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조선의 시작, 비파형 동검 본문

글과 그림

고조선의 시작, 비파형 동검

새샘 2024. 7. 20. 15:36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 하나가 한 나라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다른 나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청동기라는 기술은 거대한 하나의 문명을 이룰 만큼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역사책에는 없는 고조선 이야기

 

역사, 특히 한국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민족의 기원이라는 주제만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필자(강인욱)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민족의 기원을 알고 싶어 역사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환웅과 웅녀의 이야기, 단군 신화, 고조선, 그리고 그 외 국가들의 기원 설화는 이야기만으로도 재미있었지만, 이면에 숨은 개국의 의미와 상징을 찾아가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고고학의 문을 열면서 "한민족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출발점일지 모르겠다.

 

한반도의 기원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아니면 그와 이어지는 단군 신화?

역사와 지리 등 다방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타이 Altai, 시베리아 Siberia 같은 유라시아 Eurasia의 지역과 지명 정도까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정말 "한국사 교과서에서 본 이야기만이 고조선의 전부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다.

고조선이 한반도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표상으로는 서기전 2333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 연대는 상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들로 비파형 동검, 철기, 표주박형 미송리식 토기 같은 것이 진열되어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실제 고조선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성장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변명하자면 이것은 학자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고조선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기 위한 자세한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고고학에는 '원사시대原史時代 protohistory'라는 개념이 있다.

흔히 역사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先史時', 글자로 기록이 남아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歷史時代'라 하며, 그 중간을 원사시대라고 부른다.

분명 역사시대지만 정작 자신들이 남긴 기록이 없는 시대로, 고조선이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중국이 고조선에 대해 본격적으로 기록한 시점은 서기전 7세기대이다.

서기전 4세기가 되면 고조선은 연나라와 전쟁을 하거나 외교적으로 왕래도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중국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쓰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고조선의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고조선을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서기전 7세기에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도 청동기문화가 널리 발달하면서 본격적으로 계급이 등장하고 국가가 형성되었다.

여기까지 파악하고 나면 이제 고고학자들이 등장할 차례다.

그들이 하는 일은 마치 외국에 나가 외국어를 모른 채 물건을 사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같다.

고조선이 남긴 물질의 흔적만으로 그들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고고학의 한 가지 장점은 기록과 달리 유물은 계속해서 발견되면서 새로운 자료로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접근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유물은 스스로 자신들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이 물건을 이러저리 관찰하면서 유추와 해석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고고학자들은 어떻게 고조선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이를 증명하려면 먼저 시간과 공간을 정해야 한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고조선이 존재했던 지역을 파악하고 그 일대에서 국가가 있었던 흔적을 찾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조건은 바로 계급이었다.

계급 사회에서는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귀족, 제사장, 그리고 군사 계급 등이 놓이게 된다.

그런 상위 계급의 무덤에는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유물이 묻혀 있다.

즉, 무덤의 크기와 유물의 차이를 비교해서 당시 왕이나 귀족의 역할을 했던 사람을 밝히는 것이다.

통치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물건은 대체로 아름답고 귀한 금속인 청동기로 만들어졌다.

청동기는 전 세계적으로 문명의 발달을 이야기할 때에 가장 먼저 손꼽는 유물이다.

고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사진 출처-출처자료1)

 

위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역사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이렇게 생긴 유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파형琵琶形 동검銅劍 Lute-shaped Bronze Dagger이다.

비파형 동검은 옛날 악기인 비파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파랗게 빛나는 청동 재질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만주의 랴오닝성(요령성辽宁省/遼寧省) 근처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랴오닝식 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최근 한반도에서도 많이 발견되어 비파형 동검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여기서 잠시 유물의 명명법을 짚고 넘어가자.

비파형 동검이란 이름은 어떻게 붙은 것일까?

현대인은 본 적도 없는 비파라는 악기에서 유물 이름을 따온 이유는 발견 당시 고고학자가 비파라는 악기를 연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비파형 동검도 나라마다 다르게 명명되었다.

영어로는 기타의 전신인 '만돌린 mandolin'이나 '류트 lute'라는 악기를 본뜬 이름으로, 러시아에서는 '바이올린형 동검'으로 부른다.

 

독특하게도 이 무기에 이름을 붙일 때 모든 나라에서 주목한 부분은 칼날 가운데에 삐죽 나온 돌기였다.

칼을 매끄럽고 길쭉하게 만들지 않고 중간에 돌기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비파형 동검은 손잡이인 자루를 포함하면 50센티미터에 이르는 장검이다.

재료는 철보다 부드러운 금속인 청동을 사용했다.

검을 가늘고 길게 만들 경우, 이런 특성으로 쉽게 휘어질 수 있으므로 중간에 돌기를 만들어 안정감을 준 것이다.

 

지금은 녹슬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청동검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겉에는 화려한 장식과 칼집이 더해져 지배자의 군사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무기였다.

고고학자들이 한때는 이 무기를 고조선 자체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을 만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청동기는 문명의 상징이다.

