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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3: 지중해 식민주의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1장 1300~1600년의 상업, 정복, 식민지 3: 지중해 식민주의
새샘 2024. 7. 9. 08:28
15세기의 유럽은 서부 지중해와 대서양 세계 쪽으로 식민지 개척 및 상업적 야심의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상반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방향 전환은 오스만 제국 세력이 흥기한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서부 지향성은 두 가지 상호 연관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첫째, 중세 말기 유럽에서 아프리카 황금 무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둘째, 서부 지중해에서 유럽의 식민 제국들이 성장했다.
○은 부족 현상과 아프리카 황금 탐색
유럽인은 여러 세기에 걸쳐 무슬림 중간 상인을 통해 아프리카 황금을 거래했다.
무슬림 중간 상인은 이 귀금속을 원산지인 니제르 강(나이저 강) Niger River 유역에서 카라반의 힘을 빌려 북아프리카 항구도시 알제 Alger(영어 Algiers)와 튀니스 Tunis로 운반했다.
카탈루냐 Catalunya와 제노바 Genova(영어 Genoa)의 상인들은 13세기 이래로 튀니스에 식민지를 유지했는데, 그들은 튀니스에 가져간 모직물을 북아프리카 산 곡물 및 사하라 Sahara 이남에서 생산된 금으로 교환했다.
중세 말기 유럽에서 금 수요가 급속히 일어난 이유는 14·15세기 유럽 경제에 타격을 준 심각한 은 부족 현상 때문이었다.
유럽의 은 공급량은 1340년대에 현저하게 떨어졌고, 유럽인은 더 이상 깊은 갱도에서 은을 캐낼 수 없는 기술적 한계에 봉착했으므로 그 뒤로도 은 공급량은 계속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은 생산량 감소는 심각한 수지 불균형 때문에 15세기에 들어 한층 심각해졌다.
즉, 기존 은광에서 당시의 광업 기술 수준으로 생산 가능한 한계치를 초과하는 은이 수입 향료 대금으로 유럽에서 동쪽으로 흘러간 것이다.
금화는 대규모 상거래에서 명백한 대안으로 떠올랐고, 13세기부터 금 생산이 가능한 유럽 지배자들은 금화를 주조했다.
그러나 유럽의 금 매장량은 매우 적었다.
금화 유통을 유지·확대하려면 다량의 금 공급이 새롭게 필요했다.
이러한 금의 가장 확실한 공급원이 바로 아프리카였다.
○지중해 제국들: 카탈루냐, 베네치아, 제노바
아프리카 금 무역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증폭되던 무렵은 때마침 카탈루냐인 Catalan, 베네치아인 Venetian, 제노바인 Genoan에 의한 해양 기반 지중해 제국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13세기에 카탈루냐인은 마요르카 Mallorca(Majorca), 이비사 Ibiza, 미노르카 Menorca(영어 Minorca),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 사르디니아 Sardegna(영어 Sardinia)를 포함한 서부 지중해의 섬들을 정복하고 식민지화했다.
시칠리아의 경우를 제외하면 카탈루냐의 개발 형태는 모든 섬에서 동일했다.
즉, 원주민(대개 무슬림)의 소유권을 박탈하거나 원주민을 아예 근절시켰고, 새로운 거주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경제적 특권을 부여했으며, 수출을 겨냥한 식량 및 원료 생산을 위해 노예 노동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왕의 특허장을 받은 개인에 의해 사적으로 수행된 카탈루냐인의 식민지 활동과 달리, 베네치아인의 식민지화 노력은 도시 지배자들이 주도하면서 주로 동부 지중해―베네치아는 이 해역에서 향료와 비단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제노바인은 서부 지중해 세계―그들은 이 해역에서 옷감, 가죽, 곡물, 목재, 설탕과 같은 벌크 bulk(선박에서, 다발 짓지 않고 흩어진 채로 막 쌓은 화물로서 곡물·석탄·원유 따위) 화물을 거래했다―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노바인의 식민지는 베네치아나 카탈루냐 식민지와는 달리, 주권 제국의 확장보다는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가운데 비공식적이면서 가족경영을 기반으로 삼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또한 베네치아나 카탈루냐 식민지와는 달리 서부 지중해―처음에는 시칠리아, 나중에는 아프리카 서해안의 대서양 섬들―에서 설탕과 마데이라 스위트 와인 Madeira sweet wine(단 포도주) 생산을 선도했다.
