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2: 오스만 제국의 흥기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2: 오스만 제국의 흥기
새샘 2024. 7. 1. 23:47몽골인 Mongolian과 마찬가지로 원래 유목민이었던 오스만튀르크인 Ottoman Türks은 거대 제국을 정복한 뒤에도 약탈에 의존한 경제생활을 영위했다.
오스만인 Ottoman은 몽골인이 소아시아(아나톨리아 Anatolia 반도) 서북부에 도달했을 때 이미 그곳에 터를 잡고 있었고, 적어도 명목상은 무슬림 Muslim(이슬람교도)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다른 무슬림 세력들이 몽골인에 의해 파멸된 것과는 달리, 오스만튀르크인은 몽골 제국의 수혜자였다.
몽골 제국이 셀주크 술탄국 Seljuk Sultanate과 바그다드 Bagdad의 아바스 칼리프국 Abbasid Caliphate을 무너뜨림으로써, 튀르크 변경의 오스만 추장들을 괴롭히던 두 전통 세력을 몽골인이 제거해 준 셈이었다.
이제 오스만인은 비잔티움 Byzantium에 접한 변경 지역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몽골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으므로 몽골에 의한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흥기(1300~1571년) | |
오스만 가문이 아나톨리아의 지배 가문이 되다 비잔티움 황제의 오스만 용병 고용 오스만의 유럽 진입 오스만이 세르비아 제국 물리치다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 정복 오스만의 시리아, 이집트, 헝거리 정복 레판토 해전 |
1300년 1345년 1350년대 1389년 1453년 1520년대 1571년 |
○콘스탄티노플 정복
13세기 말에 이르러 오스만 왕조는 소아시아 변경의 영주들 가운데 주도적인 가문으로 입지를 굳혔고, 14세기 중반에는 많은 도시들을 점령함으로써 우월성을 공고히 했다.
이런 성공으로 인해 오스만인은 비잔티움 황제의 주목을 받았고, 1345년 황제가 오스만 파견대를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써 유럽에 진입하게 되었다.
유럽에 진입한 오스만인은 신속히 새로운 상황에 적응했다.
1370년에 이르러 오스만인은 도나우 강 Donau River(영어: 다뉴브 강 Danube River)에 이르기까지 지배권을 확장했고, 1389년에는 오스만 군대가 코소보 전투 Kosovo War에서 막강한 세르비아 Serbia 제국을 패퇴시키고, 그리스 Greece, 불가리아 Bulgaria, 발칸 Balkan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396년 오스만인은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했지만 자국을 공격하기 위해 파송된 서유럽의 십자군을 물리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1402년 그들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지만 재차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소아시아에서 몽골의 침략에 직면했던 것이다.
절름발이 티무르 Timur the Lame(타메를란 Tamerlane)가 지휘한 몽골 군대는 오스만의 술탄 Sultan(이슬람 세계의 군주)을 사로잡고 그의 군대를 절멸시켰다.
그 후 한동안 오스만의 소아시아 장악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413년 티무르가 사망하고 새로운 술탄이 등장했다.
그와 더불어 오스만인은 정복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오스만인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압박은 1420년대와 1430년대에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난민들이 끊임없이 조국을 등지고 떠났는데, 이들 피난민은 그리스 고전 문학의 걸작들을 이탈리아로 가져갔다.
그러나 술탄 메흐메트 2세 Mehmed II(재위 1444~1446, 1451~1481)가 비잔티움 제국 수도를 정복하기로 작정한 것은 1451년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1453년 눈부신 포위 공격 작전으로 인해 마침내 그는 도시의 성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비잔티움 황제는 살해되었고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했으며 주민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런 다음 오스만인은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해 비잔티움인과 흡사한 방식으로 새로운 수도를 지배했다.
오스만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그리스도교 유럽에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지만, 서유럽에 끼친 경제적 영향은 미미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는 유럽인의 흑해 접근성을 악화시켰지만, 당시 유럽의 극동 사치품 교역은 대부분 흑해 연한 항구를 거치지 않았다.
유럽인은 향료와 비단의 대부분을 베네치아 Venezia(영어: 베니스 Venice)를 통해 받아들였고, 베네치아는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와 베이루트 Beirut—두 도시는 1520년대까지 오스만에 함락되지 않았다—를 거쳐 물량을 수입했다.