인간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신소재의 이름을 기준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하나의 시대에 청동기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이 소유했던 청동기 유물이 가진 상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문명의 발흥, 청동기의 시작

 

이집트 Egypt,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처럼 서양의 대표적인 고대 문명은 약 6,000년 전부터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피라미드 pyramid와 같은 거대한 무덤이나 관개시설을 축조하면서 거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그보다 훨씬 늦은 시기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청동기를 사용한 시점은 약 4,000년 전이다.

한국의 경우 약 3,500년 전에 처음으로 청동기를 만들었다.

최근까지 3,000년 전으로 알려졌지만, 2016년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청동기로 장식한 목걸이가 발견되면서 청동기 사용 시점이 이전보다 500년 가까이 빠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고 해도 비파형 동검과 같은 본격적인 청동기를 사용한 시점은 약 3,000년 전으로 다른 문명에 비해 많이 늦다.

 

청동기를 도입한 시기는 문명마다 모두 다르지만, 청동기와 함께 모든 문명이 새로운 사회로 발돋움했다는 것은 특징적인 공통점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국가가 발생하고 문명이 발생했으며 고인돌이라고 하는 무덤, 즉 매장 문화가 생겨났다.

벼농사를 시작했으며 마을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협력하며 점차 사회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고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청동은 고조선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신소재였다.

귀족, 제사장, 전사 등 그 시대의 지배계급은 자신을 상징하는 유물을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다.

 

남한에서 청동기가 발견된 사례는 많지 않지만, 어느 한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나왔다는 것은 당시에 그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신기술과 환경이 갖추어져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발견된 유물이 몇 점에 불과하더라도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과거에는 이미 널리 청동기가 제작되고, 수많은 사람이 이를 사용했다는 방증이다.

어느 시대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유행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고조선 시기에 청동기는 고대의 '하이 테크놀로지 high technology'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청동기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을까?

청동은 구리와 주석을 적절한 비율로 혼합해 주조한다.

구리는 전 세계적으로 흔한 재료로, 자원이 부족한 한반도에서도 구리광산이 다수 발견되었다.

반면 주석은 그렇지 않다.

지금도 고대에 주석을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출처를 알아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귀한 광물로 손꼽힌다.

한반도에서 사용된 주석은 중국이나 몽골 등 다른 나라에서 구했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순수한 구리의 녹는점은 섭씨 1085도로 상당히 높으므로 일상에서 자연적으로 녹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주석은 녹는점이 232도로 낮으므로 가공하기 쉽다.

구리와 주석을 섞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옅은 초록색이 되면서 훨씬 아름다워지고, 녹는점도 낮아져 원하는 모양대로 장신구나 무기를 만들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동기를 만드는 과정이 간단했던 것은 아니다.

품질이 높은 청동기를 만들 때는 정교하고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광산에서 구리가 함유된 천연 광석을 캐고, 여기에서 순수한 금속만 추출하는 정련 작업을 거친다.

이후 원하는 모양에 맞게 미리 제작한 거푸집에 녹인 쇠붙이를 부어 기구를 만드는데, 이 작업을 주조라고 한다.

틀에서 모양이 유지된 채 쇳물이 굳으면 거푸집을 제거해 비로소 청동기를 완성한다.

 

청동기는 철기에 비해 아름다웠지만 그다지 단단한 제품은 아니었다.

사용하다가 망가지는 일도 흔히 일어났다.

따라서 청동기 제조 기술자들은 기물이 망가지면 보수하는 일도 함께 해야 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정교한 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필요했다.

 

청동기의 주성분도 한번 살펴보자.

청동기는 대체로 구리와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정밀 성분 분석을 해보면 그 밖에도 납이나 아연이 포함된 사례도 있다.

한국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동검은 평균적으로 구리가 대략 80퍼센트이고 주석은 15퍼센트 정도이다.

반면에 제례 의식에서 사용하던 거울이나 방울과 같은 의기류에는 구리 60퍼센트, 주석 25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섞여 있다.

아연은 미량에서 많게는 2.4퍼센트까지 들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 비율은 일정하지 않고 측정할 때마다 차이가 난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발견된 청동기에 아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중국과 시베리아 계통의 유물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의견인데, 아연을 자연에서 추출해서 사용한 지는 불과 몇백 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연은 1746년에 마르그라프 Marggraf라는 독일의 화학자에 의해 천연광물에서 최초로 분리되었고,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천연 광물에는 여러 가지 성분이 섞여 있기 마련이어서 아연 역시 자연스레 청동기에 포함될 수는 있다.

하지만 고대의 장인들이 일부러 아연을 섞었다고 생각하거나 그 이유로 청동기 생산의 계통을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다.

 

 

○건국의 비밀 병기로 쓰인 청동기

 

이처럼 고고학의 관점에서 청동기는 고도로 발달한 사회와 기술을 뜻한다.

예를 들어, 몇천 년 뒤에 미래의 고고학자가 우연히 핸드폰의 깨진 액정 조각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물건은 사소한 유리 조각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스마트폰의 부속은 반도체 기술, LED 기술, 와이파이망, 애플리케이션의 발달, 스마트폰 기반의 문화 등 21세기의 사회상과 첨단기술을 나타내는 핵심 자료이기 때문이다.