이러한 벌크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 제노바인은 베네치아인이 선호했던 노로 젓는 갤리선 galley을 탈피해, 대규모 화물 운송이 가능한 대형 범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선박들은 그 후 대서양의 거친 항해 조건에 맞춰 개량되었고, 16세기에는 유럽인이 전 세계를 누빌 수 있게 해주었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13세기 후반까지 유럽의 해상 교역은 지중해 세계와 북대서양 세계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1270년 무렵부터 이탈리아 상인은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을 통과해 양모 산지인 잉글랜드 England와 네덜란드 Netherlands로 항해했는데, 이것은 지중해식 상업 및 식민지화 양상이 대서양으로 확대된 중요한 첫 단계였다.
두 번째 단계는 14세기에 제노바 선원들에 의해 카나리아 제도 Canary Islands와 아조레스 제도 Azores Islands 등 대서양의 섬들이 발견(또는 재발견)된 것이다.
카나리아 제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노력과 그 주민을 개종시키고 노예로 삼는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나리아 제도의 실질적인 정복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정복 사업은 15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 Portugal에 의해 시작되었고 카스티야 Castilla에 의해 완성되었다.
카나리아 제도는 포르투갈인이 남쪽의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항해하기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는데, 그곳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umbus가 아시아 도착의 희망을 품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항해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선박 건조 및 항해 기술
15·16세기 유럽의 제국들은 대양 정복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카라벨 caravel―15세기의 아프리카 항해용 화물선으로 고기동성 소형 범선―은 13세기 이래로 포루투갈 어부들이 사용하던 배와 돛을 기반으로 설계된 선박이었다.
1440년대부터 포르투갈 선박 제조공들은 두 개의 돛대(마스트 mast)에 삼각돛을 장착한 50톤 규모의 대형 카라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선박은 기존의 횡범선(가로돛 즉 횡범橫帆 fore sail을 단 범선)에 비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역풍에 맞서 항해할 수 있었고, 지중해에서 널리 쓰이던 노가 여러 개 달린 갤리선보다 비해 선원 수도 훨씬 적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약 200톤에 이르는 대형 카라벨이 건조되었는데, 3개의 돛대에 사각돛(가로돛=횡범)과 삼각돛(종범縱帆 즉 세로돛의 일종으로 라틴돛 Lateen sail이라고도 함)이 섞여 있었다.
콜럼버스가 이끌고 항해한 세 척의 배―산타 마리아 Santa Maria 호, 핀타 Pinta 호, 니냐 Nina 호― 중 '니냐 호'가 바로 그렇게 설계된 대형 카라벨이었다.
니냐 호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사각돛 두 개를 추가로 장착한 덕분에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바람을 좀 더 효과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15·16세기에 유럽인은 항해술에서 중대한 발전을 이룩했다.
수평선 위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해 북반구에서 위도를 계산해주는 사분의四分儀 quadrant는 1450년대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적도에 근접할수록 사분의는 점점 쓸모가 없어졌으므로, 그 대신 태양의 고도에 따라 위도를 계산하는 아스트롤라베 astrolabe(성반星盤)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분의와 마찬가지로 아스트롤라베는 서유럽에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스트롤라베가 대양 항해에서 정말로 쓸모 있는 기구가 된 것은 포르투갈 왕의 후원으로 표준 목록표가 마련된 148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나침반 역시 15세기에 좀 더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항해용 정밀 시계의 발명으로 해상에서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경도는 정확한 계산이 불가능했다.
16세기에 대양의 동쪽과 서쪽을 오가며 항해한 유럽의 선원들은 그들이 지구상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추측 항법에 의지해야만 했다.
