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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단원 김홍도 "기로세련계도"

새샘 2024. 7. 17. 13:09

<개성 환갑노인의 합동 경로잔치를 기념하며>

 

김홍도, 기로세련계도, 1804년, 종이에 담채, 137.0x53.3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조선시대 화가 가운데 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다.

현재 전하는 유작만도 몇백 점을 헤아리니 역시 대가답다고 할 만하다.

겸재는 금강산 그림을 비롯한 진경산수화와 남종산수화에 집중적으로 몰입해 있었음에 비해 단원은 산수, 화조, 풍속, 인물 등 소재가 아주 다양하고 대작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단원이 작품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출중한 기량 덕분에 공적, 사적으로 그림 주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원은 30대에 이미 인기 화가가 되어 있었다.

35세 때인 1779년에는 홍신유가 단원에게 시를 지어주면서 "단원은 나이 서른도 안 되어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고 하였고, 표암 강세황은 <단원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세속世俗(세상)이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 그림을 구하려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 앞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단원은 도화서에서 화원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정조의 특명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데 바빴다.

1781년(정조 5)에는 어진 제작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1784년(정조 8)에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外職 문관 벼슬)에 제수되었다.

 

1788년(정조 12) 44세 때에는 복헌 김응환과 함께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비롯한 영동의 승경勝景(뛰어난 경치)을 그려오라는 특명을 받았다.

그때 몇십 미터에 달하는 금강산 그림과 함께 60폭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을 그렸다.

 

금강산에서 돌아온 뒤에는 1790년(정조 14) 사도세자 현륭원顯隆園(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의 원당사찰願堂寺刹(원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사찰)인 용주사龍珠寺에 불화를 그렸다.

그 공으로 단원은 연풍延豊 현감縣監(조선 시대 작은 현의 수령)이 되었다.

그러다 1795년, 51세 때 연풍 현감에서 불명예 해직된 이후로는 다시는 관에 불려가는 일이 없게 되었고 정조 사후에는 궁중에서 그에게 그림을 맡기는 일도 없었다.

이때부터는 세간의 그림 주문이 단원에게 쏟아졌다.

 

51세에 그린 ≪을묘년화첩乙卯年畵帖≫(8폭)의 <총석정> 그림에는 김경림에게 드린다고 적혀 있다.

소금 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경림(김한태)은 장안의 대부자라는 뜻의 '대고大賈'라 불렸는데, 그가 단원 말년의 후원자였다.

 

50대 후반으로 들어서면 주문이 뜸하여 생계를 걱정할 정도가 되었지만 57세 되는 1801년에는 고위 관리의 요청을 받아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등 세 점의 8곡병풍 대작도 주문받아 그렸다.

 

단원이 민간으로부터 주문받아 그린 작품 중 압권은 1804년, 60세에 그린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기耆는 예순 살, 노老는 일흔 살을, 세련계는 나라에서 베푸는 계契 잔치이므로, 나라에서 베푸는 경로 우대 잔치 그림)이다.

개성에서 60세 이상 되는 노인 64명을 위해 합동 경로잔치를 베풀면서 이 뜻깊은 잔치를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부탁하여 그리게 된 것이다.

잔치가 벌어진 곳은 개성 송악산 아래에 있는 옛 고려궁터인 만월대滿月臺였다.

때문에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라고도 불린다.

 

나이 60세의 노老 단원은 익숙한 솜씨로 요구에 응했다.

우선 잔치 마당에 친 흰 차일遮日(천포天布: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치는 포장)을 기준으로 화면을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위쪽은 송악산의 준수한 봉우리를 그려 넣고, 아래쪽은 흥겨운 잔치 모습을 그렸다.

요구는 요구대로 응하면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절묘하게 한 화폭 속에 구현한 것이다.

 

 

김홍도, 기로세련계도, 세부(사진 출처-출처자료1)

 

잔치 장면을 보면 계회도이면서 동시에 풍속화적인 분위기도 살려냈다.

차일 안에는 초대받은 노인 64명이 둘러앉아 독상을 받고 있는데 잔치 마당 주위에는 구경꾼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구경꾼의 표정과 몸동작이 정확히 묘사되어 낱낱의 상황을 실수 없이 읽어낼 수 있다.

언덕바지 소나무 아래서 느긋이 구경하는 사람, 음식을 이고 나르는 아낙네, 노상 주점을 차려놓은 주모, 이미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나무 지게를 내려놓고 황급히 구경 가는 초동樵童(땔나무를 하는 아이), 동냥 손을 내민 거지········

하나씩 헤어려보니 모두 173명이나 된다.

더없어 실감나는 흥겨운 잔칫날이다.

 

단원이 아니고서는 그릴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이 완성된 뒤 화폭 아래에는 64명의 참석자 명단을 기록하고, 위에는 홍의영이 잔치의 내력을 자세히 증언해두었으며, 유한지는 '기로세련계도'라는 이름을 지었다.

단원 말년의 최대 명작인 <기로세련계도>는 이렇게 완성된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단원이 뛰어난 화가라고 해서 <기로세련계도>라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개성 사람들의 주문이 없었다면 단원의 이 그림은 탄생하지 못했다.

이런 대작을 주문할 정도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움과 미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미술문화를 창출하는 것은 공급자가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임을 알 수있다.

공급자인 화가는 그러한 문화적 수요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는 것으로 자기 몫을 다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소비자가 만든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새샘 블로그 2022. 2. 27 '단원 김홍도 기로세련계도'(https://micropsjj.tistory.com/17040411)

3. 구글 관련 자료

 

2024. 7.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