그러므로 15세기 말에 유럽과 인도의 향료 제도 사이의 직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포르투갈인 Portuguese을 뒤에서 밀어붙인 세력이 오스만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포르투갈 Portugal이 유럽과 인도 사이의 직항로를 확립한 후인 1520년대와 1530년대에 오스만인이 시리아 Syria, 이집트 Egypt, 헝가리 Hungary를 정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포르투갈이 인도양 향료 무역에서 무슬림을 축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만의 정복활동 배경에는 이집트 곡물 무역을 장악하려는 욕망도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인은 베이루트와 알렉산드리아를 경유하는 육상 향로 교역을 지배해왔던 유럽 상인을 제거함으로써, 이 교역로를 유리하게 변경—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해 도나우 강 상류를 거쳐 서유럽 방면으로 향하도록—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품고 있었다.
이처럼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이 서유럽에 미친 영향을 미미했지만, 오스만인에게 이 정복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엄청난 부가 오스만 사회로 흘러들어왔고, 오스만인은 새로운 수도의 산업적·상업적 이해관계를 신중하게 관리하여 그 부를 증대시켰다.
교역로는 수도권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재조정되었고, 오스만은 동부 지중해와 흑해의 해상 강국이 되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1453년 1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다가 1600년 5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중국의 경우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것이다.
○전쟁, 노예제, 사회 진보
오스만인은 상업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지만 그들의 제국은 약탈과 정복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6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은 지속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했다.
정복을 계속하기 위해 오스만 군대와 행정의 규모는 급속히 커졌다.
그러나 정복사업에는 점점 더 많은 제국 인력이 필요했다.
오스만의 군대와 행정부는 대체로 노예 인력으로 구성되었던 까닭에 더 많은 병사와 행정관을 확보하려면 정복을 통해 더 많은 포로를 노예로 삼아야만 했다.
하지만 정복을 하면 할수록 더 큰 규모의 군대가 필요했고,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관료기구를 필요로 했다.
이런 식으로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맘루크 이집트 Mamluk Egypt(또는 맘루크 술탄국 Mamluk Sultanate)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예는 오스만 군대와 행정의 근간을 이루었다.
노예는 또한 오스만 상층계급의 삶에서 지극히 중요한 존재였다.
오스만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잣대는 집안에 거느리는 노예의 수였다.
1453년 이후 일부 오스만 귀족은 새로 획득한 재산 덕분에 수천 명의 노례를 거느릴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술탄의 집안에만 무려 2만 명의 노예가 시중을 들었는데, 이 숫자에는 술탄의 경호요원 및 엘리트 보병부대—이 또한 모두 노예로 구성되었다—는 포함되지 않는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노예 인력 수요가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들 노예의 상당수는 전쟁포로였다.
일부 노예는 크림 반도 Crimea Peninsula의 노예 상인이 폴란드 Poland와 우크라이나 Ukraine를 습격해서 그곳 주민을 붙잡아 배에 태워 콘스탄티노플의 노예 시장으로 끌고 왔고, 또 다른 노예는 오스만 제국 변두리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충원되었다.
오스만 노예의 대부분은 노동자라기보다는 가사고용인이자 행정관이었으므로 일부는 기꺼이 노예 신분을 받아들였다.
시골에서 농민으로 비참하게 사느니 콘스탄티노플에서 노예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각별히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에서는 많은 어린아이가 부모에 의해 노예로 넘겨졌다.
가난 때문에 돈으로 공납을 바칠 수 없는 농촌 주민들에게 아들을 대신 바치도록 한 오스만의 악명 높은 '어린이세 child tax'를 납부하기 위해서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가족에게는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이런 관행은 사회적 지위 상승의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행정관과 병사 인력으로 충원하고자 노예 어린아이 가운데 가장 우수한 인력을 뽑아 훈련시키는 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오스만 제국의 유력한 인물로 떠올랐다.
술탄마저도 노예 여성의 아들인 경우가 빈번했다.
무슬림은 다른 무슬림을 노예로 삼을 수 없었으므로 오스만 노예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도 집안 출신이었다(물론 많은 노예들이 추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오스만 정부 내의 수많은 엘리트 지위를 노예가 차지한 까닭에 노예 행정관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었도, 그 결과 역설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투르크인 Turk을 포함한 무슬림이 오스만 사회의 사회적·정치적 출세 가도에서 사실상 배제되고 만 것이다.
오스만 사회에는 동시대의 유럽 사회와 같은 강력한 세습 귀족계급이 없었다.