지도와 해도에 대한 전에 없던 새로운 관심은 유럽 선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대서양을 항해하던 선원에게 특히 중요했던 것은 ≪라터 Rutter≫ 또는 ≪루튀에 Routier≫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세부적인 항해 지침, 그리고 수로 안내인이 목적지로 항해하는 도중 마주치게 될 해안선의 마루지(상징물, 랜드마크 Landmark) 등을 담았다.
지중해의 선원들도 일찍이―늦어도 14세기 이후에는― ≪포르톨라니 Portolani≫로 알려진 비슷한 책을 활용하고 있었다.
15세기에 들어 이러한 지식은 대서양으로 확대되었고, 16세기 말에 이르러 ≪라터 Rutter≫는 전 세계에 유포되었다.
○포르투갈, 아프리카, 인도로 가는 해로
포르투갈의 해상 확장(1420년대~1515년) | |
마데리아 및 카나리아 제도 식민지화 아조레스 제도 식민지화 디아스의 희망봉 회항 다 가마의 인도 도착 포르투갈인 동남아시아 말라카 도달 포르투갈인 향로 제도 도달 |
1420년대 1430년대 1488년 1497~1498년 1511년 1515년 |
아프리카 황금 무역과 대서양 식민지화라는 두 가지 관심사를 맨 먼저 하나로 묶어낸 사람은 포르투갈인들이었다.
1415년 포르투갈 원정대는 북아프리카의 항구도시 세우타 Ceuta를 함락했다.
포르투갈인은 1420년대에 마데이라 제도 Madeira Islands와 카나리아 제도를, 1430년대에 아조레스 제도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1440년대에는 카보베르데 제도 Cabo Verde Islands에 도달했다.
1444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본토의 세네갈 Senegal과 감비아 강 Gambia River 하구 사이 지역에 처음 상륙했고, 그곳에서 금과 노예를 수집해 포르투갈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1470년대에 포르투갈 선원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의 '툭 튀어나온 부분'을 돌아 기니 만 Gulf of Guinea을 탐험했고, 1483년 콩고 강 Congo River 하구에 도달했다.
1488년 포르투갈 선장 바르톨로뮤 디아스 Bartolomeu Dias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았다.
갑작스런 폭풍을 만난 디아스는 그 지점을 '폭풍우의 곶 Cape of Storms'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포르투갈 왕은 디아스의 업적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인 입장이었다.
포르투갈 왕은 그곳을 희망봉喜望峰 Cape of Good Hope이라 이름 짓고 인도로 가는 해상 원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497~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가 희망봉을 돈 다음, 무슬림 항해사 이븐 마지드 Ibn Majid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건너 인도 서남해안의 캘리컷 Calicut(현 코지코드 Kozhikode) 에 도달함으로써, 최초로 유럽과 극동 사이의 향료 무역 직항로를 열었다.
다 가마는 2년의 항해 기간에 선단의 절반과 선원의 3분의 1을 잃었지만, 그가 싣고 온 향료는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어서 그의 손실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영웅적 업적은 전설이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포루투갈의 국민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 Os Lusíadas>(영어: 더 루시아즈 The Lusiads>의 토대가 되었다.
세계의 부에 접근하기 위한 최단 경로를 장악한 포르투갈 왕은 재빨리 다 가마의 업적을 활용했다.
1500년 이후 포르투갈의 무역 선단은 정기적으로 인도를 향해 출항했다.
1509년 포르투갈인은 오스만 Ottoman 함대를 격파하고 홍해 Red Sea 입구를 봉쇄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와 베이루트 Beirut로 향료를 실어 나르는 전통적 교역로 중 하나를 차단했다.
1510년 포르투갈 군대는 인도 서해안을 따라 요새를 설치하고 그 본부를 고아 Goa에 두었다.
1511년 포르투갈 선박들은 말레이 반도 Malay Peninsula의 향료 무역 중심인 말라카 Malacca를 탈취했고, 1515년 향료 제도 Spice Islands(말루쿠 제도 Maluku Islands 또는 몰루카 제도 the Moluccas)와 중국 해안에 도달했다.
