞닿은 러시아의 추코트카 Chukotka 반도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영혼을 피어오르는 나비로 묘사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프시케 Psyche(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 Eros의 부인)는 나비인 동시에 영혼을 뜻한다.

한국에서도 나비 또는 나비의 날개를 영혼의 상징으로 자주 표현한다.

비단벌레의 나풀거리는 날개로 장식한 천마총의 안장 등 나비가 영혼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형상이다.

 

흔히 고고학자를 탐정에 비유하다.

과학수사관들이 실낱같은 단서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듯이, 고고학자들도 작은 파편으로 남겨진 증거 속에서 죽은 사람의 사인을 밝히곤 한다.

그런데 과학수사관과 고고학자의 가장 큰 차이는 범인을 밝힌 이후이다.

고고학은 무덤이 무덤이 만들어진 원인을 밝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밝히고자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고학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보물찾기의 실상은 사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넣어놓은 마지막 선물이다.

죽은 자를 위한 선물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를 무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의 길가메시 Gilgamesh 서사시,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사약, 나아가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모두 영생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대신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삶에 대해 배우게 된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우리의 생은 철길을 달리는 기차에 비유되곤 한다.

그 철길 끝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착하는 종착역이 바로 우리가 죽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고작 무덤이라는 걸 상상해보면, 쓸쓸하면서도 슬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죽음은 말 그대로 끝을 의미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살아 있을 때 했던 여정의 몇 배나 더 긴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수학자들이 난제에 매달리거나 천문학자들이 미지의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 단지 하나의 답이나 숨겨진 별을 발견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과정이 없다면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재가 없다면 미래도 없을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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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