15세기와 16세기 오스만 제국 사회는 대단히 특이하게도, 능력과 재능 있는 사람—노예 신분이라 할지라도—에게 권력으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무슬림이 배제되는 현상은 행정부와 군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상업과 기업 부문도 대체로 비非무슬림—그리스인 Greek, 시리아인 Syrian, 유대인 Jewish—이 장악했다.
유대인은 오스만 제국에서 특히 환영받은 난민이었다.
그들은 중세 말기 유럽을 특징지었던 박해와 추방의 희생자였다.
1492년 에스파냐 España에서 추방된 후 10만 명 이상의 에스파냐 유대인(세파르디 유대인 Sephardi Jews)이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다.
○종교 갈등
오스만 제국 술탄들은 철저한 정통 수니파 무슬림 Sunni Muslim이었으며 이슬람 학자들의 종교적·율법적 견해를 강력히 지지했다.
1516년 오스만인은 메디나 시와 메카 시 cities of Medina and Mecca를 함락함으로써 성소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그들은 예루살렘 Jerusalem과 카이로 Cairo를 함락해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을 끝장냈다.
1538년 오스만 지배자는 공식적으로 칼리프 caliph(또는 칼리파) 칭호를 채택하고 스스로를 예언자 무함마드 the Prophet Muhammad의 적법한 계승자로 선포했다.
오스만인은 수니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각별히 15·16세기 동안에는 비무슬림에게도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그들은 제국의 주요 종교 집단들을 밀레트 millets(튀르크어로 '종교공동체' 또는 '민족'이라는 뜻)라는 법적 단위로 조직하고 그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자치권을 허용했다.
1453년 이후 오스만인은 오스만 제국 내의 정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콘스탄티노플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의 권위를 보호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결과 오스만인은 16세기에 서유럽 라틴 그리스도교도와 전쟁을 치를 때 정교 그리스도교 신민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그러므로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 무척 다양하기는 했지만, 정작 오스만인의 종교 갈등은 신민들 사이에서보다는 주로 이웃 페르시아를 지배했던 시아파 무슬림 Shia Muslim 왕조와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16세기를 거치면서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과 페르시아 사이에 적대감이 분출될 때만다 여러 차례 서유럽 원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오스만과 유럽
16세기를 거치면서 에스파냐, 독일 Germany, 오스트리아 Austria를 통치한 합스부르크 Habsburg 지배자들은 프랑스 France 국왕(오스만과 동맹을 맺었다)과의 갈등, 독일, 네델란드 Netherlands, 잉글랜드 England 등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군주들과의 대립 등으로 관심이 분산되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과 서유럽 열강의 싸움은 양쪽이 구사했던 수사적 표현—성전聖戰—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았다.
1396년 서유럽의 한 십자군 부대가 니코폴리스 전투 Battle of Nicopolis에서 오스만인에게 전멸되었고, 16·17세기에는 오스만 군대가 여러 차례 빈 Wien(영어: 비엔나 Vienna)을 포위 공격했다.
이런 식의 극적인 전쟁 상황이 더러 있기도 했지만, 오스만인과 서유럽 지배자들의 갈등은 주로 지중해에서의 사적 약탈과 해상 전투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립으로 나타난 중요한 결과는 해군의 규모와 비용이 꾸준히 늘어났다는 것이다.
1571년 합스부르크-베네치아 연합군 Habsburg-Venetian Alliance이 오스만 함대를 물리친 레판토 해전 Battle of Lepanto에는 도합 400척 이상의 선박이 동원되었는데, 그것은 양쪽이 반세기 전에 보유했던 해군보다 무려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두말한 나위 없는 합스부르크-베네치아 연합군의 승리였지만, 레판토 해전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전투는 아니었다.
오스만 해군은 신속히 재건되었다.
레판토 해전은 결코 오스만의 동부 지중해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1571년 이후 오스만과 합스부르크의 관심은 양자 간 대립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옮아갔다.
오스만인은 페르시아와 장기간에 걸친 고비용의 전쟁에 돌입했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대서양의 새로운 제국에 관심을 돌렸다.
오스만과 유럽의 대결 구도에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나태하고 향략적인 술탄의 잇단 등장, 그리고 팽창이 멈춘 오스만 제국 내부의 고조된 긴장에 의해 서서히 쇠약해졌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1918년까지 존속되긴 했지만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전 지구적 헤게모니 Hegemonie(우두머리의 자리에서 전체를 이끌거나 주동할 수 있는 권력)를 장악한 유럽 열강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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