포르투갈인은 향료 무역을 어찌나 확고하게 장악했는지, 1520년대에 이르면 베네치아인들마저도 포르투갈 수도인 리스본에 가서 후추를 구매해야 했을 정도였다.
○대포와 제국
더 크고 다루기 쉬워진 선박과 향상된 항해 보조기구 덕분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선원들은 해로를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의 상업 제국들이 이룩한 업적은 근본적으로 군사적인 것이었다.
유럽인은 14·15세기에 그들끼리 치렀던 전쟁에서 배운 것을 이 시기에 고스란히 써먹었다.
아마도 중세 말기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발달은 대포가 정교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대포의 발달은 화약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대포 포신을 주조하기 위한 야금술의 향상 덕분에 가능했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대포 사용으로 인해 중세의 성과 도시 주변의 돌로 쌓은 성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포의 위력은 1453년 프랑스군의 성공적인 보르도 Bordeaux 포위 공격(백년전쟁 the Hundred Years' War을 종식시켰다)과 오스만인 Ottoman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포위 공격(비잔티움 제국 Byzantium Empire을 멸망시켰다)으로 실증되었다.
새로운 선박 설계(처음에는 카라벨, 나중에는 대형 갈레온 선 Galeón)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거대한 크기로 말미암아 성능 좋은 대포를 배 위에 장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유럽의 해군 선박은 점차 물위의 포좌砲座(대포를 올려놓는 장치)로 간주되었다.
선박 측면의 고정된 위치에 수십문의 대포가, 이물과 고물에는 회전식 대포가 장착되었다.
대포는 그것이 장착된 배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고가였지만, 대포를 소유할 능력이 있는 지배자는 그것을 이용해 전 세계에 군사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양에 진출한 최초의 포르투갈 선장이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디우 전투 Battle of Diu에서 오스만-인도 연합군을 격퇴한 150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도양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건설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무역 거점은 원주민의 습격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인의 공격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방어 요새였다.
이런 핵심적인 군사 시설과 장비가 없었다면 16세기 유럽의 해상 제국은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해 왕자 엔리케
15세기 포르투갈인의 아프리카 해안 탐험이 궁극적으로 인도와 극동으로 가는 항로를 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이것이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한 전통적 설명―그들의 임무는 탐험이었고, 그들의 목적지는 인도였으며, '항해 왕자 엔리케 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영어: Prince Henry the Navigator)'(1394~1460)가 그들을 지도한 천재였다는 식의 설명―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인도가 그들의 항해 목적지로 분명히 떠오른 것은 1480년대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1480년대 이전까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진출은 오히려 한층 전통적인 목적, 즉 북아프리카 무슬림에 대한 십자군 원정의 야심, 사하라 사막 남부의 아프리카 금광과 직접 연결망을 수립하고자 하는 욕망, 대서양 섬들을 식민지화하려는 욕구, 유럽과 오스만 제국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노예 시장 진출,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전설의 사제 요한 Presbyter Johannes(영어: Prester John)―신비의 그리스도교 군주인 그를 찾아내기만 하면 무슬림에 맞서 유럽의 동맹군이 되리라 믿었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 등을 추진 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12·13세기에 그들은 사제 요한을 아시아에서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1340년대 이후로는 사제 요한이 에티오피아 Ethiopia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럽인에게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어딘가'를 의미하는 대단히 포괄적인 지명이었다.
엔리케 왕자('항해 왕자'란 칭호는 17세기에 붙여진 것이다)는 과거에 흔히 생각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인의 탐험에서 더 이상 중심인물로 간주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1419년부터 (그가 사망한) 1460년 사이에 포르투갈인이 수행한 도합 35회의 아프리카 항해 중 8회의 항해를 지휘했을 뿐이다.
그가 포르투갈의 대서양 바닷가에서 항해자와 지도 제작자의 모임을 주관했고, 선박과 항해 장비 개량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과학 연구를 장려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엔리케는 마데이라 제도, 카나리아 제도, 아조레스 제도에 대한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을 조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처음에는 카나리아 제도(이 섬에 거주하던 석기시대 주민은 거의 다 노예가 되었다)에서, 그 후로는 아프리카의 세네-감비아 Senegambia(세네갈 Senegal과 감비아 Gambia) 해안에서 포르투갈인의 노예 무역을 선도했다.