 

청동기도 마찬가지다.

청동기 제작은 채굴에서 보수까지 일련의 작업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복잡한 일이다.

따라서 인적·물적 자원을 댈 수 있는 상류층이 이 모든 일을 지휘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청동기시대에 지배 구조가 생기고, 계급이 발생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국가가 탄생할 때는 필연적으로 계급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청동기는 시대를 대표하는 물건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 즉 지배계급이 권력을 공공히 하는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더 중요했다.

이로써 청동기는 고대인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 국가를 만들게 되었느냐에 대한 해답이 담긴 비밀의 기물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에 청동기가 들어오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고조선이 있었던 요령에서 서북한西北韓 지역은 광산이 많아 원석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내몽골자치구의 츠펑(적봉赤峰)시를 중심으로 하는 내몽골 동남부 지역은 청동 광석이 제일 풍부했다.

린시(임서林西)현에는 한 광산회사가 채굴하는 지역 근처에 3,000년 전에 사용했던 광산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곳에는 구리 원석을 캐기 위해 땅을 판 흔적뿐 아니라 채광하면서 밥을 해 먹은 흔적과 동물 뼈, 그릇, 돌 캐는 도구들이 다수 발견되어 활발한 채광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내몽골 동남부 지역은 단순히 청동 광석이 풍부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자원이 풍부한 몽골 초원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위치해 있어 당시 가장 발달된 청동기 기술을 보유한 초원의 유목민들이 내몽골 지역으로 유입되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여기에 구리광산마저 갖추고 있으니 당연히 3,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그리고 활발하게 청동 제련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 당시에 존재했던 문화를 '샤자덴(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조선에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의 기원으로 아주 유력하다.

 

청동기시대에 원석에서 순수한 구리를 추출하는 과정은 고급 기술이었다.

마치 요즘 반도체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는 것처럼 당시에 청동기 제작 기술은 아주 소수의 전문가만이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폐쇄적으로 공유하는 정보였다.

청동기를 가진 사람은 지배 권력을 쥐었으므로 청동기 제작 기술은 고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든 공통적으로 열망하는 신기술이었다.

 

 

청동기를 만들 때 사용했던 거푸집(사진 출처-출처자료1)

 

청동기를 만들 때 필수적인 도구는 거푸집이었다.

'용범鎔范'이라고도 불리는 거푸집은 지역마다 만드는 재료가 달랐다.

중국에서는 진흙을, 일본에서는 모래가 퇴적된 암석인 사암沙巖/砂巖을, 한국에서는 활석滑石을 활용해 거푸집을 만들었다.

활석은 자연산 광물 가운데서 경도가 가장 낮아 비누처럼 칼로 쉽게 긁히는 돌이다.

활석제滑石製(활석으로 만든 제품)는 중국에서도 비파형 동검이 분포한 지역에서만 출토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토범土范(흙틀)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발견된 사례는 없다.

 

청동기 전문가라면 이러한 과정을 숙련된 기술로 매끄럽게 진행하는 것은 물론 미적인 감각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청동기는 누가 봐도 마음을 끌 만큼 아름다워야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졌다.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유행이 있었으므로 유물로 발굴되는 청동기의 섬세한 면모는 처음부터 고조선에서 창작되었다기보다는 기술자들에 의해 유라시아를 거쳐 고조선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비파형 동검용 거푸집(사진 출처-출처자료1)

 

위 사진은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이다.

이 거푸집은 반을 쪼갠 형태의 한 쌍으로, 두 개를 합쳐 모양을 완성하고 그 안에 청동을 녹인 물을 부어 청동기를 만들었다.

이후에도 세밀한 공정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청동기가 탄생한다.

 

 

비파형 동검과 함께 바견된 청동기 유물(사진 출처-출처자료1)

 

거푸집에 청동물을 부을 때 두 판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주물이 정확하게 주입되지 않아 불량품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바로 위 사진 중 아래 왼쪽 사진의 거푸집과 같이 겉에 금을 그어 가운데를 정확하게 맞췄다.

3,000년 전에도 단 1밀리미터의 오차만큼도 틀어지지 않도록 정교한 기술을 발휘한 것이다.

 

또한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흠이 생기면 바로 위 사진 중 아래 오른쪽 사진처럼 보수를 했다.

손잡이 부분에 튀어나온 곳은 깨지거나 틀어진 청동기를 땜질한 흔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귀한 물건이라면 당연히 A/S는 필수고, 물건에 문제가 생기면 지속해서 관리해줌으로써 내구성을 높인다.

청동기는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후에도 꾸준히 장인들의 손길을 거치면서 소유자의 품위와 지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품질을 유지했다.

 

지금 바라보면 낡고 녹슨 청동기 하나에도 정말 많은 기술과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청동기는 고대 사람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 국가를 만들게 되었느냐에 대한 해답이 담긴 비밀의 기물인 셈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4. 7. 3 새샘