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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단원 김홍도 "서원아집도"

새샘 2024. 7. 8. 22:21

<불세출의 천재는 어떤 소재든 다 소화해냈다>

 

김홍도, 서원아집도, 8곡 연결병풍, 1778년, 비단에 담채, 129.5x365.8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그림에서 천재天才와 대가大家는 다르다.

대가가 다 천재인 것은 아니고, 천재라고 다 대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오직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만이 유일한 천재형 대가이다.

 

오세창吳世昌(1864~1953)≪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서 단군 이래 조선시대까지 화가로 이름을 올린 이는 600명 정도 된다.

그중 전설적인 대가로는 신라의 솔거率居(?~?)와 고려의 이녕李寧(?~?)이 있고, 조선의 대가로는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1400?~1479?),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단원 김홍도를 꼽는다.

천재라는 칭송을 들은 화가로는 나옹懶翁 이정李楨(1578~1607)과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가 있지만 나이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1662년 이후)과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도 '그림의 귀신'이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천품天品을 예술 속에서 다하지 못하고 기격奇格(기이한 품격)으로 흘렀다.

세상이 그들의 천재성을 받아주지 않은 면도 있지만, 기질 자체가 야생마 같아서 감성을 방만하게 발산하며 술과 기이한 행위로 빠진 면도 있다.

그들도 세상도 손해였다.

때문에 길들여진 천재만이 대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원은 재주를 타고났고 이를 더욱 연마하여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기량으로 세상에 많은 명작을 남겼다.

단원이 단원일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란 스승을 만나 자신의 재주를 길들일 수 있었고, 정조正祖(재위 1776~1800)라는 계몽군주를 만나 맘껏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가 성숙하여 세상이 천재를 알아보았고, 받아들여준 것이었다.

11세기 소동파蘇東坡(1037~1101) 시절의 송나라, 16세기 미켈란젤로 Michelangelo(1475~1564) 시절의 이탈리아, 18세기 단원 시절의 조선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재는 문예부흥기에 출현하였고, 천재가 자기 기량을 맘껏 발휘한 시기가 문예부흥기였다.

 

단원은 진짜 천재였다.

당대의 증언이 그러했고 남긴 유작들을 보아도 과연 불세출의 천재화가였다.

단원의 스승인 표암은 <단원기檀園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정밀하고 교묘한 작품이라는 뜻으로, 회화를 평가하는 기준인 삼품三品-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의 하나)에 해당하여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 충분했다.

또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 ······ 모양을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도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개 화본畵本(그림 배울 때 보고 베끼는 그림)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화가의 솜씨는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평면에 담아내는 묘사력, 붓과 먹을 다루는 필력으로 평가되며, 또 대작을 얼마만큼 소화해낼 수 있느냐로 기량이 평가된다.

특히 인물을 제대로 그릴 줄 아는 화가라야 가히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단원은 일찍이 이 방면에서 작가적 기량을 한껏 보여주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이다.

 

'서원아집도'라는 그림은 북송 영종英宗의 사위였던 왕선王詵(1048~1104)이 자기 집 정원인 서원에서 당시의 유명한 문인 묵객들을 초청하여 베풀었던 한때의 모임에서 유래한다.

이 모임에는 소동파, 소철, 황정견, 이공린, 조보지, 미불, 원통대사 등 16인이 참여하여 시를 읊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담론談論(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함)을 즐겼다.

 

당대의 명사들이 어울린 이 아취 넘치는 모임은 여기 참석했던 이공린이 그림으로 그리고, 미불이 찬문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이공린의 그림은 전하지 않고 미불의 찬문만이 전하는데, 이는 훗날 하나의 전설이 되어 문인들의 이상적인 아회雅會(글을 지으려고 모이는 모임)로 칭송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서원아집도는 하나의 그림 소재가 되어 대대로 널리 그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남송의 마원, 명나라 구영의 그림이 전하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34세 때인 1778년 무렵에 6곡병풍, 8곡병풍, 선면대폭扇面對幅(한 쌍의 부채 그림)등 세 점의 <서원아집도> 대작을 그렸다.

세 점 모두 단원의 낙관은 없지만 6곡병풍과 선면화에는 표암의 화제가 들어 있다.

본격적인 대작이면서도 화가의 낙관이 없는 것은 당시 임금에게 바쳤던 그림에는 화원이 낙관을 하지 못했던 사장 때문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표암은 <단원기>에서 "궁중으로 들어간 병풍과 권축卷軸(글씨나 그림 따위를 표장表裝하여 말아 놓은 축) 뒤에 내 글을 붙인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하였다.

 

단원의 <서원아집도> 세 점 중 그의 기량이 한껏 발휘된 것은 역시 위에 있는 8곡병풍 그림이다.

6곡병풍보다 스케일이 클 뿐만 아니라 화폭이 넓어 파노라마식 전개가 아주 시원하고 배경으로 삼은 바위들의 괴량감塊量感(표현하려는 물체를 덩어리지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 장관이다.

개울 건너 대밭에 이르는 공간도 시원스럽게 열려 있으며 각 인물의 묘사에 생동감이 넘친다.

 

구도를 보면 대각선 방향으로 나타낸 집 담장과 계곡을 두 개의 축으로 삼고 그 사이에 인물들을 크게 네 장면으로 나누어 옴니버스식 omnibus style(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드는 형식)으로 전개해갔다.

미불은 석벽石璧에 글씨를 쓰고, 소동파는 시를 짓고 있으며, 이공린은 그림을 그리고, 원통대사는 저 멀리 대밭에서 설법을 하고 있다.

각 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집약적으로 나타내면서 전체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각 장면이 마치 연극 무대의 세트 같다.

 

 

김홍도, 서원아집도, 소동파 부분(사진 출처-출처자료1)

 

김홍도, 서원아집도, 원통대사 부분(사진 출처-출처자료1)

 

 

단원의 기량은 각 장면 주인공의 인물 표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팔을 뻗어 올린 미불의 옷자락 주름을 표현한 필선도 명료하고, 책상에 앉아 시를 짓고 있는 소동파와 그림을 그리는 이공린의 자세가 실감나며, 대밭에 앉아 있는 원통대사의 모습은 독립된 화폭처럼 그윽한 운치가 있다.

아울러 조연들의 배치, 에피소드의 처리도 치밀하고 능숙하다.

옆에서 시중드는 이도 있고, 글 쓰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인물들의 성격이 명확하다.

특히 글씨 쓸 종이를 두 팔로 쭉 펼치고 있는 동자의 모습에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유머도 있다.

 

배경 처리는 산수화나 화조화의 디테일을 보는 듯하다.

소나무, 버드나무, 대나무, 목련의 표현 또한 시정詩情(시적인 정취)이 듬뿍 들어 있고 목련꽃에는 점점이 악센트가 가해져 있으며, 한 쌍의 학도 배치되어 이 모임의 고고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화면 전체에 정중하면서도 그윽한 운치가 일어나 감상에 젖어들 뿐 무엇 하나 아쉬울 것도 흠잡을 곳도 없다.

 

표암은 <서원아집도> 6곡병풍에 쓴 글에서 단원의 그림 솜씨를 극찬하며 자신의 글씨가 그림을 따르지 못해 그림을 망쳐놓은 것은 아닌지 부끄럽다고 했다.

나 역시 <서원아집도> 8곡병풍을 해설한 내 글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7.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