그러나 엔리케의 주요 목적은 사하라 횡단 아프리카 황금 무역의 본거지를 가로챔으로써 무역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여러 곳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르김 요새 Arkim Fortress였다.
그는 사하라를 횡단하는 황금 카라반이 아르김을 거쳐 가기를 희망했다.
카나리아 제도를 식민지화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는데, 그는 그곳을 아프리카 내륙 진출의 발판으로 보았다.
그가 배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하려는 꿈을 꾸었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그와 정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희망봉을 향한 포르투갈인의 행보는 엔리케 생전보다는 사후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엔리케는 이슬람을 상대로 싸운 십자군이자 왕국을 찾아 나선 왕자였으며, 추종자들을 부양할 재원을 찾아 나선 주군이었다.
그는 황금 무역에서 크게 재미 보기를 원했지만 실제로는 노예 무역으로 이득을 챙긴 야심찬 상인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엔리케는 시대의 아들, 즉 전형적인 15세기의 아들이었다.
그는 16세기의 포르투갈 해상 제국을 설계한 적도 꿈을 꾼 적도 없었다.
○대서양 식민지화와 노예제 성장
엔리케 왕자가 아프리카 황금 무역에서 기대했던 이익은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탐험 경비를 다른 수단을 통해 조달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노예 무역이었다.
노예제는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12세기 초에 사실상 소멸했지만, 이베리아 Iberia에서는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중세 전성기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이베리아 본토와 이탈리아에서의 노예제 규모는 매우 작아졌다.
14세기와 15세기 초 지중해의 노예 시장은 주로 무슬림 지역 특히 오스만 제국에 몰려 있었다.
이들 시장을 거쳐 간 노예 중 아프리카인은 비교적 적었다.
노예의 대부분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 Christian, 특히 폴란드인 Polish, 우크라이나인 Ukrainian, 그리스인 Greek, 불가리아인 Bulgarian 등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말기 지중해 세계의 노예제―카나리아 제도와 사르디니아 원주민 같은 '원시' 민족이 노예화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는 점을 제외하면―는 인종차별적인 것이 아니었다.
15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의 리스본 Lisbon은 아프리카 출신 노예를 취급하는 주요 시장으로 떠올랐다.
리스본에서는 약 1만 5,000~2만 명의 노예가 엔리케 왕자 생전에, 그것도 대부분 1440~1460년에 팔려나갔다.
엔리케 사망 후 반세기 동안 노예의 수는 점점 늘어나 1505년까지 약 15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대개의 경우 노예를 소유한다는 것은 지위의 상징처럼 여겨졌는데, 당시 그림에 노예들이 빈번히 묘사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대서양의 식민지―마데이라 제도, 카나리아 제도, 아조레스 제도―에서 토지를 경작한 것은 주로 유럽 이주민과 소작인이었다.
노예 노동은 설령 있었다 해도 대개 설탕 제조업에 국한되었다.
이것은 밀 경작 식민지였던 아조레스 제도에서 노예제가 사실상 자리를 잡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5세기 말 설탕을 유력한 환금작물로 생산하던 마데리아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에 노예제가 일부 도입되기는 했다.
그러나 설탕 생산마저도 이 섬들에서 노예제가 광범하게 시행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새로운 방식의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탕 재배 농장은 1460년대에 처음 등장했는데, 카포베르데 제도에서 출발해 남쪽의 기니 만 Gulf of Guinea으로 확대되었다.
포르투갈인이 정착하기 시작할 무렵 이 섬들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았고, 유럽인이 대규모로 정착하기에는 기후 조건이 나빴다.
하지만 이 섬들은 인근의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왕래하는 노예 상인들로부터 일꾼을 구입하기 알맞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 로마 제국 이래로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이에 견줄만한 대규모 노예제 기반 농장 체제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인 노예 노동력을 사용한 사탕 재배 농장 모델은 그 후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의 카리브 해 Caribbean Sea로 수출되었고, 이것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와 유럽 모두에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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